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지 보고서 (105)화 (105/163)

105화

관사에 들어와 서로를 마주한 시간은 짧았다.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내 침대 위로 수지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한 남자가 정복감에 충만한 얼굴로 수지의 옷을 벗겨 갈 찰나였다.

“이런, 젠장.”

“네?”

갑자기 욕설을 내뱉은 렉스 때문에 수지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렉스는 드러난 몸에 옷을 입혀 주면서 서둘러 대꾸했다.

“아니. 저거.”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아니나 다를까. 곧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왕자가 보낸 대신이었다. 웃는 입 모양이 칼로 그은 것처럼 반듯한 그는 음흉한 왕자가 선호할 만한 측근이었다. 그는 문밖으로 얼굴만 내민 사령관에게 다짜고짜 환영의 말을 건넸다.

“임무를 수행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나를 공급받으러 바로 실험실로 가실 줄 알았는데 관사로 먼저 오실 줄이야. 전하께서 몸은 괜찮으신지 여쭤보라 하셨습니다.”

“온 지 10분도 안 되어 충견이 달려온 걸 보면, 날 철저하게 감시 중이신 거 같은데. 몸이 괜찮은지도 모르시나?”

비꼬고 할퀴는 말에도 대신은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물어봐야 아는 것도 있으니까요.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시려는 겁니다. 사령관님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신중하게 판단하시려는 거죠.”

신중은 개뿔. 혹시라도 왕국의 병기가 이상해져서 본인에게 피해가 갈까 몸을 사리는 거겠지. 관사에는 오지 않고 그의 첩자들만 보내 실태를 파악하는 행태를 비웃으면서 렉스는 왕자의 하얀 모가지를 잡아 꺾으면 기분이 어떨까 잠깐 생각했다. 그는 곧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몸은 좋아. 마나는 바로 보충해야 할 만큼 부족하지 않지.”

“다행이군요. 그렇다면 급하게 내려온 임무를 수행하실 수 있겠어요.”

“황소 떼?”

“아, 이미 들으셨군요. 그것 때문에 기사들이 성벽으로 몰려가는 중입니다. 어마어마한 짐승 떼가 난데없이 대로를 막은지라 신민들은 물론 귀족분들까지 곤란해하고 있으니까요. 사령관님께서 그 일을 해결하러 가셔야 합니다.”

“황소 떼를 없애라고?”

“아뇨. 정확히 말하면 그 일이 생긴 원인을 제거하러 갑니다.”

렉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말이냐는 눈빛에 대신은 조금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떠들었다.

“얼마 전에 제국 내부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신비로운 힘을 개발 중이라고요. 동물들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이라고 들었습니다. 마나를 기반으로 한 의식 관련 연금술 같습니다만, 소문만 무성하고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 없는 터라 의아했었습니다. 한데 이번 일로 진위가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이 힘 개발에 성공했다는 것이요.”

“의식 관련 연금술? 동물들을 조종해서 왕국을 혼란스럽게 해 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런 의도로 추정 중입니다. 실제로 황소 떼가 대로를 막기 1시간 전에 기구를 탄 의문의 무리가 수도 근처에 정착했습니다. 무소속인 용병처럼 옷을 입긴 했지만 풍기는 분위기를 보건대 제국군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죠.”

“그들 안에 이번 일을 주도한 연금술사가 숨어 있겠군. 제국군을 죽이고 그 자를 잡아 오면 되나?”

“역시.”

수하는 예상한 것처럼 활짝 웃었다.

“혜안이 깊으십니다.”

“좋아.”

렉스는 매끈하게 말했다.

“1시간 뒤 출발하겠다.”

“네? 한 시간이요? 지금 가셔야 하는데요.”

렉스의 눈썹이 험상궂게 구겨졌다. 매우 기분 나쁘다는 표현에 대신은 저도 모르게 흠칫 물러나고 말았다.

“난 방금 임무에서 돌아왔어. 숨 돌릴 시간도 있어야지.”

여태 놀며 유유자적 달려왔건만 그는 뻔뻔하기만 했다.

“무작정 일만 시키면 된다고 생각해? 능률 없이?”

“어, 어. 그게, 그러니까 말입니다…….”

능률? 사령관이 언제 그런 걸 따졌지? 사람 죽이는 일이라면 응당 따르는 존재잖아? 무자비한 파괴자. 인정 없는 살상 무기. 그에 대한 정보를 모두 듣고 온 터라 대신은 당황하고 말았다. 이런 반응을 예상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바로 출발하라고 설득하려 했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렉스는 짜증을 내며 그를 몰아붙였다.

“자꾸 토를 달면 10시간 쉬고 갈 거야.”

“하지만…….”

“못 알아들었나?”

“…….”

“알았으면 관사에서 꺼져. 기척이 느껴지면 쉬는 기분이 영 안 나니까.”

이쯤 되자 대신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졌다. 떫은 표정으로 관사를 나온 그는 방금 전 사령관이 자신이 들은 그가 맞나 고민에 빠져야 했다.

‘분명 죽이라는 임무에서 한 번도 지체한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왜 일을 연달아 시키냐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고 있었다. 자신의 삶에 있는 게 그것뿐이냐는 듯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어서 전하께 보고드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런 그를 입구에 있던 기사 하나가 불러세웠다. 사령관에게 수상한 동행자가 있다는 것을 보고하려는 것이었다.

“저기, 렉스.”

한편 방해자가 사라져도 렉스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왕자가 금방이라도 관사로 참견쟁이들을 보낼 걸 생각하니 머릿속이 과격해진다. 왕국의 성탑이라도 부숴야 하나. 그런 그를 바꾼 것은 수지의 다소곳한 부름이었다.

