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뭐야. 네가 그랬어?”
렉스의 기세가 싸늘해졌다. 재단사는 히끅! 침을 삼키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래도 살기가 가라앉지 않아 이대로 이대로 생을 마감하는 것일까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때, 다행히도 수지가 울상인 된 얼굴을 들었다.
“새를 놓고 왔어요. 제 친구인데!”
렉스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는 정신이 들었는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찾으러 갈래요.”
옷도 없는데 일단 급하니 천만이라도 말아 나가겠다는 태도에 렉스가 그녀를 붙잡아 침대에 앉혀야 했다. 기껏해야 짐승일 뿐인데. 잊어버리라고 했으나 수지의 눈빛이, 간절한 표정이 평소와는 다르다. 완강하게 느껴질 정도라서 렉스는 물어야 했다.
“꼭 있어야 해?”
“네.”
“그림 같은 거론 안 돼?”
그런 걸로 대체되지 않는다. 수지가 단호히 안 된다고 하자 렉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파란 새. 새장에 들어 있던 큰 새 말이지? 꽤 특이해 보였는데.”
“늪지에서 왔어요. 저를 도와주러 둥지를 떠나왔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인간으로도 변하는데, 지금은 새장에 갇혀서 그러기 어려울 거예요.”
렉스는 기억을 잃어서 그 새가 로난인지 몰랐을 것이다. 수지는 그가 로난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여 렉스를 탓하지 않았다.
하지만 렉스는 로난이 수지의 새라는 걸 알고서도 가져오지 않은 것이다. 짐승 따윈 귀찮은 짐이라고 생각해서. 지금도 그러하지만 수지가 염려하니 무시하기 어려웠다. 찾지 말라고 하면 더욱 신경 쓸 것을 알았기에 그는 결국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구하러 갈 필요 없어. 희귀한 새니 영주가 보관하고 있을 거야. 전서구로 새를 바로 왕성으로 보내라고 하면 돼. 그럼 고생 없이 만날 수 있지.”
“직접 찾으러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혹시라도 오는 도중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박제해 버리려고 했던 솔리나를 떠올려 말했지만 렉스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영주의 물건을 운반하는 자는 그렇게 바보가 아니야. 귀족들의 물건을 건드리면 자손까지 처벌받는다는 걸 알지.”
“하지만…….”
“걱정 마.”
여전히 안도가 안 된다는 얼굴을 보면서 렉스는 뻣뻣해진 목덜미를 풀어 주려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어루만졌다.
“네 새를 찾아 줄게.”
“으음…….”
“아무 일 없을 거야.”
“정말요?”
“그럼. 그러니까 새 생각은 마.”
내 생각만으로 벅차잖아? 렉스는 그렇게 덧붙이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잘 될 거야.”
멍하니 그 말을 듣고 있던 수지가 잠시 후 인상을 왈칵 구겼다.
“왜?”
렉스가 당황하여 묻자 얕은 한숨이 들려왔다.
“잘 될 거란 말에 안도하는 제가 한심해서요.”
“한심하지 않아.”
그 말에 수지는 쓰리게 웃었다.
“하지만 그런걸요. 로난을 잃어버렸는데 기억도 못 했고, 지금도 렉스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잖아요. 음. 로난이 다치지 않게 부탁한다고 돈이라도 꿔서 보내면 어떨까요.”
제발 무사히 데려와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다. 불안해하던 수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제가 직접 갈래요.”
“안 돼.”
“렉스는 먼저 수도로 가요. 저도 로난을 찾은 뒤 바로 뒤따라갈게요.”
렉스는 나가려는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수지의 눈이 크게 뜨인 것이 보였다. 그딴 새는 잊으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지만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꾸역꾸역 억눌렀다. 억지로 요구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정 불안하면 안전하게 배달해 주면 사례금을 주겠다고 영주에게 말해 놓을게.”
“그래도 제가…….”
“네가 가면 그날 있었던 일을 조사받게 될 거야.”
“!”
그날이란 말에 수지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지금 주인이 없어진 노예 신세였다. 자칫하면 다시 누군가의 소유물로 취급당할지도 몰랐다. 굳은 얼굴의 그녀를 보면서 렉스는 이거구나, 싶었다.
“운이 나쁘면 그 즉시 감옥에 갇힐 수도 있어.”
“아.”
“그러니 전서구가 나아. 길도 엇갈리지 않고 빨리 만나게 될 테니까.”
“……네에.”
새 따위가 수지의 마음을 이렇게 가져갔다니. 짜증이 마구마구 일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지금은 상냥하게 수지를 위로할 때였다.
“로난이라고 했지? 안전하게 만나게 해 줄 테니까 나를 믿어 줘.”
“…….”
“아님, 날 믿을 수 없다는 건가?”
“그, 그럴 리가요. 렉스가 아니면 제가 누굴 믿겠어요…….”
