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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104)화 (104/163)

104화

렉스와 수지 일행이 그렇게 한가롭게 수도로 향하는 것과 달리 로리엔과 로도스 백작은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봉착해 있었다. 조금만 달리면 수도로 이어지는 대로에서, 흥분한 황소 떼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른 아침. 황소들은 짝짓기 철이 아닌데도 몰려다니며 몸싸움을 벌였고, 수도로 입성하려는 여행자들을 쫓아다녔다. 다친 사람도 생겨나서 한쪽에는 치료소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 탓에 수많은 사람들이 대로 중간에서 어쩌지 못하고 웅성거리자 수도에서 파병 나온 기사들이 소란을 통제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겠어요.”

“잠깐, 내가 가서 말을 하는 게 빠를 거예요.”

로도스 백작이 저지하며 나섰다. 로리엔은 그의 성향을 떠올려 잠자코 기다렸다. 사람들을 뚫고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간 로도스 백작은 곧 저를 저지하는 기사와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대장 기사의 공손한 인사를 받았다. 오래지 않아, 로도스 백작이 로리엔을 향해서 팔을 흔들었다. 이리로 오라는 신호였다.

“백작님.”

다가가자 백작이 대장 기사를 인사시켰다. 대장 기사는 그녀가 왕국의 수석 연금술사라는 것에 다소 놀란 얼굴이었다. 연금술사들은 큰 행사가 아니면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얼굴을 모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백작은 방금 자기에게 한 설명을 그녀에게 해 보라고 했다. 긴장한 듯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5시간 전부터 황소가 하나둘 모여들더니 수가 이렇게 많아졌습니다. 원인이 뭣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워낙 떼로 몰려 있다 보니 무리 해체가 쉽지 않습니다.”

“위협하면 알아서 달아나지 않을까요?”

로리엔의 말에 기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해 봤다는 얼굴이었다.

“대포를 써서 위협해 봤는데 오히려 더 흥분해서 달려들더군요. 기사들 수십 명이 다쳤습니다.”

“그럼 본보기로 오백 마리 정도 죽이면요? 무리가 저절로 흩어지지 않을까요?”

이번엔 로도스 백작이 과격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로리엔의 표정이 찡그려졌지만 기사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안 해 본 게 아닙니다. 거의 두 배 가까운 수가 죽은 건데도 저렇게 모여 있더군요. 죽이려고 하면 오히려 더 핏발이 서서 달려들고요. 숫자는 어디서 나타나는지 자꾸만 늘고 있어 무척 곤란한 상황입니다.”

“왕성에선 뭐라고 하나요?”

로리엔의 질문에 대장 기사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황소 같은 건 알아서 처리하라고요. 그래서 해체가 어렵다면 모조리 죽이는 건 어떨까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화차를 이용하면 무리 전체를 사살하는 게 가능해서요.”

“화차라. 그렇다면 이 대로를 한동안 못 쓸 텐데요. 수천 마리의 황소 시체라. 일일이 치우는데도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들 테니.”

백작의 날카로운 지적에 기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렸다.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벌써 5시간째입니다. 위에서는 일을 처리했냐고 묻고 계신지라…….”

“흠.”

백작은 꽉 막혀 있는 검은 대로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로리엔을 돌아보았다.

“마법의 가루 있으시죠?”

“아? 네.”

“사령관에게 연락이 가능하십니까?”

로리엔은 멈칫했다. 백작이 어떻게 처리하려는 건지 감이 온 것이다. 로리엔은 작은 목소리로 내키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이런 일에 사령관을 부르자고요?”

“이런 일이란 게 뭡니까. 신민들이 괴로워하는 일이 아닙니까. 사령관은 우리 왕국의 해결사이니, 이런 일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무엇보다 그 한 사람이면 쓸데없는 시간 낭비와 인력 낭비가 생기지 않을 테고요. 결과적으로 윗분들도 좋아하실 겁니다.”

로리엔은 말이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이런 사소한 일에 그를 쓰기 시작하면 계속 그렇게 불려 다닐 것만 같았다. 렉스가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무기인 만큼, 로리엔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어려운 임무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과도하게 눈을 반짝이는 백작을 보건대 지금 부름은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연락해 보겠습니다.”

로리엔이 통신을 위해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자 백작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사령관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한동안 사령관의 행방이 묘연했었다. 장기 임무를 맡았다고 하지만 마나를 위해 왕성을 필수적으로 방문해야 하는 만큼, 그를 봤다는 사람이 아예 없다는 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아 이상하게 여기던 찰나였다.

‘분명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안 보였던 거야.’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 그를 보게 되면 알게 되지 않을까. 눈치 빠른 로도스 백작은 사령관의 힘을 코앞에서 확인하게 될 거란 기대감에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황소 떼가 수천 마리 죽는 것은 그의 활약을 보는 데 치러야 하는 당연한 비용이라고 생각하면서.

“어, 렉스? 가슴께가 빛나요.”

수지는 놀란 눈으로 말했다. 렉스는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생겼나 보군.”

급한 경우가 아니면 마법 통신을 쓰지 않는다. 연락책인 로리엔이 보내왔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태평하게 대꾸했다.

“왕성이 코앞이니까 가서 연락해도 돼.”

“진짜요?”

