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다, 다행이네요.”
저게 어디가 전쟁 사령관이야. 미모로 사람을 홀리는 남자 귀신이지! 수지는 냄비를 쥔 채로 살짝 뒤로 물러났다. 렉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근데 왜 도망가?”
그게 말이죠, 다가오면 올수록 설레어 죽을 것만 같거든요! 수지는 집요하게 답을 원하는 시선을 피해 냄비를 끌어안았다.
“서, 설거지하려고요.”
“내가 할게.”
“괜찮아요!”
수지는 잽싸게 말하고는 얼른 식수를 얻는 근처 연못으로 달렸다. 차가운 연못의 수면을 보자 그제야 경주하듯 뛰던 심박이 진정된다. 수지는 한참 후에야 빨개진 얼굴에 한 손을 올릴 수 있었다. 아직도 열이 있었다.
‘정말.’
남 보여 주기 민망한 얼굴이야. 수지는 잘 달아오르는 저를 보며 미약하게 웃었다. 늪지에서 뭍으로 끝내 그를 찾아오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렇게 그의 미소 하나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뛴다고 겉으로 드러내면 어쩌란 말인가. 기억을 잃은 그는 이제야 저를 곁에 두어야 할 존재라고 인식했는데. 몸을 섞는 걸 그가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그가 이런 저를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되었다.
수지는 차가운 호수 수면에 손바닥을 대었다. 찬물이 차분하게 일렁거린다. 그 섬세함이 뜨거워진 가슴을 진정시켰다. 수지는 잦아드는 심박을 느끼면서 중얼거렸다.
“그에게 더 반하지만 말자. 안 그럼 곤란해질 테니까.”
“곤란할 게 뭐 있어.”
무심코 한 혼잣말에 응답한 이가 있었다. 수지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샌가 렉스가 연못 옆 굵은 나무 기둥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큰둥한 눈빛, 어딘가 뾰로통한 표정은 썩 기분이 좋지 못하고 있음을 알린다. 렉스는 미간을 구긴 채로 말했다.
“네가 날 좋아하는 건 바로 눈치챘어. 몽롱한 의식에서도 날 보자마자 고백했으니까. 그만큼 날 좋아하는데 왜 그 마음을 억제하려 들지?”
수지는 머뭇거리다가 솔직히 답했다.
“그, 그게 누굴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게 처음이라서. 조심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조심?”
렉스의 안색이 구겨졌다. 그는 감정을 조심스럽게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어디까지나 우러나오는 생각일 뿐이니까. 그냥 표출해도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걸 조심하려는 수지가 이해되지 않아 렉스가 따져 묻고 말았다.
“왜 조심해야 되는데?”
“그게…….”
수지는 다시 망설였다.
“당신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고, 또…….”
말해야겠지?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백했다.
“좋아했던 사람이 또 사라지면 어쩌나 싶어…….”
‘아. 그 래연인가 뭔가.’
렉스는 수지가 누굴 떠올렸는지 알아차렸다. 수지는 멈칫한 그를 보면서 얼른 덧붙였다.
“무, 물론 렉스는 강하다는 거 아는데 그래도 헤어졌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조심하게 되는 거 같아요. 갑자기 헤어지면 너무 두려울 거 같아서…….”
이런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건 아닌가 싶다. 렉스에게 깊이 빠졌다가 힘들어질 걸 대비해 이렇게 방어적인 태도로 그를 좋아하려 들다니. 수지는 움츠러든 자세로 말했다.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올까 봐 무서워요…….”
그를 구할 수도 살릴 수도 없는 상태. 그때는 그를 구할 다른 사람도 없으리라. 그런 완벽한 절망을 상상하며 두 눈을 꾹 내리감았다. 렉스는 그런 수지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뭔가 착각하고 있었다. 평온한 목소리로 그는 그 말을 하나씩 반박해 나갔다.
“우선 부담되지 않아. 불편했으면 널 구하는 일조차 없었겠지. 나는 네게 호기심을 느껴. 네가 뭔 짓을 해도 함께 있고 싶을 정도로. 그러니 앞으론 억제 말고 네 마음을 다 표현해 줘.”
그녀가 완전히 넋이 나가 있으면 좋겠다. 자신만 생각하고 자신만을 걱정하고 자신에게만 애탈 정도로 완전히 중독 수준으로.
‘그래서 그 래연인가 뭔가도 완전히 잊어버렸으면.’
렉스는 교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바로잡을 것이 더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헤어진다는 건, 우리의 의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의지로 일어나는 일을 말하는 거지?”
“네.”
가냘픈 목덜미. 고개를 수그리는 그녀는 미래의 고난을 생각하며 겁에 질린 모양이었다.
‘가여워라.’
어떤 것에도 연민을 느끼지 못하도록 설계된 전쟁 사령관은 유일하게 이세계 여인의 불안에 안쓰러움을 느끼면서 하얀 목을 거머쥐었다. 사람을 죽이곤 하던 손길은 그 여느 때보다 온순해져 있었다. 연약한 꽃의 덜미를 쥔 것처럼 수지의 목을 부드럽게 감싼 그는 그 가냘픈 살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네가 그런 걸 걱정할 줄 몰랐어.”
목덜미를 만지는 손이 뜨겁다. 수지는 왠지 나른해져 눈이 반쯤 감기고 말았다. 나긋나긋한 손길이 피부를 파고들어 정신마저 홀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네 불안이 없어질까. 내가 그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걸 증명하면 될까?”
