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아, 아뇨. 바, 바로 그런 건 아니고……. 그러니까 서로를 알아가고 나서요. 늪지에서 고생을 함께 하다 보니 친해졌어요. 중간에 왕성에서 기사들도 왔고요. 늪지에 사는 사람들도 만나면서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으니까요.”
“왕성에서 기사들이 온 건 나 때문에?”
“네. 렉스가 돌아가지 않고 제 곁에 머물러서 왕궁 사람들이 찾았다고 들었어요.”
얼마나 여자가 맘에 들었으면 임무를 내팽개치고 곁에 머물렀을까. 그런 면에서 과거의 자신은 병기로서는 빵점이었나 보다. 동시에 지금의 심정이 지극히 납득이 가고 만다. 그런 과거가 있었다면 몸과 의식은 본능적으로 과거의 저를 따라가려고 할 것이다. 렉스는 이해가 간다는 듯이 수지에게 꼼꼼히 따져 물었다.
“어떤 기사들이 왔지?”
“마나의 기사들…….”
무심코 답변한 수지는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았던 한 소년을 떠올렸다. 미카엘, 그는 잘 지내고 있을까. 어리지만 듬직했던 소년 기사를 떠올리며 수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근데 모두 나쁜 사람만은 아니었어요. 저를 도와주었던 어린, 마나의 기사도 있었고요. 하지만 나중에 등장한 왕자의 기사는 정말 무서웠어요. 저와 렉스를 서슴없이 죽이려고 했고요.”
“왕자의 기사?”
“네, 이름은 노만이었고 가문은 밴댕이인지…… 자,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그랬어요.”
“흠.”
노만 밴댕이. 어디서 거지 같은 걸로 잘도 작명된 가문이라 생각하면서 렉스는 골몰했다. 마나의 기사들이 저를 찾으러 왔다는 건 놀랍지 않다. 저라도 같은 마나의 기사를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왕자가 따로 수하 기사를 보냈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을 찾기 위한 게 아니었으리라. 그는 의심 많은 정치가였다. 자신이 눈을 떴을 때 무작정 기뻐했던 로리엔과 달리 그의 눈빛은 창조물인 렉스가 말을 잘 들을까 걱정하는 낌새가 역력했다. 그렇게 불안과 의심이 강한 자라면 임무를 부여한 자신이 혹시라도 중간에 딴짓을 하지 않을까 수하 기사를 보내 확인하려 들었을 것이다.
‘근데 늪지에서 수지를 죽이려고 했다는 건.’
사령관을 부리는 데 그녀가 방해물로 보였다는 의미? 이는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또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 결론에 다다르자 그의 몸에선 진한 마나가 피어올랐다. 벌겋게 피부가 달아올라 극심한 열이 뿜어지자 옆에 있던 수지의 안색은 당연히 하얗게 변했다.
“레, 렉스…….”
숨이 막혀서 더듬거리자 그가 얼른 반응했다.
“미안, 나도 모르게.”
힘을 거두자 그제야 살 것 같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눈빛도 낯빛도 평소보다 훨씬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수지는 묻고 말았다.
“왜 그래요?”
“아니, 왕자 새끼를 어떻게 족쳐야 하나 고민이 되어서.”
바, 바로 죽여야 한다고 결론이 난 건가? 렉스는 당연하지 않냐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파괴적인 미소였다.
“위협은 제거해야 해.”
“하지만 왕자잖아요. 렉스에게 마나를 공급하는 사람들의 상관일 텐데. 그런 자를 다치게 하면 당신이 곤란해지지 않을까요?”
신중하게 되짚는 모양새가 전쟁에서 전술을 맡는 책략가 같다. 오히려 무작정 왕자의 모가지를 따 버려야겠다 생각하는 제가 더 일개 용병 같았다. 전략이나 전술을 따져 상대를 공격해야 하는 건 전쟁 사령관인 저이건만. 수지가 더 노련하게 이번 일에 대처하고 있다.
‘마냥 순진한 여자는 아닐 거라고 느꼈는데.’
그런 여자여도 상관 없었지만 저를 위해 이렇게 현명하게 행동의 인과를 고려해 주는 모습은 또 너무나도 좋았다. 가슴이 간지러울 정도로.
“당신을 위해서라도 함부로 죽여선 안 돼요.”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 침착하게 말을 쏟아 내는 저 입술을 짐승처럼 핥고 싶어진다.
“우선은요. 당신에게 필요한 마나 공급이란 것을 완벽하게 보장받고서 움직여야 해요. 왕성에 가는 대로 기억을 되찾고, 아니, 왜 기억을 잃게 만들었는지부터 알아보는 게 순서겠죠. 또 그런 일을 당하기 전에.”
수지는 제 목을 은근하게 주무르는 렉스를 힐끔거렸다. 엄청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눈빛이 왜 저리 능글맞아졌을까. 금방이라도 단단한 손가락이 옷 속으로 미끄러질 것 같다. 저도 모르게 옷깃을 추스르는데, 렉스가 그게 맘에 안 든다는 어조로 말해 왔다.
“그건 뻔해.”
수지의 감은 생각보다 발달했나 보다. 어느새 단단하게 옷을 붙든 그녀를 보면서 렉스는 입맛을 다시며 손을 떼었다.
“내가 불복종해서야. 그들의 개처럼 굴지 않아서지.”
“아.”
“내가 순종하길 바라면서 기억을 없앴겠지. 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나는 귀환도 하지 않은 채로 같은 마나 기사들과 싸우면서 늪지에 머물렀으니까. 아마 몹시 짜증이 나고 초조했을 거야. 윗선들은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여 만든 무기가 제 손을 떠난 게 아닐까 불안에 떨었겠지.”