“응. 너와 있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분명히 임무에 대해서 쫑알쫑알, 자신의 중요성에 관해서 떠벌떠벌 이야기를 늘어놓을 텐데. 귀찮다. 임무를 성공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피력하는 말도 따분하고. 평소라면 대충 한 귀로 흘리며 명을 듣고 말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수지랑 함께 하는 이 충만한 순간을 매초마다 음미하기도 바빴으니까.

‘시간이란 게 이렇게 값진 거였나.’

새삼스럽게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까웠다. 그는 부끄러워하는 수지를 약간 비딱하게 바라보았다.

“넌 내가 임무를 하러 갔으면 좋겠어?”

“아,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니라…….”

수지는 당황해서 대답했다.

“렉스가 왕국의 사령관이니까 그런 거죠. 일을 안 하면 안 될 신분 같아서.”

“나도 여자랑 놀 수 있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제가 일을 못 보내서 안달인 여자 친구가 된 기분이다. 렉스는 그런 여자 친구 때문에 속이 상한 남자 친구고. 수지는 삐진 티를 내는 그를 어떻게 달래야 할 것인가 고민했다.

뭐랄까. 그가 둘이 있는 시간을 무척이나 중요시 여긴다고 해야 할까. 물론 자신도 그랬지만 렉스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이게 너무 좋아서 누가 방해하면 물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으니까. 수지는 그가 기분 상하지 않도록 나긋나긋하게 덧붙였다.

“저도 렉스랑 늘 함께 있고 싶어요.”

그러니까 문제 생기지 않게 일은 해결해 놓자고 말할 셈이었다. 하지만 렉스의 화답이 더 재빨랐다.

“역시 그렇지?”

그는 신난다는 듯이 고삐를 꽉 쥐었다.

“나랑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을 거야.”

“아…….”

“빨리 내 관사로 가자.”

렉스는 말을 독촉했다. 입성해서 관사로 향하는 길이 이토록 즐거울 수 없다. 평소엔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지금은 둘만 있을 기대감으로 들뜨기까지 했다. 가는 길에서 투구를 쓴 기사들이 무리 지어 어딘가로 향하는 게 여러 번 목격되었으나 렉스는 저와 전혀 상관 없는 일인 것처럼 오로지 왕성만 바라보고 마차를 몰았다.

렉스의 바람과 운전 실력 덕분에 수지는 예상보다 훨씬 이르게 왕성에 입성하게 되었다. 사령관의 전용 통로를 통해 별 다른 제재 없이 들어온 그녀는 거대하고 웅장한 왕성의 위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십 개의 성탑과 지붕이 마치 별나라의 미로처럼 아름답고 견고하게 이어져 있었다. 튼튼하면서도 예술적인 형태의 건축물들을 하나씩 살피면서 수지는 새삼스럽게 다른 세계구나, 를 실감했다.

그녀가 망토 속에서 왕성을 둘러보는 동안 렉스는 홀로 돌아온 그를 보고 놀라는 기사들에게 짤막하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임무 복귀. 관사에서 휴식하겠다.”

“아, 네!”

차렷한 채로 기계적으로 대꾸하던 그들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들 중 하나가 돌아서는 그를 급히 붙잡았다.

“저, 저어, 사령관 님!”

뭐야. 쏘아보는 렉스의 눈빛이 살벌하다. 하찮은 것이 방해하지 말란 눈빛에 기사는 몸을 떨고 말았다.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말이 나왔다.

“로, 로리엔 님께서 찾으십니다! 혹시라도 도착하면 사령관 님께 전하라고 하신 터라…….”

“뭔데.”

“그, 그게 수도 성문 근처에서 일이 생겼다고…….”

“제국군인가?”

“아, 아뇨. 화, 황소 떼입니다.”

그깟 일로 나를 불러? 렉스의 눈빛이 더욱 사나워졌다. 기사는 결국 말을 하지 못하고 호흡만 들이켰다. 평소에도 무섭고 음산한 사령관이었는데. 누군가를 끼고 있는 그는 더 사악하고 살벌한 존재였다.

‘근데 누구지?’

망토를 코까지 깊게 눌러쓴 동행자는 여자처럼 보였다. 가느다란 체구에 얌전한 분위기. 사령관이 누굴 옆구리에 낀 적은 처음이라서 저도 모르게 눈길이 향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싹한 살기가 느껴졌다. 벌벌 떨며 고개를 돌린 그는 그게 사령관의 눈빛이라는 것에 혀를 깨물고 말았다.

“눈 돌리지 마. 목숨 내놓고 사는 게 아니라면.”

“예!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 일. 내가 아니어도 될 텐데? 다른 마나 기사들을 보내라고 해.”

“알겠습니다!”

기사는 우렁차게 대답하고 말았다. 사령관은 싸한 눈길을 한 번 보내고는 곧 동행자와 멀어졌다. 방향을 보건대 제 관사로 향하는 게 맞았다. 동료 기사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허망하게 말하는 게 들려왔다.

“그런데 동행자가 누군지 알려 주셔야…….”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왕성. 신분을 밝혀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물어보기엔 삶은 소중하고 인생은 길다.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기사들은 멀어지는 사령관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할 일이 생각나 허둥지둥 로리엔과 실험실에 연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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