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앞으론 자잘한 임무에서 모조리 제외되고 싶습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만큼 대규모 전투 한두 개를 빼곤 제가 나갈 필요가 없으니까요.”
“응?”
“제가 아니더라도 소규모 전투에선 왕국의 승리가 당연하지 않습니까. 제국의 주요 거점 무기 제조 시설을 모두 파괴한 데다 타국의 지원도 받지 못하게 작은 무역로까지 일일이 감시하고 있으니까요. 실질적으로 무기와 지원이 없는 제국이 이길 가능성은 없잖습니까.”
“잠깐, 잠깐. 그 이야긴 어디서 들었지?”
외부에 알려진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제야 막 자신도 정리된 정보를 접했는데. 놀랐다는 얼굴에 렉스는 짧게 웃었다.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면 전쟁 담당 사령관이라는 직명을 반납해야겠지요.”
“그야. 물론 그렇긴 한데…….”
하지만 자네는 이제야 막 눈을 떴지 않은가. 아직 본인의 힘이 어떤 것인지도 파악하기 벅찬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왕자는 냉철하게 모든 걸 파악한 듯이 말하는 렉스를 두렵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창조한 눈앞의 인물은 단순히 파괴력과 공격력만 높은 무기가 아니었다. 모든 상황에서 승리를 거두도록 두뇌가 구성된 순수한 전쟁의 종결자였다. 정보를 조합하고 체득하는 능력까지 뛰어난 무기가 야망까지 갖게 되면 어떤 존재가 될지. 섬찟한 두려움을 느끼면서 왕자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령관. 전쟁 상황과 자네 문제는 결이 달라. 자네는 지금 여자 때문에 임무를 줄여 달라고 하는 거잖아. 그건 직무 유기야. 여자가 생겼다는 건 임무를 소홀히 하는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어. 어떤 경우에서도 특별 사령관인 자네는 전쟁에 참가해서 우리나라에 승리를 안겨 줘야 해. 몸이 부서져서 그럴 수 없는 불가능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잘한 임무에도 모조리 참가해 승리를 얻어 내야지.”
왕자는 무게 있게 말을 이었다.
“그게 자네가 ‘특별’ 사령관으로 존재하는 이유니까.”
타박하는 소리에 렉스가 반응했다.
“제가 사령관을 그만두고 싶다면요?”
“뭐?”
“지긋지긋해서 이제는 여자랑 놀며 한가롭게 시간 보내고 싶다면요?”
“……!”
“제 존재 목적에 어긋났다고 죽이시겠습니까?”
왕자의 입술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정곡을 찔려 놀란 것도 같고 궁지에 몰려 불쾌해진 것 같기도 하다. 하기야 왕자의 입장에선 막대한 금화와 인력, 시간을 쏟은 존재가 엇나간다면 비뚤어진 자식을 보는 것보다 더 불안할 것이다. 수습하려 갖은 수단을 다 써 보겠지.
‘기억을 잃게 하는 건 오히려 온건한 방법인가.’
창조물을 죽여 버리는 강경한 방법도 있으니까. 그래서 냉랭한 겉과 달리 속은 무덤덤하게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이미 죽음이 자신에게 떨어지는 최악의 수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면 왕자는 사령관이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걸까 궁색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여자라는 건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그는 사령관이 내부의 명령 체계나 마나 공급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닌지 싶었다.
‘어쩌면 사람 죽이는 일 자체가 싫어졌는지도.’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무심한 사령관을 힐끔 바라본 왕자가 결국 묻고 말았다.
“자네 왜 그러지? 혹시 더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졌나?”
“그건 아무렇지 않습니다. 단지 여자랑 놀고 싶어졌을 뿐이죠.”
왕자가 침묵했다. 깔끔한 답변이었다. 결국 여자란 대답에 왕자는 곤란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임무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놀기 좋은 여자들을 매번 제공하지. 낮도 밤도 매력적인 아가씨들로.”
“관심 없습니다.”
“그럼 원하는 여자가 있나? 어떤 여자라도 좋아. 원한다면 내 약혼녀라도 데려다줄게.”
렉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권력과 힘을 위해서 어떤 것도 불사하겠다는 인간이 후계자라는 게 왕국에 좋은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렉스는 다소 느긋하게 자세로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원하는 건 한 여자입니다. 지금 제가 데리고 있는 여자요.”
데리고 있는 여자? 그 여자가 대체 누구야. 왕자는 터져 나오려는 질문을 멈췄다. 질문을 한다는 건 여자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알리는 반증이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제가 부리는 무기의 여자도 몰라서 어디 쓰겠나. 이런 생각으로 왕자는 미묘하게 굳어진 웃음을 지은 채, 문제의 본질을 건드렸다.
“어쨌든 자넨 이제 막 깨어났어. 그런데 여자가 생겨 일을 팽개친다고? 여자보다 전쟁이 중요하다고 느껴서? 자네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래서 말인데요. 안 그래도 제 욕구가 비정상적이라서 느껴져서요.”
렉스는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눈빛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가 이번에 처음 깨어난 게 맞습니까?”
“뭐?”
“아니, 느낌 상 예전에도 이랬던 거 같아서요. 아미 겪었던 여자를 눈을 떠 또 겪는 느낌이랄까.”
“…….”
“아니라 하신다면 물론 그렇다고 알겠습니다만.”
