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그래?”
귀가 번뜩였지만 표정만은 심드렁한 렉스였다. 왠지 시시하다는 반응에 연금술사는 더 열을 내 설명하고 말았다.
“두고 봐요! 이건 시작일 뿐이니까! 결국엔 우리 제국의 강대함에 무릎을 꿇고 말 거니까! 이 기술이 성공하기만 하면 왕국은 자신들이 창조한 마나 인간들에 의해 수도가 불타는 모습을 보게 될 거예요! 제국의 찬란함과 위대함에 절망하면서!”
“굉장한 애국자셨군.”
감흥 없는 목소리로 렉스가 중얼거렸다. 비아냥거린 것이었지만 눈치채지 못한 연금술사는 턱을 치켜들 뿐이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조차 하찮다고 생각하면서 렉스는 떠보는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성공에 가까워지긴 했나? 짐승의 의식을 조종하는 것과 마나 인간의 의식을 조종하는 건 그 간극이 굉장히 클 텐데? 우리의 의식은 짐승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루기 까다로우니까.”
때문에 왕국의 연금술사도 의식을 창조해 내지 못하고 기존에 있던 것을 몸에 넣는 방식으로 마나 인간을 만들었었다. 렉스의 날카로운 지적에 연금술사는 움찔했다.
“그, 그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에 렉스는 알겠다며 코웃음을 쳤다.
“실은 근처에도 못 간 거지? 사람의 의식을 조종하긴커녕 그걸 파악하는 데도 성과가 없는 거야. 왕국처럼.”
“그, 그렇지 않아요! 거의 다 왔어요! 시간문제일 뿐이죠! 조만간 완성이 되어 왕국 전역에…….”
“완성되어 왕국에 뿌려질 거였으면 너 같은 허접한 연금술사가 관찰자로 오지 않았겠지. 넌 아마 이런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떠들 제국의 희생양이었을 거야. 우리의 신경을 일부러 그쪽으로 쏠리게 하는.”
“우, 웃기지 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래, 누구도 그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겠지. 하지만 누가 그러겠어. 누가 곧 죽어야 할 놈한테 그런 말을 해.”
“이, 잇-!”
애송이는 분노했는지 이를 꽉 물었다. 렉스는 재밌다는 입꼬리를 올렸다.
“임무를 부여받기 전에 혹시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않았나? 이 엄청난 일을 해낼 자는 자네밖에 없다고.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크다고.”
“어, 어떻게…….”
정곡을 찔렸는지 연금술사의 눈이 커다래졌다. 렉스는 빙그레 웃었다.
“다 똑같다니까. 왕국도 내게 매번 그런 말을 지껄이거든. 거지 같은 임무엔 그럴싸한 수식어를 붙이는 게 습관인 것처럼. 병사에겐 사명감을 부여해 추켜세워 주면 충실한 개가 된다는 걸 아는 거야. 아무튼, 협조해 줘서 고맙군. 제국의 노림수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네 말대로 기술이 곧 완성될 거라고 지도부에 전달하겠어.”
“어, 어째서요?”
믿지 않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왜 전달하냐는 눈빛이었다. 렉스는 짧게 미소를 머금었다.
“네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이야기해야 하나? 다만.”
렉스의 눈빛이 암담하게 빛났다.
“윗선들이 맘에 들지 않아서 그런다는 것만 알려 주지.”
“어, 어…….”
“그럼, 약속대로 괴롭히지 않고 호의를 베풀겠어.”
“네?”
의아하다는 듯이 커진 눈동자. 그 눈동자에 렉스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비쳤을 때였다. 이내 연금술사 청년의 목은 기이하게 비틀어지더니 픽 하고 옆으로 꺾여 버렸다. 한 번에,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하도록.
“…….”
렉스는 허물어지는 청년의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슴은 평온했다. 자신답지 않게 호의를 베풀었어도 그냥 그게 다일 뿐. 죽어 버린 젊은 생명을 향해 어떤 생각도 감정도 들지 않는다. 그저 고문당하다가 죽는 것보다 이렇게 죽는 게 그에겐 조금 더 나은 일이겠지 할 뿐.
‘나에게도 죽음이 최고인 날이 올까.’
예전이라면 그냥 그렇겠지 하고 넘겼을 고민이다. 하지만 이제는 저의 죽음을 떠올린 순간 가슴이 콱 막힌다. 누군가가 혼자 남을 거라고 생각하자 분노로 치가 떨린다. 주먹에 살기가 맺히고 인상이 절로 우그러지는 불쾌감.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악을 지르는 응어리들이 생긴다. 바로 미련이라는 생소한 감정이.
‘미련, 삶을 향해? 이 내가?’
본능에 박힌 파괴와 야만을 따라서 어떤 죽음에도 후회나 동정심이 일지 않도록 되어 있는데. 그건 제 죽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본능에 따른 반사적인 움직임으로 살아남으려고 하지만 그건 어떤 훌륭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나 위대한 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누군가에게 죽지 않으려고 몸이 반응해서지.
근데. 그런 것들을 모두 무시해 버리는 존재가 생겼다.
웬 여자가.
‘젠장.’
생명의, 애정 넘치는 야들야들하고 습윤한 생명체가.
‘미치겠네.’
보드랍고 온순한 그녀를 떠올리자 하체가 절로 뜨거워진다. 몸속 혈관을 따라 피가 팽팽 돌고 머릿속이 안개 낀 것처럼 음습해지는 순간. 사령관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추잡한 욕망과 기이한 미련으로 뒤덮인 그는 사다리에 올라탄 채 그녀가 있을 왕성을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렇게 렉스가 탄 기구가 수도의 성벽으로 가까워지는 동안, 마나를 뿜어내는 미카엘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마나를 맞아도 겉에 있는 황소만 쓰러질 뿐 안쪽의 소들은 멀쩡하게 서 있는 것이다.
