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지 보고서 (106)화 (106/163)

106화

“지금 온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제가 받을게요.”

수지가 손을 내밀자 시종은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곧 공손히 편지를 건넸다. 사령관의 숙소에 있는 사람이니 당연히 신분이 보장된 높은 사람일 거란 생각이었다. 수지는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둘러 편지를 뜯었다.

【친애하는 기사님께.

예상치 못한 일로 새와 함께 남동쪽 성벽 100 발자국 밖에서 계류 중입니다. 기다리실까 퍽 염려되어 편지를 보냅니다.】

비뚤비뚤한 글씨체였지만 어투는 무척이나 공손했다. 주인인 영주가 깍듯하게 대해야 한다고 몇 번이고 주의한 덕분이었다. 심부름꾼이 보내온 편지를 보며 수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가려는 그녀의 모습에 시종도 놀라서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망토를 챙겨 입으며 수지는 그에게 물었다.

“외출하려고 하는데, 그 사이 사령관님이 돌아오시면 말을 전해 줄래요?”

“아, 물론입니다.”

“‘볼일 보고 금방 올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라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차를 좀 빌릴 수도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마부도 준비시킬까요?”

“네!”

수지는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난을 다시 본다는 기대감으로 마음이 들뜬다. 시종은 그 분주한 모습에 곧바로 준비하겠다며 방을 빠져나갔다.

‘좋아.’

수지는 이마 아래로 망토를 깊숙이 눌러썼다. 이렇게 다니면 시선을 끌 일은 없겠지. 렉스가 말한 묘한 분위기도 차단될 거라고 생각하며 방을 나서자 건물 밖에서 시종이 마차를 불러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섯 마리의 백마가 끄는 호화스러운 마차. 수지가 놀라 움찔한 것과 달리 준비한 시종의 태도는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한 나라의 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의 애인이라면 당연히 고위 귀족일 터. 타고 다니는 마차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표정이었다.

눈 돌아갈 정도로 휘황찬란한 내부에는 각종 다과와 그를 제공하는 여종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수지는 모든 게 낯설어서 뻣뻣한 자세로 올라탔다.

“과일 드시겠어요? 남쪽 천혜의 지역에서 오늘 올라온 특상품이에요.”

시종은 천연덕스럽게 금빛 접시 위에 과일을 내밀었다. 어떤 고생도 없이 축복받은 환경에서 자란 과일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윤기가 난다는 점에서 접시와 큰 차이가 없었다. 짙은 향내가 부담스럽게 퍼져 왔다.

“고귀한 아가씨의 입맛에도 잘 맞으실 겁니다.”

어서 드셔 보란 시종에게 수지는 난감해지고 말았다. 자신은 고귀하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방에만 갇혀 있던 노예 신세였으니까.

“이 수제 쿠키가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실까요?”

이번엔 달콤한 향내가 코를 찌르는 설탕 과자를 내민다. 자꾸만 무얼 권하는 여종에게 수지는 괜찮다며 나지막하게 거절하고 말았다. 왠지 이 호화로운 공간에서는 무얼 먹어도 편할 거 같지 않았다. 가루를 흘리기라도 하면 얼른 쭈그려서 주워야 할 거 같고.

‘렉스와 있을 때가 더 편했어.’

매번 그에게 정사의 위협을 당하더라도 말이다. 수지는 자신의 생각에 놀라 멈칫하고 말았다. 이를 알았다면 렉스가 당연하지 않냐며 실쭉거리며 좋아했을 텐데. 수지는 뭐를 드릴까 눈을 빛내는 여종을 모른 척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렉스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실험실에 도착해서 마나를 보충 받고 있을지 궁금하다.

‘어서 로난을 찾아서 그를 만나러 가야지.’

혼자 나왔다는 걸 알면 몹시 놀랄 테니까. 메시지를 받더라도 왠지 가만히 방에서 기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며 수지는 붐비는 골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수도답게 시내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대로에는 마차가 오고 다닐 정도의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마저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마차가 잘 나아가지 못할 정도라서 의아함을 느끼자 눈치 빠른 여종이 고개를 내밀어 마부와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후,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남동쪽 성문 밖에 큰일이 생겼대요!”

어딘가 겁 먹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하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난폭한 황소 떼가 입성하는 도로를 막았다네요! 사람들이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완전히 길을 점령한 모양이에요!”

“황소 떼? 그런 일이 흔해요?”

여종은 자신의 말에 집중해 주는 수지가 달가워 신나게 입을 놀렸다.

“그럴 리가요! 제가 수도에서 오래 살았는데 단연코 처음 있는 일이에요! 가끔 도로를 막는 가축들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 한 두 마리 수준이지, 이렇게 수십 만 마리가 몰려온 건 처음이네요!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일까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수지는 더 말을 걸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왕성으로 돌아갈 땐 어떻게 다시 부르면 되죠?”

“그, 그거야 저희가 여기 부근에서 기다리면 되는데요, 서, 설마. 혼자 가시려는 거예요? 성벽까지요? 방금 이야기를 들으셨잖아요. 너무 위험해요!”

“꼭 가야 할 일이 있어서요.”