수지의 목소리에 어렸던 긴장감이 마침내 사라졌다. 그의 치밀하고 꼼꼼한 회유에는 못 당하겠다는 듯이. 곁에 있던 재단사마저 수지에게 속살거리던 렉스의 표정과 분위기에 넋이 나가 멍한 얼굴을 했다. 아까 노려볼 때는 지옥에서 온 괴물 사냥개 같았는데. 수지를 설득할 때는 하늘에서 나타난 천상의 요정 왕으로 보였다. 어쩜 저렇게 근사하게 생겨 말도 잘할까. 이 근방에서 보기 힘든 외모랑 태도가 완벽한 젊은이였다.
‘이 방에 머문다는 건 재력도 대단하다는 건데.’
왕성으로 가는 걸 보면 혹시 왕족은 아니겠지……. 호기심이 생겨 곁눈질로 보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을 날렸다. 재단사는 흠칫해서 빠르게 비단을 챙겼다.
“그럼 다시 오겠습니다!”
정확히 2시간 후, 그녀는 수지에게 딱 맞는 여행자 옷을 가지고 돌아왔다. 겉에 걸칠 얇은 망토까지 챙겨 오자 렉스는 그녀에게 넉넉한 금화를 주었다. 재단사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볼리탄에 오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장갑과 양말까지 손수 제작합니다! 두 번 이용해 주신 분들께는 특제 양산까지 선물해 드리는데 무늬까지 신경 써서 수를 놓는 터라 많은 귀족분들이 만족……”
“나가.”
렉스는 차갑게 대꾸하며 그녀를 내쫓았다. 하여간. 돈 좀 있어 보이면 사족이 많이 붙는다. 왕성의 귀족들이든 도시의 상인들이든 그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돌아보는데 수지가 하늘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재단사가 보는 눈이 제법 있군.’
하늘빛은 수지에게 맞춘 듯이 잘 어울렸다. 흰색 레이스가 가슴께에 들어간 원피스는 청초한 그녀의 분위기를 한층 더 아련하게 만들었다. 어딘가 아찔하면서 여리여리한 분위기가 물씬 나자 자연스레 바지 아래가 단단해졌다. 렉스는 인상을 쓰고 말았다.
한편 그녀는 모처럼 입은 좋은 옷이 어색한지 팔을 들어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 탓에 가늘고 흰 팔목이 나타나자 렉스는 입을 열고 말았다.
“망토 입어.”
“네?”
“망토까지 잘 챙겨 입으라고.”
움찔한 수지를 대신해 손수 망토를 어깨 주변으로 둘러 주고 끈까지 묶어 주었다. 수지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넌 다른 세계에서 왔어. 알게 모르게 묘한 분위기가 흘러.”
“아, 그래서 잘 가리라는 거군요.”
이해했다는 듯이 수지는 망토 모자를 이마까지 쑥 내려 썼다. 그녀의 얼굴이 가려지자 렉스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찡그리고 말았다.
“나랑 있을 땐 말고.”
그는 얼른 모자를 벗기며 손을 뻗었다. 그렇게 한 손은 그녀의 목을, 한 손은 그녀의 턱을 감싼 그는, 어딘가 부끄러워하는 수지에게 나른하면서도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랑 있을 땐 다 보여 줘야 해. 서로의 시야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우리 사이에 있는 건 용납할 수 없으니까.”
오, 옷은요? 당연히 시야를 가릴 수밖에 없는데 그것도 입으면 안 된다는 건가요? 수지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렉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색해하든 낯설어하든 자신이 바라는 건 명확하다. 바로 그녀의 일체. 수지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것. 렉스는 ‘어쨌든.’ 이라며 말을 이었다.
“이게 잘 벗겨지나 걱정이야. 확인해 볼까?”
“굳이 그런 걸 확인할 필요가…….”
“미리 알아야 해. 밖에서 잘못 벗다가 찢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네? 그런 일이 생긴다고요?”
렉스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눈빛은 꿍꿍이가 가득했지만.
“자주 생기겠지. 같이 붙어 있다 보면 별일이 다 있으니까.”
“아…….”
변명하는 눈길이 어딘가 궁색하면서 음흉했다. 만난 이후로 그의 욕망이 전혀 제어되지 않는 기분이다. 억눌러 놓은 게 터진 것처럼 정사에 열을 내는 그를 보면서 수지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기억을 잃은 부작용일 거야.’
가만히 떠올려 보면 늪지에서도 틈만 나면 유혹적인 시선을 던진 그였지만 지금의 렉스가 더 과격하고 저돌적이라고 느껴졌다. 기억이 없는 채로도 자신을 향해 기회의 눈을 번뜩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싫은 건 아니지만 힘드니까…… 방심하지 말아야지.’
이미 몸을 다 주어 놓고 의미 없는 방어에 불과했지만 어딘가 오싹했던 수지는 망토의 옷깃을 꽉 쥐었다. 나른한 듯 유혹적으로 뻗어 오는 시선이 만만치 않았다. 저도 모르게 먼저 망토의 끈을 풀고 그의 품으로 기울어질까 겁난다. 힘과 함께 매력 수치도 올라간 게 틀림없어. 수지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전서구!”
목 뒤로 손가락을 간질이던 렉스가 멈칫했다.
“보내러 가요, 수도로 빨리 향하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