‘뭐지?’
안력을 집중하자 무리 한가운데에 이상하게 빛나는 소가 보인다. 마나를 뿜어내기 전까지는 단순히 크다고 느꼈을 크기였는데 지금 보니 뿔도 기이하게 거대하고, 몸집도 우람하다. 무리의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소는 흰 빛을 은은하게 뿌려 대면서 마나를 저항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항? 아니야. 저건.’
반격이라고 봐야 해. 커다란 소 주변으로 뿜어낸 마나가 모여서 휘도는 것을 보면서 미카엘은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 공격을 멈춰! 저건……!”
힘을 역이용하는 연금술이야! 라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응축된 마나가 폭발했다.
‘-!’
수지는 기사들 틈에서 벌떡 몸을 세웠다. 기사들이 위험하다고 뒤로 물러나라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미카엘이 저 뭉게구름 속에 있었다. 멀리서도 피부가 따가울 만큼 폭발력이 셌기 때문에 그의 안부가 몹시도 걱정이었다.
기사들은 폭발 소리를 듣고도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마나란 게 위협적이라고 느껴졌는지, 그들은 사람들을 통제한 채로 열기와 구름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뭐, 뭐지?”
그때 기사 하나가 잦아드는 구름 사이로 그림자를 발견했다. 마나 기사들인가 싶었지만 그것은 살아남은 황소 떼였다. 마나 공격으로 인해 살아남은 황소들은 더욱 흥분 상태였다. 뿔을 앞으로 들이민 채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으악!”
“피, 피해! 마구잡이로 몰려온다!”
기사들은 하얗게 질려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수지는 그 소란 속에서 미카엘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디 다쳐서 쓰러진 걸까. 까치발을 해서 바라보았지만 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도시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여기다가 방어선을 구축해야 해!”
대장 기사가 얼른 상황을 파악해 기사들을 정렬시켰지만 구름 먼지를 몰고 오는 황소 떼는 공포 그 자체였다. 무엇이라도 밀어 버릴 것 같은 살기가 공기 중에 팽배했다. 구경 나온 귀족들은 눈치 빠르게 성문으로 달려갔고, 상인이나 여행자들도 슬금슬금 내빼고 있었다. 수지는 기사들의 지시를 따라서 뒤로 물러나다가 대장 기사가 그녀를 붙잡자 흠칫하고 말았다.
“연금술사라고 했죠? 왕성으로 연락하세요! 마나의 기사들이 더 필요하다고! 이전의 기사들은 죽어버렸으니 더 강한 자들로 보내라고! 마법의 가루 있죠?”
“아…….”
“있어요, 없어요?”
윽박지르는 소리에 왠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백마를 타고 급하게 달려오는 남녀가 있었다. 황소 떼를 피해서 인근 숲을 경유한 로리엔과 로도스 백작이었다. 그들은 대장 기사를 보면서 양손을 흔들었다.
“대장님!”
“다, 당신은……!”
“로도스 백작이오. 상황이 급하니 자세한 건 여기 수석 연금술사가 설명할 거요!”
로리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보셨죠? 방금 저 폭발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어요. 연금술로 마나를 응축시켜 폭발하게 만든 거죠. 마나 기사들이 공격하리란 걸 알고서 그 힘을 도리어 반격하는 데 쓴 겁니다! 제국에서 머리를 쓴 거죠! 이런 일이 생기면 응당 마나 기사들이 나타나 해결할 테니까. 이 때문에 우리 마나 기사들이 몇 명이나 죽은 건지, 정말 크나큰 손해가 아닐 수 없어요. 이제 해결하려면 더 강한 자들을 데려와야 하니, 그때까지만 버텨 주세요.”
“강한 자라면 특별 사령관님 말씀이십니까?”
대장 기사가 단번에 렉스를 지목했다. 로리엔은 멈칫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사령관은 현재 다른 임무 수행 중이셔서요. 바쁘셔서 어려울 겁니다. 연락도 잘 안 되는지라…….”
그를 떠올리면 절로 드는 감정, 그리움과 아쉬움, 사무치는 애정에 씁쓸해진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던 로리엔의 눈에 누군가 들어왔다. 대장 기사가 붙잡고 있는 여자가.
“렉스 사령관은…….”
저 여자가 왜 저기 있는 거야? 로리엔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머릿속이 어두워졌다. 까만 어둠을 거스르자 늪지가 나타나고 괴물 두꺼비가 등장한다. 여자는 그 뒤에 서 있었다. 횃불을 든 채로, 렉스를 살려 달라고 말하면서.
‘설마.’
렉스가 데리고 사라졌다는 여종. 그 여종이 저 여자는 아니겠지, 아닐 거야.
“로리엔?”
그럴 리 없어! 더러운 늪지의 여자일 리가!
“왜 그럽니까?”
갑자기 부들부들 떠는 그녀가 무척 이상하다고 묻는 백작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수석 연금술사의 시선 끝에 있는 여자가 보인다. 로리엔만큼이나 굳어서 무척이나 겁 먹은 여인이.
‘뭐지?’
하얗게 질린 표정 외에, 무언가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게 있다. 곱상한 외모랑 어울리는 묘한 분위기가 눈길을 끈다고 생각할 때, 로리엔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죽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