“응?”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여자. 무방비하게, 하얀 어깨를 드러낸 채 저를 순진무구하게 쳐다보는 그녀를 확인하자 기분이 확 나아진다. 치밀었던 화가 눈 녹듯이 사라지며 은근하게 하체가 더워지는 기분. 렉스는 느슨한 심박과 열기에 사로잡혀서 홀린 듯이 다가갔다.

담백한 살 내음이 먼저 코를 찌른다. 제가 머무를 곳은 여기라고 알려 주는 것처럼. 렉스가 어깨에 코를 비비며 상체를 압박하자 수지는 저도 모르게 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 이 연약한 생명.

렉스는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띤 채로 내리누른 그녀의 목을 혀로 느릿하게 빨았다. 아니, 수지가 그의 얼굴을 붙잡지 않았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뭐야.”

왜 방해하냐는 오만한 눈빛에 수지는 지레 겁을 먹어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마나 보충하러 가야 하지 않아요?”

“괜찮아.”

아직은. 너랑 더 놀 거야. 렉스는 굳이 그녀의 손길을 이겨 가냘픈 목을 핥았다. 수지는 읏. 하며 신음을 터트렸다. 그의 길고 뜨거운 혀가 피부를 간질일 때마다 아찔한 기분이 커진다. 금세라도 육욕이라는 샘에 빠져 그의 아래에서 비음을 내지를 것만 같았기에 수지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노, 노는 건 나중에 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힘을 보충하는 건 지금 해야 해요. 무슨 일이 있기 전에, 힘을 보충해 놔야 안전하죠.”

“연금술사처럼 왜 그런 걸 신경 써.”

“왜냐하면…….”

당신이 늪지에 맥없이 쓰러졌던 걸 봐서. 그런 당신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 무력감이 얼마나 두려운지, 그 앞에서 절망해서. 수지는 머뭇거렸다가 말했다.

“당신의 힘이 완전해야 긴 시간을 더 행복하게 보낼 수 있으니까요.”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좀 그래서 순화된 말로 바꾸었다. 이만하면 맘이 전달됐을까. 하면서 눈치를 살피자 그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눈을 크게 뜨는 게 아닌가. 곧 그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이 이상할 정도로 음흉하게 가늘어져서는.

‘어?’

수지는 왠지 등골이 오싹해지고 말았다. 렉스가 두 손으로 그녀의 목뒤를 꽉 잡아 왔다.

“감당되겠어? 힘이 완전한 내가.”

“네?”

“매번 그만하라고 애원하더니만, 사실 그게 아니었구나? 더 해 달라는 거지? 더 깊게, 더 자극적으로, 더 빈번하게 쑤셔 달란 거야. 좋아. 네 진실한 욕망은 완벽하게 전해졌어.”

“아뇨, 저기.”

뭔가 오해하신 거 같은데. 저, 전 위험을 대비해서 힘을 보충하자는 뜻이었거든요? 힘을 꽉 채워서 행복한 정사를 더 하자가 아니라.

수지는 열심히 변명했으나 이미 달콤한 표현에 획 돌아 버린 뇌는 수용성이 떨어졌다. 듣고 싶은 말만 반복해서 청취했다. 렉스는 한 손으로 제 턱을 쓰다듬으며 참을 수 없이 즐겁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런 식의 도발, 아주 흥미로워. 요망하면서도 깜찍하지. 종종 이렇게 하라고. 응?”

“…….”

이런 때 목 좀 쓰다듬지 말아요. 소, 소름이 돋으니까……. 수지는 금방이라도 저를 덮칠 것 같은 그를 두 팔로 밀어냈다. 렉스는 순순히 밀려났지만 그래도 키스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야말로 잡아먹을 것 같은 입맞춤.

추읍, 춥, 소리가 방 가운데에서 요란하게 들려왔다. 거의 침대에 쓰러질 수준으로 깊고 진한 입맞춤을 이어 갔던 수지는 그가 떨어지자마자 아, 소리를 내면서 나른하게 뻗고 말았다. 렉스는 제 타액을 흘리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저 목구멍 안까지 제 침이 닿았을 것이다. 들끓는 눈으로 이번엔 수지의 납작한 배를 눌렀다.

“기다려. 돌아와선 이 아래를 내 정액으로 꽉 채워 줄 테니까.”

무슨 말을 못 하겠다. 수지는 얼굴이 빨갛게 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복을 차려입은 채 방을 빠져나가는 그는 완전무결하다. 흠 잡을 데 없는 철혈의 사령관이 되어 사라진 그를 보면서 수지는 작게 입을 벌렸다. 숨에서도 그의 체취가 배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렇게 느긋하게 있어도 되는 걸까.’

민망해지는 가운데 걱정도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 수지의 귀에 문이 두드려지는 소리가 났다.

“사령관님,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조용한 목소리. 허드렛일을 소리 없이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베테랑 시종이었다. 렉스가 관사를 나가면서 기사들에게 방 근처에도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한 것과 달리 어떤 주의도 듣지 못한 나이 든 시종은 자연스럽게 응답이 없는 문을 열었다. 그러다가 수지와 눈이 마주치고 깜짝 놀라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누가 계신 줄 모르고!”

“괜찮아요.”

사색이 되어 바닥에 엎드린 그를 보면서 수지는 재빨리 말했다. 엄밀히 따지면 자신은 노예였다. 어떻게 보면 시종보다 낮은 신분이었는데 그를 알리 없는 시종은 그녀가 으레 사령관의 애인쯤으로 높은 신분이라 생각해 버렸나 보다. 경직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수지의 눈길은 시종이 가져온 전서구에 닿았다.

“그거 혹시.”

수지는 전서구 겉에 써진 남쪽 항구 소속이라는 글씨에 눈이 커졌다. 인장도 영주의 성에서 보았던 것처럼 익숙했다.

“지금 온 거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