“그, 그럼 왕성으로 돌아가서 기사님들과 함께 와요! 전 기껏해야 번화가로 물건을 사러 오신 줄 알고…….”

이런 이야기는 못 들었다는 듯이 당황하는 여종이었다. 수지는 고개를 저었다.

“기사들을 대동할 사정이 안 되어서요. 그리고.”

수지는 사람들이 물결처럼 넘치는 도로를 바라봤다.

“사람들이 많아서 홀로 가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요.”

“어머나, 무슨 말씀을요! 아가씨 같은 분이 혼자 가면 아주 위험해요! 거리엔 사기꾼과 부랑자들이 넘쳐난다고요! 전쟁이 길어지면서 정체 모를 거지들도 많아졌고요! 혹시라도 그들에게 잡혀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 그려서요?”

그 말에 수지는 두려움과 동시에 익숙함을 느꼈다. 이곳도 늪지처럼 내딛는 발자국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되돌아갈 순 없었다. 로난을 데려가지 않고선 혼자 가지 않으리라 결심했으니까.

‘좋아, 나가자.’

수지는 용기를 내듯 두 주먹을 꽉 쥐고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조심할게요.”

“아가씨? 아가씨……!”

다급한 음성이 빠져나왔으나 문을 닫자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진다. 수지는 마차가 세워진 곳을 바라보고는 그대로 웅성거리는 인파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쪽인가?’

사람이 많아도 방향을 헷갈리진 않는다. 사람들이 모두 그쪽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도시로 가야 하는 상인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수도 밖에서 벌어진 이색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성문을 빠져나가는 게 만만치 않았다. 기사들이 진을 치고 출입을 통제하는 터라 신분이 보장된 귀족이나 왕성 관계자만이 그 문을 통과해 밖을 빠져나가는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어떡하지?’

시야 확보를 위해 수지는 망토를 목 뒤로 젖힌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개구멍이라든지, 느슨한 울타리라든지. 뭐라도 좋다는 듯이 살펴보는데 눈에 일반 기사들과 다른 갑옷을 입은 무리가 들어왔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먹물을 끼얹은 듯한 흑색 중갑. 숨이 턱 막히는 존재감이 있었다.

‘마나의 기사들…….’

수지가 저도 모르게 떨면서 움찔하던 무렵, 기사들 중 작은 체형을 가진 남자 하나가 고개를 돌리다 우연히 그녀를 알아보고 말았다.

“절 따라오세요.”

순식간에 사람들을 해치고 다가온 그. 수지는 반가운 얼굴을 보면서도 반갑다는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표정이 왠지 무서웠다. 엄격한 얼굴에 왠지 망설이자 소년 기사가 멈칫하더니 특유의 쓰린 미소를 지었다.

“겁주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여기는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 거지요.”

소년의 팔이 어디 한군데를 가리켰다.

“저쪽에 가서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잠깐이면 됩니다.”

그가 가리킨 데는 일반 병사가 입구를 막고 있는, 급하게 지어진 막사 같았다. 아마도 기사들이 잠시 머무르는 곳 같았는데. 수지는 가도 될까 망설이다가 그를 뒤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갈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향을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수지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소년 기사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지낸 거지? 무사해서 천만다행이야.’

그날, 기절하고 깨어났을 때 이미 왕성이었다. 모든 게 끝났던 터라 수지의 소식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위협이 모두 제거되었다는 말에 내심 수지의 안부가 궁금하던 찰나였다.

늪지의 여자. 사령관이 매달렸던 원주민 여자가 뭐 그리 특이하다고 그리도 마음이 쓰였던 걸까. 저도 이해를 할 순 없었으나 그래도 소식을 듣지 않고선 왠지 맘 편히 밤에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사령관이 회복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를 만나러 찾아가기도 하였다.

‘사령관님.’

친근하게 말을 걸었건만 되돌아오는 건 무감한, 무정한 눈빛 뿐이었다.

‘사령관님……?’

‘뭔데 나를 두 번이나 불러.’

불렀다는 것만으로도 목이 잘릴 거 같다. 싸늘한 살기에 미카엘은 저도 모르게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사령관은, 아니 그러니까 처음 보는 것 같은 죽음의 지휘관은 소년 기사를 쏘아보고 있었다. 어떤 감정이나 생각도 읽을 수 없는 터라서 미카엘은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의도하지 않았던 멍청한 질문이 빠져나왔다.

‘혹시 퍽퍽살…….’

‘뭐?’

‘그러니까 퍽퍽살 좋아하시는지…….’

그러자 사령관의 눈이 사나워졌다. 퍽퍽 맞고 싶냐는 눈빛에 미카엘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퍽퍽살 기억하시냐고요. 그 왜, 늪지 아가씨에겐 엉덩이 살 주고 사령관님은 퍽퍽살 드셨잖아요. 미카엘은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더 있다간 심기가 불편한 사령관에게 잔인하게 숨통이 끊길 것 같았기에 도망치듯이 물러나야 했다. 그 뒤 사령관은 왕성에서 사라졌다. 평소처럼 비밀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는 말만 무성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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