렉스가 싱긋 웃었다. 그러나 눈은 어딘가 오싹할 정도로 어두웠다. 윗선들의 기만과 오만에 대한 분노가 살아 있었다. 왕자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지만 그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예전 기억을 없앴다는 건 그에게 알릴 정보가 아니었고 알려져서도 안 되었다. 모든 사실을 안다면 당연히 그런 결정을 한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터. 왕국의 주요 무기인 그가 자신을 따르지 않는 것만큼 곤란한 일은 없었기 때문에 왕자는 모른 척 대답했다.
“자네는 이번에 깨어났어. 이전에 많은 무기가 있었지만 자네 같은 이들은 아니었지.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제가 누군지 알고 싶었는데.”
애매한 대답에 렉스의 목소리에 아쉽다는 음색이 더해졌다. 노골적인 감정에 왕자는 답답해지고 말았다. 죽이라는 명령이면 무조건 수행하는 그가 좋았다. 그런 그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서 묻고 말았다.
“자네는 특별 사령관으로 있는 현재가 불만족스럽나?”
“특별 사령관, 왕국의 무기, 전쟁 종결자. 어떤 표현을 하든 제 생각은 똑같습니다. 여자랑 놀고 싶다는 거요. 전쟁이나 임무 이런 것보다 그 여자랑 있는 게 몇 배는 재미있거든요.”
“그런…… 여자가 생겼다고? 눈을 뜬 이후로?”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놀랐군. 믿어지지 않아.”
“다들 그런 반응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렉스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이야기는 다 했다. 자신의 본심도 전달했고 여자가 있다는 것도 말해 두었으니 이제 어떻게 나올 것인지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들이 안 되겠다고 판단했으면 저도 그렇게 반응하면 되고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했으면 수지와 함께 하는 날들을 고민하면 되니까.
‘어떤 쪽도 나쁘지 않아.’
렉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짤막하게 덧붙였을 때였다.
“그럼 관사로 돌아가 전하의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잠깐.”
왕자는 심각해진 눈빛으로 물었다.
“여자 때문에 중요한 걸 잊은 거 같은데, 오늘 임무는 어떻게 됐지?”
“연금술사는 죽었습니다. 애송이 같더군요. 제국이 왜 애송이를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걸 감추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하면서 고심하며 턱을 쓰다듬는 왕자였다. 렉스는 그가 고민에 빠진 걸 보면서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제국이 중요한 것을 감추고 있다고 의심한다면 그걸 알아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리란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집중하면 상대적으로 내게 덜 관심이 쏠릴 테니까.’
그 틈에 자신도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마나 동력 기계를 확보하면 된다. 그러면 수지와 단 둘이서 살아도 될 미래가 보장되는 거니까. 그 과정에서 장애물이 되는 건 모조리 없애 버리자고 결심하면서 렉스는 몸을 돌렸다.
미련도 예의도 없다는 듯이 사라지는 그를 보면서 왕자는 쓰린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를 상대하는 게 두려웠다는 듯이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잠깐 사이에도 공포에 떤 몸을 보니 사령관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문제는 그런 굉장한 존재가 제 손바닥을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
“절대 벌어져선 안 되는 일이야.”
조용히 중얼거린 그의 눈은 생각보다 더 어두웠다. 야망과 야욕에 이글거리는 눈망울을 빛낸 그는 재빨리 수하들을 찾았다. 제국이 감추고 있는 중요한 정보를 파악하라고 하는 가운데 사령관의 곁에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 대대적인 조사에 들어가라고 명했다.
그 시각 이후 수지에 대한 정보가 속속들이 모이고 있을 때, 조사의 대상인 수지는 상당히 한가로운 기분으로 관사에서 로난과 함께 간식을 먹고 있었다.
왕자를 만나고 온 렉스가 관사로 그들을 데려갔다. 렉스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했고 그 사이 그의 명을 받은 시종이 와서 간식거리를 준 것이다. 커다란 쟁반에 가득 담긴 고급 수제 쿠키와 파이, 주스를 보자 로난은 입이 딱 벌어졌다. 인간의 음식을 좋아하는 그답게 신이 난 모습을 보며 수지는 로난 쪽으로 그릇을 놓아 주었다. 로난이 맛있게 먹는 모습이 좋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만나서도 말했지만 다시 한번 말하고 마는 수지였다. 그동안 힘들었을 그가 안쓰러웠기 때문일까. 수지의 눈에는 측은함과 미안함이 짙게 배어 나왔다. 로난은 씩씩한 생명답게 힘차게 말했다.
“괜찮아요! 물론 그 갑작스러웠던 이별 뒤에 어떤 못된 인간에게 팔릴까, 박제가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웠던 순간도 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무엇보다 그동안 절 데리고 있던 인간이 굉장히 친절했어요! 매일매일 신선한 벌레도 잡아 주었고요, 먹으라고 자신이 먹을 곡식도 나눠 줬어요! 수지가 말을 잘한 모양이에요!”
“렉스가 그러라고 한 건데 올라오면서 잘 대접 받았다니 기쁘다.”
“헤헤! 저도 수지가 무사해서 기뻐요! 이상해진 렉스랑 사라져 버려서 걱정 많이 했거든요! 죽음의 기운이 더 세져서요. 근데 그게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니! 인간들은 그를 그렇게 만들고서 두렵지도 않은 모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