“이미 증명했어요. 으음, 더 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너는 아직 불안하잖아. 내가 가까이 가면 물러날 정도로 경계하고. 앞으로 계속 함께해야 하는데. 이런 식이면 곤란해.”
수지의 태도가 불쾌했다는 어조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사과하고 말았다.
“미, 미안해요, 앞으론 좀 더 편하게……. 아음, 당신에게 표현할게요……. 으응…….”
착각인가. 손길이 점점 야해져. 긴 손가락이 목 주변의 살들을 배회한다. 애무당하는 느낌에 수지의 얼굴은 다시금 빨갛게 물들어 갔다.
“약속한 거지?”
그는 확인하듯 재차 물어 왔다. 어제도 약속을 하나 했었는데. 그는 약속을 참 좋아하는구나. 수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운 듯 사악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좋아, 그럼 몸으로 증명해 줘.”
“네?”
“날 편하게 생각하는지. 네 몸으로 표현해 달라고.”
말로 표현하는 건 안 돼요? 열락에 흐려진 눈빛의 수지는 렉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영리하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아응-!”
볼리탄의 유명한 여관. 돈 있는 귀족들이 선호한다는 거대 여관의 꼭대기 층에는 한쪽 벽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넓은 평수의 방이 있다. 금으로 장식된 석상, 비단으로 휘감긴 탁자, 온갖 탐스러운 과일이 놓인 대리석 탁자, 고급 우단으로 장식된 침대가 수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귀족들의 감탄도 자아낼 만큼 화려했지만 방에 있는 두 남녀는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아흐읏!”
남자의 손이 예민하게 부푼 유두를 꼬집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 흐으읏-!”
여자는 데인 것처럼 연신 소리를 질렀다. 이미 긴 애무로 녹아든 젖꼭지는 집요하게 건드리는 남자의 손길에 눈에 띌 정도로 길쭉하게 늘어나 있었다.
“아, 아아읏!”
남자는 흐느끼는 여자를 보면서도 자극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크진 않아도 치밀한 유방과 늘어난 유두를 번갈아 가면서 만지면 기분이 좋은 것은 물론이오, 여자의 신음도 확연히 키우는 일거양득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래를 쑤시면서 동시에 만져 주니까 미칠 것 같지?”
남자가 고약한 질문을 던지며 허리를 튕겼다. 대답은 없었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햇빛을 달궈서 뇌를 녹여 버린 느낌이었다. 온 세상이 번쩍번쩍하고 새하얗게 변해서 정신을 흔드는데, 가슴과 아랫배는 용광로에 잡혀서 뜨거운 몽둥이로 불 고문을 당하고 있는 기분. 여자는 그야말로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잔뜩 헝클인 채, 살아남으려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서 말해 봐.”
하지만 남자가 그런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기어이 대답을 듣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녀가 반응하는 내벽 한 곳을 일부러 더 눌러 찌르자 입술이 헉 하면서 벌어졌다. 남자는 마치 성난 짐승처럼 그 안쪽을 마구잡이로 눌렀다.
“어서.”
“아, 아, 아아……!”
“말해.”
“조, 좋아……!”
마침내 여자가 흐느끼듯 말을 토해 냈다.
“어떻게 좋은지 상세히 표현해야지.”
‘너, 너무해…….’
여자, 아니 볼리탄에 도착해 여관 침대에서 3시간 째 벗어나지 못한 수지가 울먹였다. 눈물이 발갛게 물든 볼로 하염없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오랜 정사로 배어 나온 땀이 가슴과 배를 굴러 그의 몸까지 미끄럽게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다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갖은 체액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엉덩이를 좋다는 듯이 꽉 움켜쥔 채로 기대 어린 눈빛을 짓고 있을 뿐.
결국 수지가 졌다는 듯이 입술을 열었다. 상세히 말하라고? 훌쩍거리던 그녀는 느낌을 성실하게 전달하기로 했다. 그가 들으면 만족해서 이제 그만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 당신의 단단한 음경이 자궁의 깊은 데를 쑤시면서, 빨린 유두도 함께 만져지니까,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래가 조여져요. 이러다가 요의가 오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황홀하게요……!”
“……!”
뜻밖의 굉장한 표현력이었다. 기껏해야 당신의 것이 쑤시니까 좋다! 라고 할 줄 알았는데! 렉스는 저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 하……!”
전율이 신경을 타고 모든 쾌감을 깨우며 전신을 돈다. 아래까지 더 불끈해질 정도로 꼴리는 설명이었다. 그는 찢어질 듯한 미소를 지은 채로 그녀의 골반을 꽉 잡았다.
“아읏!”
“아주 잘했어. 하면 되잖아. 상으로 더 찔러 줄게.”
“아, 자, 잠깐! 아읏, 그, 그게 아니라……. 흐아앗……!”
말릴 새도 없이 열정적인 삽입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수지의 상체가 맥없이 흔들렸다. 출렁이는 가슴이 코앞에서 음탕하게 흔들릴 때마다 렉스는 진한 쾌감을 느꼈다. 수지가 찡그린 듯 아찔한 표정을 짓는 건 더한 짜릿함이었다. 제국군 수백만 명을 죽여도 이렇게 만족스럽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렉스는 수지가 절정에 다다르는 걸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