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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87)화 (87/163)

87화

“신기하군요.”

백작이 눈을 가늘게 접으며 관심을 보였다. 그는 흥미로운 어조로 물었다.

“특히 사슴이 따른다니. 마치 신성한 금빛 뿔의 사슴을 평범한 사슴들이 따르는 것처럼 말입니까?”

“어머.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이야. 생각도 못 했던 부분이네요. 맞아요.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정말 기이한 일이죠?”

“사실이라면 무척 대단한 일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가문의 문양이 황금 뿔 사슴이라서요. 개인적으로 신성한 사슴에 관심이 많은 편이죠. 황금 뿔 사슴을 찾아보려고 애써 보았지만 아쉽게도 기회가 찾아오지 않더군요. 근데 그런 능력을 지닌 노예가 있다니. 괜찮다면 그 노예를 따로 만나 보고 싶은데요?”

처음으로 백작이 관심을 가지며 적극적으로 물어 왔다. 솔리나는 눈을 빛내며 기회가 왔구나, 생각했다.

“영광입니다. 백작님께서 관심을 주신다니, 당연히 데려와야지요.”

“그럼 내일 밤은 어떻습니까. 낮에는 제가 어딜 가 봐야 해서요. 만나야 할 일행들이 있다 보니 밤에야 시간이 될 거 같습니다. 영주님께서만 허락해 주신다면 여기서 작은 야회를 여는 것도 좋겠군요.”

백작은 그리 말하며 영주를 슬쩍 바라봤다. 영주는 물론 좋다며 당장에 준비하겠노라고 했다. 야회는 소수의 사람들만 모이는 모임이 될 거란 이야기에 솔리나는 뛸 듯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영주도 활짝 미소 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나도 궁금하구려. 그런 능력의 노예라니.”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며 공감을 표시했다.

내일 야회가 열린다는 소문은 빠르게 번져 나갔다. 백작의 마음에 든 소수의 이들이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한 추측이 쏟아지는 가운데, 참석이 확정된 솔리나가 동반할 노예에 대한 호기심도 커졌다.

수도의 백작이 흥미를 보일 정도의 노예라니.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술자리의 안줏거리처럼 돌아다닐 때 항구의 숙소에서 수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바갈의 표정은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다.

“뭐? 방금 뭐라고 했어?”

“그, 그러니까 그 계집 같다고요! 백작이 보고 싶어 한다는 노예가 우리의 배를 부수고 달아난 여자와 같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바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우리의 배?”

“제, 제 말은 선장의 배 말이죠. 암요, 서, 선장님의 보물이었던걸요!”

멱살이 잡힌 수하는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서둘러 정정했다. 바갈은 그를 던지듯이 밀치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 버릇 없는 계집을 찾으려고 이 항구를 얼마나 들쑤셨던가. 가게마다 돌아다니며 여자를 모르냐고 반협박과 회유를 해야 했고, 돈을 풀어서 거지들과 애새끼들에게 여자를 찾아내라고 독촉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하고도 돌아오는 결과물이란 아주 형편없었다. 여자는 죽었는지 사라졌는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기에 물에 빠져 죽은 건가 불쾌해하며 포기하려던 찰나였다. 근데 버젓이 살아서 누군가의 노예로 있었다니. 그것도 제가 방문했던 가게 주인의 외출 수행원으로 말이다.

“솔리나, 그 빌어먹을 상인 나부랭이가!”

저를 앞에 두고서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꼴에 지가 대귀족이라도 되는 양, 벌레 보듯이 쳐다보면서. 그녀의 목에 칼을 꽂아 넣고 싶었던 충동을 느꼈던 것을 떠올리며 바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복수의 기회도 덩달아 올지 모르겠군.”

“네?”

“아니, 야회라고 했지? 우리도 참석하도록 하지.”

흉악하게 눈을 빛내는 선장을 보면서 수하는 어떻게 참석할 거냐고 묻지 못했다. 그저 섬뜩한 살기에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기 바빴을 뿐. 

쨍그랑! 

그 시각 수지는 손에서 떨어진 병을 바라보며 어깨를 흠칫하고 말았다. 무디스가 괜찮냐고 물어왔다.

“비싼 병이니 다룰 땐 조심해야 한다.”

흠집이라도 나면 주인이 크게 혼을 낼 거라고 주의를 시키는 그였다. 수지는 알겠다고 하며 얼른 유리병을 주웠다. 정력제를 담을 그릇이었다. 고위 귀족에게 선물로 주기 위한 물건인 만큼 주위에서 보기 힘든 정제된 유리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었다.

수지는 그 투명한 바탕에 비치는 제 얼굴을 응시했다. 주눅 든 채로 굳은 얼굴. 딱딱함이 배인 그 얼굴에는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정말 여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기회가 찾아올까. 의구심이 커진다.

“이봐!”

그때 솔리나가 큰 소리를 내며 방에 들이닥쳤다. 그녀는 지금까지 보았던 얼굴 중에 가장 흥분된 얼굴을 한 채 반복해서 물었다.

“네 능력, 사슴이 다가오게 하는 것, 다시 할 수 있지? 그치?”

“아마도…….”

“아마도? 그런 대답은 안 돼. 확실해야 해.”

