114화
“응?”
“그러니까 자신들이 만든 렉스에게 죽임을 당할까 말이죠. 저라면 죽일까 무서워서 렉스에게 손끝 하나 못 건드릴 것 같은데.”
“…….”
“마나로 그를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죠?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너무 믿는다니까요!”
수지는 잠자코 듣다가 말해 주었다.
“렉스의 힘을 유지시켜 주는 기계가 그들에게 있어. 그러니까.”
“아. 싫어도 따를 수밖에 없겠군요. 아무리 치사하고 못된 인간이라도.”
수지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이렇게 눈치 빠른 소년이 새라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수지와 헤어지고 나서 다른 인간들 앞에서 변신한 적이 없는 로난은 원래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면 그 앞에서 변신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기분이기 때문에.
따라서 관사의 사람들은 모두 렉스가 여자와 새를 데려왔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수지는 로난이 소년이 될 수 있다는 걸 왕성의 사람들이 모르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여긴 렉스를 무기로 써먹으려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야. 그러니 나나 너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수 있어. 조금이라도 수상하다 느끼면 근처로 가지 마. 널 잡아서 괴롭힐 수도 있어.”
“조심할게요! 이미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더더욱요!”
“위험하다 판단하면 그대로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아도 돼. 네가 무사하다는 의미로 작은 깃털 하나 남겨 주면 나는 안도할 테고.”
“하지만…… 저눙 어떠……언 경우에도 수지와 헤어지고 싶지 아능데요.”
쿠키를 잔뜩 입에 문 채로 울상을 짓는 사랑스러운 소년의 모습에 수지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나도 그래.”
보드라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 감기는 감촉이 그의 깃털처럼 따뜻하고 정 깊었다.
“어디까지나 만약에 말이야.”
진심을 담았다. 검은 눈동자가 따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네가 늪지로 무사히 돌아가길 바라거든.”
“저도 그래요! 나중에 이 인간 세계에서 겪은 모험을 가족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한동안 둥지는 제 이야기로 떠들썩하겠죠! 절 질투하는 사촌 녀석은 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부러워서 몸을 떨지도 몰라요. 꽁지깃이 부산스러워질 때까지 말이죠. 정말 기대된다니까요!”
라고 하하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개구쟁이 소년이다. 수지는 그렇구나, 하고 맞장구쳤다.
그렇게 한 여자와 새가 편하게 수다 떨고 있을 때, 렉스는 협박이 통한 연금술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금술사는 렉스의 이전 기록에 대해서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더니만 양손을 없애 버린다는 협박에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그에게 실험을 행하는 두 손만큼 중요한 게 없기 때문이었다.
“사, 사령관님의 기록은 여기가 아닌 왕성 중앙 기록관에 보관됩니다. 가장 중요한 기록이라서요! 이전 실험들에 대한 것도 전부 다 거기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들어갈 수 있는 건 왕과 왕자뿐인가?”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도 갈 수 있어요.”
“로리엔 님!”
로퍼는 반색을 띠며 막 복도에 들어서는 수석 연금술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급하게 달려온 것인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잠시 호흡을 고른 그녀는 로퍼를 향해 곧 기계적인 미소를 지었다.
“사령관께 대답해 드리느라 고생 많았어. 이제 내가 상대할게.”
“아! 예!”
살았다는 듯이 로퍼는 화색을 띠며 부리나케 복도 저편으로 달려갔다. 로리엔은 아무 일도 없는 척 렉스를 바라보았다.
“이런 은밀한 곳에서 제 직속 수하를 협박하면 어떡해요, 렉스.”
다정한 듯, 부드럽게 훈계하는 그녀였다.
“누가 알면 우리가 싸운 줄 알겠어요. 그런 오해를 윗분들에게 사고 싶은 건 아니죠? 그분들은 우리 사이에 불화가 있는 걸 감내하지 않으실 거예요. 어떻게든 빨리 화합하는 관계로 돌아가 임무를 수행하길 바라지.”
앞서서 걸어가며 말하는 로리엔에겐 방금 전 일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해 버리는 노련함이 있었다. 하지만 렉스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로리엔이 표현하지 않은 미묘한 긴장감을 읽을 수 있는 자였다. 뻣뻣한 걸음걸이부터, 꼿꼿한 등줄기까지. 어딘가 날이 선 분위기가 풍기는지라 렉스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봤다.
‘공격을 앞두고 몸을 움츠린 짐승 같군.’
그게 자신의 여자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렉스는 로리엔이 무슨 일을 꾸미려는 중인가 생각했다. 온순한 성향이긴 해도 수석 연금술사라는 명함을 지닌 만큼 그녀는 왕국에 충성하며 수상 쩍은 실험을 자행하는 인물이다. 약하다고 방심하면 안 될 일. 렉스는 그런 그녀를 경계하면서 평소처럼 말했다.
“불화? 우린 애초에 불화고 화합이고 논할 관계가 아니잖아. 그냥 업무 상 부딪치는 것이니.”
“…….”
그 말에 동요한 듯 늘씬한 등이 멈칫거렸지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입술을 다무는 로리엔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이런 말 하나에 일일이 상처받아 봤자 좋을 거 없다고. 누가 뭐래도 자신은 그의 유일한 연금술사니까. 로리엔은 애잔하게 웃었다.
“여전하군요, 렉스.”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전히 무정해.”
“…….”
