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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86)화 (86/163)

86화

들어가는 문 또한 일반 문을 세 개 합친 것처럼 커다래서 옆쪽의 기사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문조차 밀 수 없었다. 영주는 솔리나를 맞이하려 직접 문을 열었다. 40대 후반의 영주는 남쪽 항구의 물건을 유통하는 솔리나를 보며 토실토실한 양 볼이 위로 올라가도록 진한 환영의 미소를 지었다.

“도착했구려, 우리 항구의 여신!”

“어머, 백작님도 참.”

솔리나는 기쁘게 웃으며 마부석에서 내렸다. 영주는 팔을 내밀며 직접 에스코트하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솔리나는 기꺼이 그 팔에 제 손을 올리며 환대에 응답했다. 영주는 그녀의 뒤로 따라 내리는 시종들을 보면서 껄껄 웃었다.

“식솔들을 많이 데려왔군! 언제 봐도 준비성이 좋아.” 

“드릴 선물이 많다 보니 그랬습니다.”

“오, 그래? 기대가 되는군! 많은 손님들이 선물들을 가져왔지만 아직 이렇다 할 게 없어서 말이야! 중앙에서 로도스 백작도 오는데 내 체면이 안 사는 게 아닐까 걱정했거든? 자네도 알다시피 수도의 귀족들은 훨씬 세련되고 고상한 취향들이어서 말이야. 이런 변두리 항구 도시의 물건은 시시하게 여길까 걱정이 크네!”

“분명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좋아, 자네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니 벌써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군. 얼른 짐을 풀도록 해. 아직 로도스 백작은 도착하지 않았어. 중간에 어딜 들른다고 하더니만 좀 늦어지는군. 그래도 저녁 연회에는 꼭 참석한다고 하니 자네도 늦지 말고 오게.”

“알겠습니다. 절대 빠질 수 없죠.”

솔리나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식솔들을 데리고 입성했다.

기사들은 솔리나의 뒤를 따르는 일꾼들 중에서도 쩌렁쩌렁 쇠사슬을 끌고 가는 무디스에게 유독 시선을 보냈다.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것이 저 녀석의 정체가 뭐냐 하는 것만 같았다. 무디스는 그들에게 시선을 조금도 주지 않은 채로 앞만 보며 걸었다. 수지 또한 그런 그를 바짝 쫓아서 솔리나 옆의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정력제를 준비해야겠구나. 너는 약초를 끓이는 데 필요한 솥과 물을 주방에서 얻어 오너라. 복도로 나가면 시종장이 있을 테니 그에게 말하면 돼. 주인이 필요로 한다고 말이야.”

하지만 명을 받은 다른 사람과 달리 수지는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솔리나가 두 사람의 외출을 막은 것이다. 필요한 건 방 안에서 전부 요청하라는 명에 무디스는 혀를 찼다.

“어디에 있든 갇힌 신세로구나. 노예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는 거겠지.”

“…….”

“다행일지도 모른다. 괜히 성격 나쁜 귀족들에게 걸려서 고생하는 것보다야 정력제 따위를 만들며 방에 갇혀 있는 게 낫지.”

무디스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고는 빨리 움직이자며 수지를 독촉했다.

수지는 그를 도와 약초를 끓이면서도 작은 창으로 연신 시선을 주었다. 부드러운 선율이 들려오고 있었다. 몇 시간 뒤에 있을 연회를 위한 것일까. 오래되고 낡은 성은 모처럼 수도의 방문객을 맞이해 기대에 부푼 게 틀림없었다. 솔리나 역시 긴장된 얼굴로 연신 옷과 화장을 고치는 게 그 증거였다.

수지는 무디스가 만든 향수를 전달하면서 솔리나의 상기된 얼굴을 확인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수도의 귀족에게 자신을 부각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었다.

“어, 로도스 백작님. 그 위명을 익히 들어 왔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아니, 행복합니다! 아니…… 머튼 가문의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드레스로 여민 가슴을 내민 채로 가장 매력적인 인사법을 찾고 있었다. 수지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돌아왔다. 주인이 그러고 있단 말을 들은 무디스는 끌끌 목에서부터 비틀어져 나오는 웃음을 터트렸다.

“주인은 야망에 비해 가문이 받쳐 주질 못하는 편이지. 그래서 더 난리인 거야. 자연스레 얻어지는 몫보다 더 많은 걸 얻어 내고 싶어 하니까. 이번 만남 같은 것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거지. 잘못됐을 때 얼마나 기분이 나빠질지 모르고 말이야.”

무디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까 보니 마차의 행렬이 끊이질 않더구나. 이 항구의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은 다 모여드는 모양이야. 다들 혈안이 된 거지. 이 기회에 중앙 진출을 하려고. 그래 봤자 중앙의 귀족 나리께서 이 변방에 얼마나 눈길을 줄까 싶은데.”

무디스는 입술을 틀어 비웃으면서 끓어오르는 솥에 약초를 넣으라고 지시했다. 수지는 그의 말을 따르면서도 머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작은 창을 향해 있었다. 무언가 골몰하듯이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를 보면서 무디스는 툭 던지듯이 말했다.

“허술한 것처럼 보여도 지금 영주의 성은 그 어느 때보다 보안이 철저하다.”

“네?”

수지는 움찔하며 무디스를 돌아봤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모를 거 같냐? 네가 탈출하고 싶어 하는 거. 처음부터 알아차렸다. 저 파란 새를 만나고부터는 더욱 바깥을 보는 시간이 길어졌지. 아무튼, 내가 눈치챘으니 주인도 알아차릴 거다. 무언가를 저지를 생각이라면 빨리하는 게 좋아.”