수지는 머뭇거렸다. 눈을 무섭게 반짝이며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능력은 노력해서 생긴 게 아니었다. 우연히 얻게 된 거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어 확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솔리나는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강조했다.

“네 능력은 확실해야 해. 적어도 내일까지는.”

“…….”

“네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어. 능력만 확실하면 돼. 그러면 네게도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장담하지.”

“대체 무슨 일입니까.”

보다 못한 무디스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으나 솔리나는 알 거 없다는 듯이 턱을 치켜올렸다.

“자네는 정력제나 모레까지 완성해. 실수는 용납하지 않을 테니 그리 알고.”

“명심하지요.”

“그리고 너. 깨끗한 옷 좀 있어? 흠. 지금 입고 있는 옷도 괜찮네. 너와 잘 어울려. 그러니 내일도 입어. 나와 함께 저녁 외출을 할 거니까. 파란 새도 데리고서.”

그러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나가 버리는 솔리나였다. 무디스는 그녀가 나가고 나자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이상한데? 너를 데리고 나간다니. 네 능력을 써먹을 데가 있나 보지? 저렇게 신이 난 걸 보면 분명해.”

그렇게 말하더니 수지를 쓱 훑어보았다.

“근데 네 옷이 뭐가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낡아 빠진 옷일 뿐인데. 네 얼굴을 칙칙하게 만들었으면 만들었지.”

무디스는 주인의 눈이 삔 게 아니라면 고의적인 게 틀림없다고 툴툴거렸다.

수지는 말이 없었다. 그들은 줄곧 방에 갇혀 있었다. 로난을 풀어 줄 수도 없었다. 지켜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를 빼앗아 갈까 두려웠던 것이다.

‘외출이라고?’

바깥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지에게 주인의 말은 마치 기회처럼 들렸다.

‘드디어 나갈 수 있어.’

수지는 눈을 빛냈다. 로난 또한 그녀의 옆에서 생각을 읽은 것처럼 날개를 부산스럽게 퍼덕였다. 

다음 날, 새벽부터 오후까지 무디스는 정제된 약물을 완성하기 바빴다. 그는 서두르고 있었다. 수지도 그를 도와서 정제된 약물을 바삐 병에 담았다. 복숭아 향이 나는 보랏빛의 액체는 냄새가 아주 강렬했다.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아득하니 홀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몸엔 자연스럽게 향이 배었고 무디스는 제 몸에 밴 냄새에 킁킁거리며 만족스러워했다.

“성급하게 한 것치곤 아주 잘 됐구나. 누구든 이걸 마시면 그날 저녁엔 잠을 못 자고 열을 낼 거야.”

그는 흡족하게 이야기하면서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병 하나에 하얀 가루를 뿌려 넣는 게 아닌가. 일순 향이 강렬하게 피어나며 병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수지가 쳐다보자 무디스가 그것의 뚜껑을 닫고 수지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네?”

“피부에 닿으면 일시적으로 잠이 오게 하는 약이야. 정력제에 가시나무 뿌리 하나를 갈아 넣어 변형시켰지.”

“아…….”

수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정력제를 서두른 게 설마 자신 때문이었나. 감격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그는 무안한지 얼른 받으란 시늉을 했다.

“늘 만드는 수면제를 만들었을 뿐이야. 들고 다니면 쓸 일이 생기겠지. 어떤 일에 써야 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네가 어련히 잘할까.”

무디스는 경고했다.

“먹는 게 아니라 피부에 닿아 효과가 발생하는 만큼, 강력한 지속력은 없다. 누군가 큰 소음을 내거나 진동을 주면 즉시 깨어나니 잠깐 시간을 버는 정도라 알아 두어라.”

수지는 명심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보이지 않도록 작은 병을 허리 안쪽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창문 앞에 서서 제 옷차림이 몇 번이나 괜찮은지 보던 수지의 시선이 자연스레 창밖으로 향했다.

어느새 어둑해진 사방. 밤의 장막이 저 멀리 성벽에서부터 빛을 말살해 나간다. 아득하여 두려워지는 까마득함이 몰려오기 전에 기사들은 성벽과 회랑 곳곳에 횃불을 피워 올렸다. 수지는 그곳에서 화려한 망토를 입은 채로 서성이는 남자를 발견했다. 바로 이 성의 주인, 외출한 로도스 백작을 마중 나온 도시의 영주였다.

곧 활짝 열린 문으로 흰색 말을 탄 이들이 도착했다. 맨 앞의 남자는 얼굴을 드러낸 채였다. 익숙한 얼굴을 보면서 영주는 반갑게 말을 걸었다.

“로도스 백작! 볼 일은 잘 끝냈소?”

“덕분에요. 기다려 주어 고맙습니다.”

“별말을 다 하는구려. 우리 성에 온 귀한 손님을 내가 어찌 모른 척하겠소? 몇 번이고 이렇게 기다릴 의사가 있소. 근데…….”

영주는 그의 뒤에서 말을 타고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한 사람은 로브를 머리 앞까지 눌러쓴 호리호리한 체격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투구까지 챙겨 쓴 훤칠한 체격의 기사였다. 여자로 추정되는 인물은 분위기가 조용하니 얌전했지만 남자 기사에겐 왜인지 쳐다보는 것만으로 목 뒤가 서늘해지는 긴장감과 살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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