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지 보고서 (110)화 (110/163)

110화

“네?”

“아니, 잡으라고요!”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지가 팍 잡은 손을 떨쳐 냈다. 대장 기사는 당황했다. 서둘러 다시 잡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황소 쪽으로 뛰어가 버리고 말았다. 몹시 난감해진 그가 고개를 돌렸다.

“어떡하죠?”

로리엔은 절규하듯이 외쳤다.

“어떻게 하긴요! 활을 쏴서라도 잡아야죠!”

“하지만 벌써 저만큼 갔는데요. 곧 황소 떼가 덮칠 겁니다.”

질끈!

로리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에 그녀를 잡아서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렉스와 무슨 사이인 거냐고 샅샅이 심문하고 싶다. 하지만 대장 기사의 말대로 여자는 황소 떼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막지 않으면 그것들과 충돌할 예정이었다.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할까요? 기구를 타서라도 잡아 올까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는 대장 기사에게 로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비정한 눈빛. 비틀어진 입매는 평소 정 많다는 그녀답지 않게 냉혹했다.

“운이 나빠 죽는다면 어쩔 수 없죠. 차라리 잘 됐어요. 저대로 두어요.”

냉정하게 몸을 돌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럼 왕성에 지원 요청을 할게요. 더 강한 마나 기사들을 요구하겠어요.”

방금 전 일은 지워 버린 듯한 행동이었다. 알겠다며 사람들을 통제하러 떠나는 대장 기사를 바라보고는 백작이 물었다.

“대체 그녀가 누굽니까.”

“…….”

“로리엔?”

“중요한 사람 아니에요. 백작님께서 전혀 관심 가지실 필요가 없지요.”

그건 제가 판단합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왠지 날이 선 로리엔의 얼굴에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수석 연금술사와 도망친 여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여자가 사라지고도 분을 삭이지 못하는 로리엔을 보고 있노라면 남자 문제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 문제라면 사령관 밖에 없을 터.

‘설마…….’

아니겠지? 렉스 사령관하고 연관된 여자는. 백작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하려 고개를 돌렸다. 먼지구름 사이로 뛰어드는 뒷모습만 보였다. 한없이 무모하게. 어떻게 보면 한없이 용감하게도 느껴진다.

‘그러나.’

역시 무모해. 연약한 여자라는 판단이 섰기에 백작은 혀를 차고 말았다. 참된 기사도를 지닌 귀족이라면 이럴 때 응당 여자를 구해야겠지만 아쉽게도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기사도에 따라서 움직이는 명예로운 자가 아니라 실익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실리주의의 정치인. 그러니 신경을 꺼야 했다.

‘무언가 아쉽단 말이야.’

가물거리는 여자의 뒷모습에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백작은 턱을 쓰다듬고 말았다.

“하, 하…….”

수지는 정신없이 뛰었다. 금방이라도 무시무시한 하얀 빛이 따라와 등 뒤에서 폭발할 것만 같았다. 늪지가 뒤흔들렸을 때를 떠올리며 뛰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다.

‘이제 됐을까?’

얼마나 정신없이 달렸던 걸까. 숨이 턱까지 찼다. 머릿속은 물론 눈에까지 힘이 빠져 흐려질 지경. 급하게 뛴 탓에 호흡 곤란이 온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렇게 숨을 고르는데 땅이 웅-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게 아닌가. 수지는 고개를 들었다.

“아.”

위험을 피해서 달아난 곳은 늘 더 위험하다는 걸 언제쯤 깨닫게 될까. 수지는 망연자실해서 앞을 바라보았다. 황소 떼를 피할 방법이 있을까? 덩치를 부풀려서 뒤뚱뒤뚱 걷거나 위협으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가만히 서 있어 보면? 큰 짐승을 도망가게 하는 행동을 고민해 보며 머리를 굴리던 그녀는 사위를 자욱하게 메워 가는 먼지구름 사이로 누군가 비틀거리며 나타나자 놀라고 말았다.

“미, 미카엘?”

“왜…….”

그는 한 손으로 피가 흐르는 팔을 붙잡고 있었다. 얼굴의 인상이 잔뜩 일그러진 것으로 보아 상당히 깊게 다친 것 같았다. 그는 눈썹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방울이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고개를 작게 털며 말을 이었다.

“여기 계신 겁니까. 도망치셨어야죠.”

꾸짖는 목소리에 수지는 입술을 꽉 다물고 말았다. 죽이는 줄 알고 도망쳤다. 라고 말하면 이해가 될까. 저도 모르게 이쪽으로 발길이 향한 건 그들이 못 쫓아올 거라 판단해서였다. 황소 떼 때문에 저를 잡는 걸 포기할 거라고. 그리고 제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미카엘의 말대로 여기도 죽음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수지가 그렇게 나름의 항변을 속으로 이어 갈 때 미카엘이 비틀거렸다. 수지는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큭.”

간단한 접촉에도 고통스러운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수지가 굳은 걸 보았는지 미카엘이 설명했다.

“이 정도면 운이 좋은 겁니다.”

“운이 좋다고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데? 심각한 수지에게 미카엘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저보다 좀 더 폭발 중심지에 가까웠던 동료는 갈기갈기 찢어졌으니까요. 이 정도면 나름 운이 따른 편이죠.”

