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렉스?”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대답이 들려올 수 없을 만큼 먼 거리라는 걸 알면서도 또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른 그녀는 곧 왈칵 인상을 굳혔다.
“이잇!”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렉스가 그 여자를 품에 끼고 있는 게 끔찍했다. 목격한 두 눈을 찌르고 싶은 기분! 그가 누군가를 껴안는다면 그건 저여야만 했다. 오로지 자신만이, 렉스를 만들고 돌봐 준 저에게만 그 자격이 있는데!
‘근데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따위가 내 자리를 차지해?’
분노로 팔짝 뛸 일이다. 얼마나 역겹고 저주스러운 상황인지 모르겠다! 로리엔은 거칠어진 숨소리를 내뱉으며 수지를 노려보았다. 누군가 역한 흙덩어리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은 기분이었다. 가슴이 시원해지려면 그 흙덩어리를 완전히 치워야만 가능하다는 듯이!
로리엔이 그렇게 홀연한 분노를 토해 내고 있을 때, 백작 또한 놀랐다는 시선을 수지에게 보내고 있었다.
“이거 괜찮을까요? 상당히 문제가 생길 거 같은데.”
비정하게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령관이 웬 여자 하나에 빠져 있다니. 윗선들이 알게 되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임무에 방해를 받기 전에 여자를 떼어 놔야 한다고 생각할 텐데…….
‘그나저나.’
저 여자가 솔리나라는 여자가 말했던 노예는 아니겠지? 의심은 곧 추측으로, 추측은 곧 확신으로 변해갔다. 그도 그럴 것이 노예가 사라진 시점과 사령관이 떠났다는 시점이 비슷했던 것이다. 궁금한 건 사령관이 저 여자 노예에게 신성한 사슴과 같은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서 데려갔냐는 것이다.
‘능력 때문에 여자에게 빠진 건가?’
그럴 인물처럼은 전혀 안 보이는데. 원체 인간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령관이라서 그런지 여자를 보호하듯 품속에 낀 모습이 더욱 신기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백작은 저 여자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저런 신비한 능력을 소유했는지와 어떤 경위로 사령관과 저런 관계가 되었는지가, 국정을 파악하려면 필수로 알아야 하는 정보로 보였다. 백작이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결심했다는 듯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제는 해결될 겁니다.”
“네?”
잘못 들은 건가 백작이 되물었다. 분노와 냉기로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로리엔이 있었다.
“렉스의 문제는 해결될 거라고요. 그게 저희 연금술사의 일이니까.”
“아.”
백작은 왠지 나지막하게 감탄하고 말았다. 평소 온순했던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로리엔의 자극적인 반응이 무척 새로웠다. 자신이 아끼는 남자가 걸려 있어서인지 멀어지는 기구를 쏘아보는 눈에는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질투심과 복수심이 넘쳐흘렀다.
“근데 나아가는 모습이 조금 이상하군요.”
잘 가던 기구가 갑자기 멈칫해서 돌아온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싣고 다시 나아가는 게 아닌가. 백작은 그게 무엇 때문일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로리엔은 렉스가 아니라면 별 관심도 없다는 듯이 눈을 돌리고는 왕성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백작은 ‘새장 같았는데.’를 중얼거리며 그녀를 따라 말 고삐를 잡았다. 가야 할 왕성에 왠지 벌써 먹구름이 낀 느낌. 기분 탓일까 웃으면서 백작은 여느 때처럼 수석 연금술사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렉스는 바로 관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왕성에 도착해 기구에서 홀로 내린 그는 수지에게 잠깐 로난과 있으라고 말했다. 기구에 있는 게 관사에 홀로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고 느낀 것이다. 기구의 연금술사에게 얌전히 대기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온 그는 실내 정원에 다다르자마자 나른한 자세로 벤치에 앉아 버렸다.
“왕자의 개인 정원이라.”
왕성에서 가장 볕이 잘 든다는 호화로운 실내 뜰, 금가루가 섞인 물이 대리석 분수대에서 연신 뿜어져 아래로 방울방울 부서지고 있다. 햇빛에 반사되는 모양새가 화사하기 짝이 없었다. 그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렉스 역시 그 풍경에 녹아든 것처럼 어색함 하나 없이 자연스러웠지만 조각상 같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비딱하기만 했다.
“돈지랄이네.”
금과 보석이 뿌려진 사방. 주변 꽃과 나무들에 장식한 동상과 조각들도 하나같이 값비싼 광석들로 만들어졌다. 렉스는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전쟁으로 왕국의 금고가 동이 났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여기만 보면 돈이 넘쳐나서 주체를 못하고 지랄맞게 꾸며 놓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밖에는 전쟁으로 굶어 죽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장소에서 맘 편히 쉬는 족속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사령관은 부스럭거리는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곧 예상했던 헐떡거림이 들려왔다.
“아, 아잉-!”
“크! 역시 자네 입도 그러더니만 아래도 조임이 좋군!”
음탕한 대화였다. 남자가 여자의 안을 헐겁게 쑤시는 소리도 이어졌다. 그때마다 좋다고 자지러지는 여자. 과장된 소리 같건만 남자는 모르지만 그저 헥헥 돼지 같은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함께 절정에 다다랐다.
남자는 힘이 빠졌는지 숨소리가 금세 흐트러졌고, 여자는 방금 전 죽겠다고 외친 게 거짓인 양 힘이 넘치는 어조로 ‘전하, 또 불러 주세요, 훌륭하신 물건 또 넣고 싶어요!’를 애교처럼 반복했다. 남자가 마침내 듣기 지겨웠는지 ‘그래, 알았어. 자네가 그만 말한다면 그렇게 할게.’라고 대꾸했다.
