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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90)화 (90/163)

90화

밤에 부는 바람 같은 그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 바갈은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누군가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저렇게 존재감이 확실한 남자인데, 어째서 기를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일까. 그것은 그가 소리 나지 않게 존재하는 데 특화되었다는 의미였다. 바갈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의 검을 움켜쥐었다.

“뭐야, 넌.”

“구경꾼.”

“구, 구경꾼? 그럼 얌전히 구경이나 하다 갈 것이지 뭔 참견이야!”

바갈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는 다른 이는 없는지, 그에게 위협이 될 만한 건 없는지 빠르게 눈을 굴렸다.

다행히도 상대는 혼자였고 무기도 평범해 보이는 철검 하나만 갖고 있었다. 그마저도 바닥에 떨어져 있던 터라서 바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접근하면 그의 심장을 기습적으로 찌르면 될 터였다. 근접 전투에선 누구보다 강하다고 자부하던 바갈은 남자를 상대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더는 구경만 하기 싫거든.”

남자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바갈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저 선 것만으로도 그런 두려움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상대방의 기세는 고요했지만 마치 파도를 마주한 것처럼 광대했다. 온몸의 털이 공포로 비쭉 서며 저도 모르게 근육과 뼈가 긴장하게 만드는 살기. 바갈은 저도 모르게 살짝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어, 어디서부터 본 거지?”

그가 방금 온 거라면 어떻게든 속여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갈은 쓰러진 수하들을 슬쩍 보고는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저들을 깨워서 합동해 저 녀석을 해치울 수 있지 않을까 계산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전부 봤어. 생각보다 흥미롭더군.”

남자는 살짝 웃었다.

“물론 여자 쪽이 말이야. 너는 세상에 흔한 나쁜 놈 중에 하나니 흥미로울 게 없었고. 오히려 지루했지.”

“뭐, 뭐어?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넌 감히 상상도 못 할 인물일걸!”

바갈은 기분이 나빠 소리쳤다. 그러자 남자가 담담하게 물어봤다.

“그래? 누군데?”

“너한테 내 정체를 순순히 밝힐 거 같나? 난 바보가 아니야! 다만 이것만 알아 둬! 너 따위는 감히 접근도 못 할 만큼 많은 사람을 죽여 봤다는 것을! 내 이름만 들으면 오줌을 지리는 전사들이 있다는 걸 말이야!”

“그래? 그건 나랑 비슷하군.”

남자는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얼핏 들으면 사교성이 좋은 인물 같았다. 하나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은 차갑게 빛날 뿐이었다. 마치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나도 내 이름만 들으면 몸을 떠는 기사단장들이 있지. 근데 유명하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야. 오히려 귀찮아지지. 내가 무섭다고 숨거나 내가 위험하다고 죽이려 들거나. 반응이 이렇게 두 가지로 갈리거든. 둘 다 상대하기가 귀찮아. 알아서 덤빈다는 면에선 그래도 후자가 좀 더 상대하기 수월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유명인이라는 건 늘 그 후광을 고려해야 해. 장단점이 있지.”

유명인이라서 장단점이 있다고? 기사단장들이 몸을 떠는 자라고? 바갈은 그가 흘린 말에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상당히 자아가 비대한 자 같았다. 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더 떠들면 그가 누군지도 알 수 있을 텐데, 남자는 이런 대화마저 물렸는지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여자의 얼굴에 계속해서 머무는 시선은 집요했다. 바갈은 의아한 눈으로 사내를 보았지만,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야.”

“뭐?”

바갈은 돌멩이를 걷어차서 수하를 깨우려는 중이었다. 움찔하며 되묻자 남자는 솔직하게 말했다.

“여자 말이야. 이렇게까지 관심이 가는 건 처음이란 말이야.”

“뭐, 뭐야, 그런 거였어?”

바갈은 황당하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저 이상한 녀석이 갑자기 끼어든 이유가 그 때문이라니. 확실히 이 여자는 어딘가 사람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바갈은 이 여자를 이용해 저 녀석을 죽일 수 있겠다 싶었다.

“응. 너와 시답잖은 대화를 하면 여자에게 관심이 좀 덜 가지 싶을까 싶었는데. 전혀 아니군. 그냥 여자가 계속 신경 쓰여. 네가 잡고 있는 것도 매우 기분 더럽고 화가 나지.”

남자는 드디어 걸음을 떼었다. 다가오자 더 거인처럼 느껴지는 자였다. 바갈은 저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을 넘겼다. 어둠 속에서 남자는 그대로 성난 괴물마냥 자신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다.

“여자를 얌전히 넘겨.”

사내는 마침내 멈춰 서서 그에게 요구했다. 여자를 강제로 떼어 낼 수도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여자가 다칠까 염려되는 마음에 일부러 말로 권유하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바갈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웃기지 마! 내가 먼저 잡은 계집이야! 누가 쉽게 줄 줄 알아!”