“…….”

“그나저나.”

미카엘은 황색 먼지구름을 몰고 오는 동물 떼를 응시했다. 웬만한 힘으로는 저지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돌진이다. 더군다나 자신은 제대로 힘을 낼 수 없는 상태. 미카엘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잠깐이라면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그 사이 저쪽, 넓은 평야를 향해 달려가세요.”

황소들 전체의 방향을 틀 순 없지만 끝부분 일부라면 마나를 일시적으로 방출해 비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수지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럼 미카엘은 언제 와요?”

“저는.”

미카엘은 짧게 웃었다.

“안 갑니다.”

“……!”

“냉정하게 저희 둘, 모두 무사할 방법은 없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살아난다면 다행인 방법만이 있을 뿐이죠. 보다시피 전 부상이 깊습니다. 제대로 뛸 수도 없는지라, 살아날 가능성이 없습니다.”

소년 기사는 그러니 당신이 도망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수지는 냉정한 계산으로 그가 자신을 살리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누구도 살릴 이유가 없는 그였다. 마나 기사인 그에게는 남을 살리고자 하는 의타심이 원래부터 없었다. 수지를 굳이 살릴 이유가 없지만 이상하게 살려야 한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왜 살려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살리고 싶어.’

‘알아서 사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이유도 댈 수 없지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거. 미카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웃었다. 제 목숨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고서도 제법 평온하게. 그는 잔잔하게 말했다.

“그러니 신호하면 달리세요.”

“미카엘.”

그러나 수지는 도망칠 평야가 아니라 황소 떼를 응시하고 있었다. 절망한 눈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고심하는 반짝이는 눈망울로.

“늪지에 사는 신비한 생명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있어요?”

“네?”

“그러니까 황금 뿔 사슴에 대해서요. 그 신성한 짐승은 때때로 맘에 드는 존재에게 특별한 능력을 넘긴다고 하네요. 동물들이 절로 따르게 되는.”

“무슨.”

의아해진 눈빛에 수지는 조금 웃었다. 겁먹은 미소였다. 하긴. 누가 그러하지 않을까. 무서운 짐승 떼를 앞에 두고선 누구라도 오금이 저리고 손발이 떨릴 것이다. 다행인 건 수지에게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며 두려움 속에서 손을 뻗을 용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힘이 연금술보다 강할까?’

제발 그러하기를. 수지는 간절히 바라며 팔을 앞으로 뻗었다. 금세라도 황소 떼가 덮칠 것처럼 당도해 있었다.

“……!”

미카엘은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수지가 팔을 들었을 때였다. 몰려오던 짐승들이 한순간에 속도를 줄이는 게 아닌가. 수지가 마나라도 뿜어낸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등에선 붉은 빛이 아니라 황금 빛이 반짝이고 있었고, 그 빛이 빛날 때마다 몰려오던 짐승들이 영향을 받은 것처럼 점점 더 느리고 순하게 변해 갔다. 수십 마리가, 이내 수백 마리가, 아니 수천 무리가 하나의 온순한 물결이 되어 뿔을 아래로 향한 채 또각또각 걷는다. 수지에게서 어떤 특별한 울림이 흘러나오는 걸 들었다는 듯이.

소년 기사는 저와 수지 주변을 둘러싼 짐승 무리를 보면서 감탄했다. 이게 대해 무슨 일이야, 하는 말이 감탄사처럼 흘러나왔다. 경악한 마나 기사와 달리 수지는 소가 돌진을 멈춰 마냥 기쁘다는 얼굴이었다.

“진짜 그런 능력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군요.”

미카엘이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대단한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에 민망해진 건 수지였다. 어쩌다 보니 생긴 능력이었다. 어떻게 보면 렉스의 오해로 아쉬운 생명이 하나 없어지면서 얻은 특수 능력인데 이런 때 긴요하게 도움이 되다니. 수지는 수줍게 말했다.

“저도 운이 좋았어요. 이 능력으로 무사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일 뿐이죠.”

“그렇습니까. 전 정말 예상 못 했습니다. 아까 여기 왜 오셨냐고 화내기까지 했는데.”

미카엘은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이었다.

“어쩌면 절 구하려고 와 주신 것도 같군요.”

그녀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다시 회복도 할 수 없을 만큼 사지가 찢겨.

“아가씨께선 제 목숨을 살리신 겁니다.”

그런데 살아남았다. 자신이 그녀를 도울 거라 예상한 것과 정반대로 그녀가 저를 살리면서. 미카엘은 이 뒤바뀐 상황에 놀란 것처럼 울긋불긋 흥분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목숨의 빚을 졌군요.”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통할지 확신하지 못했으니까. 반쯤은 도박이었다는 솔직한 고백에도 미카엘은 진지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로 예를 취했다. 왕에게나 하는 인사법이었다.

“아가씨.”

“미, 미카엘, 일어나요.”

그러다 무릎 관절 상하겠어요. 라고 말이 덧붙이려는 순간, 땅이 흔들렸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거대한 황소가 앞발을 구르며 수지를 향해 씩씩거리고 있었다. 눈이 붉게 충혈된 것이 아직도 연금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힘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는 모양입니다, 위험하니 제 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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