왕자가 왜 수하 기사들을 보냈겠는가. 그만큼 렉스와 그 주변 환경을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렉스는 왕성의 고위 관계자들의 속셈이 빤히 보인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수했어. 널 죽이려고 했으니까. 알다시피 난 원래 말 잘 듣는 개가 아니었거든? 딱히 들을 이유가 없어서 온순했던 것뿐인데. 유일하게 맘에 든 너를 죽이려고 했네? 내 머리가 확 돌았을 거야. 어떻게 아냐고? 어제 기사가 널 손대는 모습을 보자 내가 그랬거든. 기사의 뼈를 모조리 분질러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을 분노가 치밀었지.”
그때 일을 상기하자 벌써 손가락에는 붉은 빛이 감돈다. 기사의 살과 근육을 조각내고 싶어서, 가장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고 싶어서 힘이 용솟음쳤다. 렉스는 제 안에 깃들어 있는 폭력성을 넘은 야만성을 느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날 자극했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그들도 알 필요가 있어. 왕정 사령관인 내가 나라를 모두 잿빛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
“무섭나?”
렉스는 멈칫하여 물었다. 어느새 수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제 발언에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놀라게 할 의도는 아니었는데. 수지가 겁을 먹어 뒤로 물러나기라도 하면 어쩌나 초조한 심정으로 렉스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만에 하나 그녀가 두려웠다고 한다면 제 본성과 힘을 어떻게 감춰야 하나 걱정하면서. 다행히 수지는 그런 게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당신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말했었어요. 스스로가 글러 먹은 존재라고 했었거든요.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다고. 그러니까 무섭지 않아요. 잿빛 이야기는 좀 과격하다고 생각하지만.”
수지는 말을 멈췄다. 어떻게 기분이 상하지 않게 말을 전달할 수 있을까. 전쟁을 위해 태어났다는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사랑이 아닌 필요에 의해서만 사람들이 그를 찾았고 이용했다는 것을 깨닫자 그녀의 마음까지도 몹시도 황량해졌기 때문에, 저라도 그를 감싸 주고 싶었던 것이다.
“당신 입장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수지는 조심스럽게 제 진심을 전했다.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함께하고 싶어요.”
조용한 목소리에는 따뜻한 울림이 있었다. 가슴을 울리고 심장을 깨우는 신비로운 힘처럼.
“왕국을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면 그것도 좋고요. 왕국을 용서해도 상관없어요. 모든 게 보기 싫어 멀리 떠나기로 했다고 해도 좋고요. 심지어.”
그녀는 그를 바꿔 놓는다. 렉스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달아오르는 마음을 느꼈다. 한편 수지는 그의 차가운 눈동자에 담긴 저를 발견했다. 저토록 무심한 남자를 어떻게 이렇게 마음 깊이 아끼게 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순 없었으나 늪지에 살면서 늪지의 이치가 당연하다고 생각해 버린 것처럼 자신의 인생에 저런 렉스가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버린 게 아닌가 싶다. 수지는 수줍은 마음을 담아 조심스럽게 말했다.
“늪지에서 다시 살고 싶다면, 음, 따라가겠어요.”
렉스의 숨소리가 커졌다. 흡사 암컷의 고백에 흥분한 육식성 거대 몬스터를 보는 듯했다. 어깨마저 들썩거리며 제 흥분을 고스란히 드러낸 그는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큰둥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런 고백, 다른 이에게도 한 적 있는 건 아니겠지?”
도리도리. 떠보는 어조에 수지가 천천히 고개를 젓자 몹시 흡족한 것처럼 눈가가 휘어졌다. 너무나도 신이 난 나머지 심장이 살아나 팔딱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다. 렉스는 극한으로 흥분했지만 억지로 침착하려 애쓰며 꼼꼼하게 따져 물었다.
“난 말로만 거창한 건 질색이야. 끝을 볼 각오가 아니면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선 안된다고 생각해. 네 생각은 어때?”
“함부로 말한 거 아닌데요…….”
“그래? 그럼 약속하는 거지? 네 모든 걸 걸고.”
“네? 그, 그렇죠.”
언제 이렇게 비장한 분위기가 되었지. 그저 힘들었을 그를 위로하고 싶었을 뿐인데. 지금 상황은 손끝에 피를 내서 제가 한 말을 혈서로 남겨 쿠데타라도 해야 할 분위기였다. 얼떨결에 수긍하는 수지를 보면서 렉스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눈을 했다. 그러면서도 고심한 듯이 턱을 한 손으로 쓸기 시작했다.
“네가 그렇게 다짐했으니, 앞으론 무얼 하든 너와 함께 할 걸 생각해야겠군. 신경 쓸 게 많아. 왕성에 가든, 전장에 가든, 여관에 가든. 심지어 야영을 하면서도 우리가 함께 살 생각을 해야 하니까. 침대는 큰 걸로 고려해야겠군. 먹을 것도 풍족해야 해. 하던 도중에 힘이 없어 골골거리는 건 안 될 말이니까. 그리고 다양한 체위를 위해선 근처에 사람이 없는 것도 필수야. 아까 늪지라고 했나? 나쁘지 않군. 널 쳐다보는 인간들이 없을 테니까. 네 신음도 오로지 나만 들어야 해. 딴 놈들이 네 목소리나 눈빛으로 흥분하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야.”
“…….”
수지가 얼이 빠져 그를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왜 그런 쪽으로 흘러가지? 함께한다는 말이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내며 살아간다로 해석되었나 보다. 수지가 흐린 눈으로 쳐다보는 동안 렉스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술을 씰룩이며 중얼거렸다.
“이왕이면 경치 좋은 장소에 저택을 짓는 것도 좋겠군. 너와 내가 알몸으로 살아가도 문제 없을 만큼 보안이 철저한 곳으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