“그래서 당신답지만 한편으론 아쉬워요. 전 당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거든요? 누구보다도.”
‘……연인처럼.’ 로리엔은 못다 한 말을 삼켜야 했다. 렉스는 뒤에서 반응이 없었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건 그녀의 생각일 뿐이란 듯이 렉스는 제가 원하는 것만 말했다.
“난 나에 대한 기록을 보고 싶어. 모호한 말들 말고 정확한 단어로 서술된 기록물을.”
“어째서요?”
“알고 싶어졌으니까.”
“제가 알려 주는 당신만으로 부족해요?”
“말했을 텐데. 모호한 말들이 아닌 정확하게 단어로 알고 싶다고.”
로리엔이 돌아섰다. 그를 쳐다보는 눈에는 뼈아픈 애정이, 갈구하는 애심이 넘쳤다. 로리엔은 억울함을 호소하듯이 말했다.
“모호함이 당신을 존재하게 하는 거예요. 애초에 명확함으로 당신을 창조해 낸 게 아니라 모호하고 알 수 없는 것에서 당신이 만들어진 거니까.”
“그런 거창한 말들.”
렉스는 미소를 머금었다. 경멸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처음부터 지겨웠거든?”
“!”
“내가 말 잘 듣는 개라고 느끼게 했다면 미안해. 아쉽게도 난 그렇게 잘 만들어진 창조물이 아닌 모양이야.”
“레, 렉스.”
“있잖아. 세상을 부수고 싶은데 마침 왕국이 있었네. 왕국엔 마나를 공급하는 기계가 있잖아? 그게 다야. 그게 내가 왕국을 부수지 않고 따르는 이유라고.”
“하, 하지만 저랑 렉스는! 우리 둘은! 한 몸으로 협력해서 제국을 부수고, 왕국의 영광을 가져왔잖아요! 조금만 더 하면 영광은, 빛나는 승리는 우리의 것인데!”
“이런, 이런, 로리엔.”
렉스는 노래 부르듯이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거기에 다정함이나 따스함은 없었다. 그저 껍데기 관계 속에서 정을 찾으려는 어리석은 여자를 탓하는 냉랭함만이 존재할 뿐. 렉스는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서 속삭였다.
“아직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르고 있잖아?”
“…….”
“난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야. ‘죽음’ 그 자체를 위해 움직이는 거지. 이런 이야기조차 신물 날 정도로, 그저 죽음을 원하는 거야. 결국 나는 승리라는 말로 포장된 죽음의 진한 잔영일 뿐이니까.”
어떤 존재를 만들어 낸 건지 똑똑히 알라는 듯이 렉스가 속삭임을 끝냈다. 로리엔은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당신…….”
몸은 이토록 가까워졌는데 왜 그의 마음은 더 멀게만 느껴질까. 스스로 죽음의 잔영이라고 칭하는 존재. 그런 존재에게 빠진 제 마음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제가 만든 창조물이라고 더 마음이 가고 손이 가는데. 그는 그런 자신을 몰라주는 게 원망스럽기만 하다.
‘웬 엉뚱한 여자에게 곁을 주고서 말이야.’
그에게 안겨 있던 늪지의 여자만 떠올리면 기분은 더더욱 나락으로 떨어진다. 로리엔은 이를 연금술의 부작용으로 이해하려 애썼다. 사령관의 욕구에는 파괴욕과 정복욕이 있는데 늪지의 천진하고 순박한 여자가 저도 모르게 사령관의 정복욕을 자극한 것이라고.
‘육체적인 끌림일 뿐이야.’
그 끌림에는 끝이 있을 것이다. 조만간 렉스도 그녀를 지겨워하리라고 생각하며 로리엔은 침착하게 덧붙였다.
“당신이 그래도 제 마음은 달라지지 않아요. 여전히 왕국의 보물인 당신이 저와 왕성에 무한한 영광을 안겨 주리라 믿고 있죠.”
“뭐, 그래.”
무모한 맹신보다 상대하기 귀찮은 건 없다. 렉스가 대화가 지루해졌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무엇이 됐든 좋은 관계, 협력하는 관계라면 내게 협조해 줄 수도 있을 텐데.”
기록을 원한다는 어조에 로리엔은 따지듯이 묻고 말았다.
“왜 기록을 알고 싶은 거예요? 왜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졌죠?”
그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게 되지 않을까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여자 때문에. 그녀에 대한 기억을 잃은 거 같거든.”
“!”
“움찔할 걸 보니, 찔리는 게 있는가 본데?”
“그, 그럴 리가요.”
저도 모르게 렉스의 눈을 피한 로리엔이었다. 렉스는 그 뻔한 행태가 우스웠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가 알고 싶은 건 연금술사들이 떠드는 모호한 대답이 아니었다. 확실한 기록이었지. 어쨌든 그녀가 순순히 승낙할 것 같지 않자, 렉스는 시간 낭비했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서둘러 로리엔이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 어디 가요? 아직 대답을 듣지 않았잖아요!”
“해 줄 건가?”
“그, 그럴 수 있죠. 렉스가 제 말을 잘 듣는다면요.”
결국 말 잘 듣는 개가 필요하다는 거구나. 말만 거창했을 뿐 원하는 건 항상 같았다.
“뭘 바라는데?”
렉스가 비딱한 어조로 물었다.
“당분간 왕실의 행사에 다 저를 대동하고 가요. 당신의 파트너는 저만 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