“그래? 넘길 생각이 없단 말이지?”

하긴. 이 영주의 성에 몰래 잠입해서 사람을 죽여 가며 납치한 걸 보면 단단히 마음먹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여자는 렉스의 눈에 들었고 타인에게 맡길 이유가 없었다. 렉스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 그럼. 알아서 가져가지.”

“응?”

살짝 바갈의 머릿결이 흔들렸다. 그가 느낀 것은 그 정도가 다였다. 눈을 깜짝이자 어느새 여인을 안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언제 데려간 거야? 멍하게 눈을 끔벅였을 때, 바갈의 팔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싹둑 잘린 팔이 나타났다.

“아아악-!”

바갈은 검을 놓치며 고통스러워했다. 렉스는 수지의 뒷머리를 잡고 있는 잘린 팔을 손으로 떼어 버리고는 그 주인을 바라보았다. 보통 전장에서 팔다리가 잘리면 괴로워하다 피를 흘리며 기절하고 만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그보다는 정신력이 독한지 입술을 꽉 다문 채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독기 가득한 눈빛을 보면서 렉스는 슬며시 웃었다.

“왜, 미워 죽겠나?”

“어, 어떻게 자른 거야! 카, 칼도 없는데!”

“나는 자체가 무기야. 검은 그냥 기분 전환용이지.”

“너, 너…… 대체 누구야! 누구기에 이런 짓이 가능한 거야……!”

“지루한 대사가 나오는군. 다들 똑같아. 내 정체가 무엇인지부터 궁금해하지. 하지만 대답을 들으려면 그만큼 강해야 해. 아쉽게도 너는 그럴 정도로 강한 건 아니군. 나쁜데 강하지 않다? 그렇다면 대답도 못 얻고 이렇게 얻어맞을 뿐이야.”

렉스는 수지를 안은 채로 움직였다. 그가 사정없이 바갈의 배를 걷어차는 소리가 훈련장에 울려 퍼졌다. 바갈은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딱딱한 바닥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커헉-. 크흑, 큭-.”

구토와 피가 함께 쏟아져 나왔다. 단순한 발차기도 얼마나 강력한지 오장육부가 몽땅 틀어진 느낌이었다. 갑옷으로도 전혀 방어가 되지 않는 그의 막강한 힘은 바갈의 배를 누르며 등뼈까지 압박했다. 뼈가 부서지는 충격이 고스란히 전달되자 바갈은 목을 뒤로 젖히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렉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바갈의 배를 발로 천천히 밟았다. 아까 여자가 괴로워했던 걸 떠올리자 절로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 기분이 나쁘긴 했나 보군.’

끔찍한 고통에 사로잡힌 바갈을 보자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그냥 죽이는 것보다 이렇게 고통을 느끼게 하면서 죽이는 게 그에게 더 합당한 처우겠지. 렉스는 자신의 행동에 이유를 부여하면서 더욱 힘차게 바갈의 배를 짓눌렀다. 바갈은 그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 때문인지 기절한 수지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지고 말았다.

‘시끄러운가.’

그만해야겠다며 렉스는 발을 떼었다. 바갈이 마침내 숨을 크게 쉬었다. 흉갑은 납작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그는 눈앞의 렉스를 향해 눈알을 부라렸다.

“넌, 대, 대체 뭐, 뭐야…….”

투구가 깨져 드러난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혈관이 터진 눈을 보면서 렉스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불쌍해서 답을 주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인간이란 게 납득하지 않고선 때때로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깨어나고 많은 사람을 죽인 건 아니지만 본능과 감으로 인간의 특성을 알아차린 렉스는 감흥 없는 목소리로 답을 주었다.

“나는 알도스 무어 렉스. 왕국의 전쟁을 도맡은 마나의 인간이다.”

“……그런.”

바갈이 꺼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도 있나.”

숨이 완전히 끊어진 그를 보면서 렉스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나도 궁금해.”

내가 진정 인간인지.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울림이 컸다.

아직 제가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어떤 힘을 지니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선 뚜렷이 답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자신을 가로막고 있어서 제국군을 죽였고 마나가 필요해서 왕국의 인간을 따를 뿐이었다.

로리엔은 그가 왕국의 보물이자 무기라서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지만 문제는 마음이 그걸 당연하다고 인식하지 않는 것에 있었다. 그녀가 말한 것과 같은 의지나 신념의 발현으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죽일 때마다 점점 무언가 꺼림칙해질 뿐이었다. 누군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그게 누군지도 모르겠고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지만 렉스는 생이 이렇게 지루함과 꺼림칙함의 연속이라면 무언가 다른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열심히 싸우자는 로리엔을 볼 때마다 짜증이 났고 사령관의 일을 잘 수행하길 바란다는 왕국의 윗선들을 볼 때마다 불쾌했다.

그들의 종노릇이 벌써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느껴진다니. 마구잡이로 죽여 볼까 생각마저 들 때, 수지를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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