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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88)화 (88/163)

88화

‘왕궁 기사인가?’

그의 갑옷에 새겨진 인장을 살핀 영주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는 물었다.

“일행이 늘었구려. 누구와 함께 온 것이오?”

“수도의 친구들입니다. 이 근처에서 왕명을 받아 일을 하고 있었지요. 괜찮다면 제가 여기 머무는 동안 함께 신세를 지고 싶은데요.”

“그대의 손님이라면 내 손님도 된다오. 더할 나위 없이 환영하오!”

백작의 너스레에 늘씬한 체구의 인영이 먼저 허리를 숙였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예상대로 가녀린 목소리였다. 상당히 젊고 예쁜 목소리라서 백작은 로브 안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마가 깨끗하고 차분한 게 세련된 귀족 같았다. 백작은 흐뭇하게 웃으며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옆쪽 기사에게 머물렀다. 그러나 투구의 기사는 건방지게 고개를 까닥하고 끝내는 것이 아닌가. 무례할 정도의 짧은 인사에 몹시 당황했지만 로도스 백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뭐라 나서기도 애매했다. 내심 기분이 나빴으나 로도스 백작처럼 태연하게 겉으로는 웃어 보였다.

‘설마 신분이 백작보다 높고 그런 건 아니겠지?’

그 무례한 태도가 몹시도 자연스러워 의심이 들었다. 백작까지 그 무례를 용서한 걸 보면 고위 귀족일 것 같은데. 질문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나중에 정체를 알아내기로 하고 우선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다시 한번 반갑소! 이 항구 도시는 그대들을 품어 줄 거요. 말은 시종들이 도와줄 거요. 곧 시종장이 나와 그대들을 모실 것이외다. 그대들이 편안하게 머물 방이 이미 준비되어 있소! 바다가 보이는 곳이니 아침에는 풍경이 흡족할 것이고 밤에는 그 고요함의 정적이 맘을 평화롭게 할 것이오. 혹시 시장하지는 않소? 우리 도시가 자랑하는 산해진미가……”

자랑 가득한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천천히 말을 몰며 영주를 뒤따르던 로브의 여자는 옆쪽의 기사가 따라오지 않고 성 어딘가를 올려다보고 있자 물었다.

“왜 그래요?”

투구의 시선이 3층 창에 닿아 있었다. 누군가가 있는지 환한 창문에는 그림자가 어른거렸는데 렉스가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곧 사라져 버렸다. 렉스의 감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로리엔은 흠칫해 되물었다.

“설마 제국군이?”

“아니야.”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렉스는 창문에서 눈을 돌렸다. 그림자가 다시 비치지 않을 것을 알고서야 눈을 뗀 것이다. 로리엔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정말?”

“알 거 없어.”

“렉스!”

로리엔이 속상한 목소리로 대꾸했으나 렉스는 쳐다보지도 않고 갈 길을 갈 뿐이었다. 앞서 나가는 사령관을 보면서 로리엔의 표정이 굳었다.

새로운 사령관, 그러니까 기억을 잃은 렉스는 전보다 대하기가 까다로웠다. 더 비협조적이었고 더 날이 서 있었다. 그가 눈을 뜬 순간부터 정성과 호의로 애틋하게 그를 대했지만 돌아오는 것이라곤 차가운 눈빛과 거리감뿐이었다.

‘아직 적응이 덜 되어서 그런 거겠지?’

로리엔은 애써 이유를 납득하려고 애썼다. 기억을 잃었더라도 그는 그대로였다. 소중한 존재이자 귀한 발명품이었다. 자신은 그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으며 선생님 같은 배우자였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와 암탉에게 모든 것을 배우듯 자신도 렉스를 그렇게 가르치고 싶었다.

물론 렉스는 병아리라고 하기엔 이미 완전체였으며 로리엔을 그런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달랐으나, 렉스가 연금술의 창조물이라는 점에서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더 깊은 관계가 되는 게 목표지만.’

그건 차차 이루면 된다. 시간이 흐르면 정이 쌓일 것이고 정이 쌓이면 렉스도 못 이긴 척 저를 받아 줄 것이다. 그러면 렉스와 로리엔은 마나 기사와 연금술사로서 왕국에서 알아주는 최강의 연인이 된다. 왕자까지 깜짝 놀라게 될 그 미래를 생각해 보며 로리엔은 부푼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잠시 후 그녀는 렉스가 쳐다봤던 작은 창을 불안하게 응시했다.

‘설마 별일 있겠어?’

렉스를 놓칠세라 그녀는 말을 재촉했다.

야회는 가벼운 포도주 잔을 나눠 드는 걸로 시작했다. 모인 사람들은 항구에서도 지위와 명예로는 빠지지 않는 자들이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대화들이 가볍게 오가는 동안 영주가 실내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다들 편히 이야기 나누시지요. 오늘은 격식 없이 모인 자리니 더 허심탄회하게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을 둘러보던 영주는 아직 솔리나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시종에게 묻자 준비 중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사람들이 모두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올랐을 때 등장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 빠른 영주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오늘 만남이 중요하다는 걸 아는군.’