태연하게 말하는 무디스였다. 심드렁하게 이야기하는 태도는 수지의 탈출을 막으려는 의도 따위는 조금도 없다는 것만 같았다.

수지는 그런 그가 고마웠다. 노예 둘 중 하나가 도망친다면 남은 하나는 상대적으로 곤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주인이 남아 있는 노예를 가만히 둘 리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수지는 무디스에 같이 도망치자고 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난 달아나기엔 너무 늙고 지쳤어. 10분만 걸어도 숨이 차는 걸, 몇 시간을 어찌 달리고 숨고 하겠나. 약이 없는 시간을 견뎌 내기엔 더더욱 모자란 몸뚱이지. 주인도 그런 나를 알아서 이렇게 데리고 다니며 이용하는 거고. 아무튼. 내게는 자유보다 안정이 중요하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을 해라.”

“하지만 제가 가고 나면…….”

그 뒤가 걱정이란 듯이 수지는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상냥하구나. 늘 그랬지만.’

무디스는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난 너보다 여기 오래 있었다. 주인 다루는 법을 알아. 네가 가고 나서도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나는 살아 있어야 돈이 되니까. 주인에겐 분노보다 금화가 더 의미 있거든. 하지만 넌 아니다. 나처럼 자신 밑에 두는 것보다 써먹는 게 돈이 된다고 판단했을 수 있어. 새까지 데려온 걸 보면 말이야. 이상한 일에 휘말리기 전에 떠나는 게 최선이겠지.”

무디스는 때를 노리라고 했다.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이 방을 나갈 기회가 한 번은 찾아올 거라고 말이다. 그의 말대로였다.

때는 저녁 어스름이 주변에 내려앉았을 무렵, 영주의 성에서 환한 불빛이 넘실거리며 빠져나오던 시간이었다. 달콤한 음악과 웃음소리가 번지는 연회장은 그날의 손님인 백작의 화려한 자태에 연신 들뜬 수다가 끊길 줄 몰랐다. 지방 귀족들이 아무리 멋을 부리고 광을 내더라도 유행을 선도하는 수도의 귀족과 같을 수는 없는 노릇.

더구나 방문한 이는 젊은 귀족 중에서도 멋을 잘 부리기로 유명한 로도스 백작이었다. 그는 잘생긴 얼굴과 유창한 능변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아 연회를 주도하는 일을 곧잘 했다. 따라서 그의 주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 있었다.

그들은 그의 동작 하나에 웃으면서 열띤 호응을 보내기 바빴지만 정작 로도스 백작 본인은 그 어떤 것에도 감명을 받지 못했다는 듯이 지루해 보였다. 영주는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까 하며 유지들이 갖고 온 선물들을 자랑하기 바빴다.

“로도스 백작, 이 지역의 유명한 특산물을 아십니까? 해산물 말고도 벌꿀이 유명합니다. 특히 벌꿀로 담근 술은 끝내주지요! 한 잔 드시겠습니까?”

“맛있겠군요. 감사합니다.”

로도스 백작은 적당히 호응만 했다. 그 어떤 것에도 그다지 관심 없다는 태도를 읽어 버린 영주는 점점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관심을 사로잡아야 수도에 그럴싸한 연줄이 생기는데.

하지만 수도에서도 가장 좋다는 최상급의 물건들만 취급해 온 백작에겐 이 작은 소도시의 물건들이란 그저 시장에 널린 것들처럼 시시해 보일 뿐이었다.

안달하는 영주를 보면서 솔리나 역시 제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자랑해 보았지만 로도스 백작의 반응은 영 건조하기만 했다. 한껏 꾸민 외모조차도 그의 시선을 끌지 못하자 자존심이 상했는데, 누군가 그에게 노골적으로 묻는 게 아닌가.

“백작께선 이곳에 마음에 드는 여인은 없으신지요?”

“저는 좀 까다로운 편이라서요.”

백작은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예쁘다고 하는 사람보다 어딘가 비범한 면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야 할까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니. 다만 아름다운 분들 사이에서도 쉽게 동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왕성에서도 그랬고요, 여기라고 크게 다르진 않은 거 같습니다.”

“비범하다면 어떤 면에서 말입니까?”

“글쎄요. 외모든 재능이든, 남들에겐 쉽게 없는 면모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거 참, 까다롭구려. 로도스 백작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아가씨들이 이 연회장을 가득 메웠는데, 그 누구도 백작의 맘에 들지 않는다니!”

영주의 한탄에 백작은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사실 비범한 것만으론 부족했다. 자신은 수도의 잘 나가는 귀족이었고 촉망받는 가문의 수장이었다. 이런 자신의 맘에 들려면 배경, 학력, 외모 뭐 하나 빠짐없이 훌륭해야 했다. 영주에겐 안타깝지만 이런 촌구석에 그런 여자가 있을 리는 만무했다. 백작은 다소 지루해진 어조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어쨌든 좋은 분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는 거에 의의를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머무는 시간이 금세 지나갈 거 같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비범한 면이라.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를 다루는 여인은 어떻습니까?”

백작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솔리나는 제게 시선이 향하자 은근히 턱을 내밀며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제가 가진 노예 중에 신비한 파란 새를 다루는 여인이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사슴 또한 그 노예를 따르는 것 같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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