잠시 후 만족스러운 대답에 여자 하나가 벌게진 얼굴로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나무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입고 있는 드레스가 조금 유행이 지난 거였다. 외곽 변두리 도시의 귀족이 입성하면서 데리고 온 딸로 운 좋게 무도회에서 왕자의 관심을 끌어 왕성의 실내 정원까지 오는데 성공한 여자다.
뛰어난 혀 기술로 왕자를 만족시킨 그녀는 왕자가 자신을 또 불러 줄 거란 기대에 행복하게 걸어가고 있었지만 상대의 생각은 달랐다. 여자가 너무 닳고 닳아 제 취향이 아니었다. 차라리 도도하고 까칠한 요조숙녀 쪽이 벗겨 먹는 맛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상대, 아니 왕자는 느릿느릿하게 제복의 단추를 채우며 덤불에서 걸어 나왔다.
“어?”
기척의 기도 모르는 여자는 당연히 렉스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왕자는 달랐다. 그는 매일같이 기사들에게 검술 훈련을 받는 터였다. 따라서 렉스가 일부러 살기를 드러낸 걸 지나치긴 어려웠다. 왕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전하.”
이제야 자신을 보았냐는 듯이 나지막하게 입을 여는 사령관이었다. 왕자는 음험한 기운을 뿜어내는 그에게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날 만나러 기다린 건가? 거기 앉아서?”
몹시 당황했지만 그 티를 내지 않는다. 조금 놀랐다는 정도라서 렉스는 그의 처세가 꽤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역시 권력자라서 낯짝이 두껍고 철면피 능력이 뛰어난 건지. 렉스의 그렇다는 미소에 왕자는 허탈한 웃음을 냈다.
“이거 아주 놀라운데. 사람들에게 말하면 모두 놀랄 거야.”
들뜬 듯 경망스러운 어조와 달리 그의 눈빛은 복잡하기만 했다. 사령관이 저를 어떤 이유에서 홀로 찾아온 건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경계심이 잔뜩 인 상태였지만 겉으로는 ‘특별 사령관이 나를 찾아오다니. 오늘 일은 기록관에 남겨 놔야겠어. 두고두고 상기하게.’라고 태평하게 떠들고 말이다. 렉스는 그의 천연덕스러운 반응이 모두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본론을 말씀드리기 전에요.”
“응?”
“이 정원에 피가 흐르는 걸 보고 싶지 않으시다면, 수하들에게 물러나라고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그러니까 공격 준비를 끝낸 전하의 수족들이요. 한 20명 정도 되려나?”
“!”
보이지도 않는데. 심지어 자신은 그들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하지만 전쟁 사령관은 남달랐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만큼, 비밀 호위에 최고라는 자들을 순식간에 파악했다.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데도 진다는 생각은 아예 없는지 앉아서 뻔뻔하게 충고까지 하면서.
“전 기습을 당하면 힘을 조절하지 못하는 버릇이 있어서요. 전하께서 아끼는 졸병들을 모두 죽일까 걱정됩니다.”
전혀 걱정되지 않으면서 걱정을 논하는 뻔뻔한 렉스였다. 한편 왕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자신도 만만치 않다는 듯이 말이다.
“미안하지만 사령관. 그럴 순 없어. 나는 장차 이 나라를 이끌 사람이라고.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왕국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는 것이지. 적통 후계 없이는 왕국의 미래는 폭풍 앞의 횃불과도 같을 거야. 따라서 호위가 존재하는 건 내가 존재하는 것만큼 당연하다고 이해해 주게나. 물론 자네를 공격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들도 무모하게 죽고 싶지 않을 테니 내 허락 없이 공격하는 일은 없겠지.”
“그럼 다행이군요.”
제법 배짱이 있었다. 자신을 앞에 두고도 당당하게 버티겠다고 말하다니. 한편으로 그런 똥배짱이라도 있어야지 사람들을 속이고 부려 먹지 않나 싶다. 렉스는 담담하게 본론을 밝혔다.
“그럼 말씀드립니다. 제 상황을 보고하러 왔습니다.”
“직접? 수하를 통해 들려 줘도 됐을 텐데.”
“일이 중하다고 느껴져서요.”
“그래? 자네가 느꼈다면 분명 그러한 이유가 있겠지. 좋아, 어떤 상항인지 보고해 봐.”
왕자는 너그럽게 말했다. 웃는 표정과 달리 그의 머릿속은 신중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제국의 용병들을 처리하러 갔던 일. 연금술사를 잡으러 갔던 임무에서 중하게 느꼈을 사안이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하지만 렉스의 이야기는 완전히 달랐다.
“제게 여자가 생겼습니다.”
“뭐? 방금 여자라고 했나?”
왕자는 잘못 들은 것인가 귀를 그쪽으로까지 기울여 보았다. 하지만 렉스는 천연덕스럽기 그지없었다.
“네. 그래서 임무가 많으면 곤란합니다. 여자가 생기면 할 게 많으니까요. 비단 이런 정원에서의 일 뿐만 아니라.”
사령관인 저도 알 만큼 정원에서 바람을 공공연하게 피는 그의 행태를 비꼬고 있었지만 왕자는 너무 놀라서 그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렉스가 던진 화두가 너무 의외였던 것이다. 그는 말을 더듬고 말았다.
“저, 저기 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