젊은 그녀가 이 항구에서 남쪽을 차지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녀의 속셈을 칭찬하던 와중, 그는 로도스 백작 옆에 있는 낯선 미인을 발견했다. 고운 머리칼이 등 뒤로 차분하게 떨어지는 그녀는 결혼에 목매는 여느 귀족 여자들과는 다르게 어딘가 우아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가만.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몇 년 전, 수도의 신년회에서 왕의 수석 연금술사로 첫 발령을 받은 그녀의 모습을 기억한 것이었지만 이를 상세히 떠올리는 데 실패한 탓이었다. 영주는 호기심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뚫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음식은 입에 맞소? 근데 곁에 있던 왕궁 기사는 어디에 있소?”

“아, 그요?”

로리엔은 아쉽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런 모임에는 관심이 없어서요. 검술 훈련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거참,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군요. 한편으론 그런 우직한 사람이 왕궁 기사여서 안심입니다만.”

백작은 역시나 화술이 좋았다. 로리엔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요. 그가 우리를 지켜 주어 저는 세상에서 제일로 안심된답니다.”

“세상 제일이요? 이거 굉장한 분이었구려! 하하!”

농담처럼 영주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주위 사람들도 영주를 따라 영문도 알지 못하고 웃었다. 로리엔은 그 모습이 재밌었다. 사람들은 보통 코앞에 있는 모습만 생각하고 만다. 그 뒤에 어떤 고생과 노력이 숨어 있는지 모르고.

눈앞의 영주와 사람들은 몰랐다. 그들이 오늘 사령관에게 얼마나 큰 빚을 졌는지. 렉스 덕분에 이 항구 도시가 무사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렉스가 제국군을 깔끔하게 없애 준 덕에 사람들은 걱정 없이 이 야회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걸로 증명됐겠지.’

제국군의 배가 이 항구에 기항하고 있다는 비보를 듣자 수뇌부는 이를 처리하는 해결자로 렉스를 골랐다. 깨어난 사령관이 임무 수행 능력이 있는지 알아본다는 것이 그 주된 취지였다.

렉스는 제국군의 배가 그를 향한 의심과 불안이기라도 한 듯이 시원한 솜씨를 보여 주었다. 달아나는 기사들은 잡아서 바닷속에 수장시키고 그 흔적을 모두 지웠다. 그렇게 왕국의 작은 항구 도시를 점령해 수도로 나가는 길목을 획득하려 했던 제국군의 속셈은, 사령관의 매서운 손속 아래 한낱 물거품처럼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로도스 백작은 렉스의 임무 해결을 확인하러 이 도시에 온 것이었고 이제 그를 확인했으니 돌아갈 일만 남은 상태였다. 따라서 로리엔은 그 여느 때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야회에 참석하여 영주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왕궁 기사 분이 이 야회에 참석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말이오!”

“저도요. 정말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쯤 어두운 훈련장에서 우두커니 본인의 힘을 만끽하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로리엔은 영주가 주는 포도주잔을 느릿하게 홀짝거렸다.

“어서, 빨리 해!”

솔리나는 수지를 재촉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드레스며 장신구며 장식용 무기며, 그것들을 예쁘게 여민다고 시간을 끌었던 주제에 정작 수지가 간단한 주머니를 챙기려고 돌아다니자 그걸 못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수지는 미간이 주름져서 신경질을 내는 그녀를 보면서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고분고분하게 따를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도망칠 기회라는 것을 잘 아는 수지는 무디스를 향해 목 인사를 하고 작은 주머니를 챙겼다. 새장까지 손에 든 그녀를 보면서 솔리나는 피식 웃었다.

“꽤 예의 바르네. 무디스가 널 챙기는 이유를 알겠어. 꼴에 지도 치료사라고 대접받고 싶어하기는.”

수지는 그가 예의 때문에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괜히 말해 봤자 긁어 부스럼이 될 뿐이었다.

얌전하게 있는 수지를 보면서 솔리나는 성큼성큼 걸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를 따라서 발목까지 오는 드레스가 흔들렸다. 모처럼 우아하고 고풍스럽게 멋을 낸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야회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가면서도 그녀는 수지에게 주의를 몇 번이나 주었다.

“내가 신호하기 전까지 말해선 안 돼. 내가 턱짓하면 그때 말하고 대답해야 해. 사슴에 대해선 네가 먼저 떠드는 일이 없어야 하고. 아, 그리고 새장의 새는 잘 씻겼지? 똥 냄새가 나는 건 질색이니까.”

그러자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부리를 딱딱거렸다. 누굴 지저분한 똥 새 취급하냐고 불만을 터트리는 동안, 솔리나는 백작에게 할 인사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로도스 백작님? 오래 기다리셨죠. 오늘 만남만을 저도 고대했습니다.”

솔리나는 마치 무도회에 나온 공주처럼 백작을 향한 기대감에 흠뻑 취해 있었다. 오늘 방문한 손님이 굉장히 수도에서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라고 수지가 어렴풋이 생각할 때였다. 솔리나가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야?”

갑자기 투구까지 쓴 기사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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