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솔리나의 삐뚤어진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은 수지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이 공간에서 가장 빛나야 하는 건 자신인데 어디서 굴러온 것인지도 모르는 노예 따위가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얼굴도 은근히 눈에 띄어.’
조용한 듯 단아한 외모가 빛을 발한다. 어둠 속에서 은은한 향을 풍기는 이국적인 꽃을 보는 양. 솔리나는 수틀려 모난 눈으로 수지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새가 경계하며 솔리나를 쫄 것처럼 움직이자 도리어 더 어이가 없어졌다. 도대체 저 계집 따위가 뭐라고.
기분이 완전히 나빠져 병사들에게 끌고 가라는 고갯짓을 하자 무디스가 기겁해서 나섰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상황 판단이 안 되는 녀석인데……! 설명을 못 드렸습니다. 상처 때문에 며칠 앓더니 뭐가 중요한지 모르나 봅니다. 제가 책임지고 교육하겠습니다!”
솔리나는 소리 없이 무디스를 바라봤다. 무디스는 그답지 않게 고개를 숙여 가며 애원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그녀의 기분을 더 헝클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남의 일에 대해선 무관심하던 인간인데.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거지? 솔리나가 불쾌해할 때 무디스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까 제 시중을 들 만한 노예를 주신다고 하셨죠? 그녀는 어떻습니까. 사리 분별을 못 하긴 해도 조용하니 손이 빠르더군요. 제 아래에서 쓸 만하게 약을 제조할 겁니다.”
“그래?”
약 제조라는 말에 솔리나는 그제야 반응했다. 무디스는 그럼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까다로운 성격이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제 품성에도 딱히 거슬리지 않는 녀석이니 제게 주신다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흠.”
솔리나는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맘 같아선 저 노예를 끌고 가 제 기분이 풀릴 때까지 채찍질을 하라고 하고 싶지만 그녀에겐 어딘가 이상한 데가 있었다. 외모나 행동 말고 동물들이 따르는 데서 오는 묘한 이질감 같은 게 말이다.
‘저 능력을 써먹을 데가 있겠지?’
골이 난 심정으로도 최대한 유리한 쪽으로 판단하려고 애썼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수지의 손등을 바라봤다. 이윽고 결론을 내렸다.
“좋아. 손이 완전히 나을 때까진 네가 데리고 있어. 하지만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네 시종으로 두기엔 아까우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무디스?”
솔리나는 차갑게 웃었다. 섬뜩한 미소였다.
“네가 책임진다고 했지? 오늘 일에 대해서도 책임져 줘야겠어.”
“예? 그게 무슨.”
무디스는 오래지 않아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오늘 벌인 소동의 대가로 다음날 식사가 지급되지 않은 것이다. 평소 3개가 지급되는 푸른 열매도 한 개로 줄어 있자 수지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눈가가 붉어져서 돌아보는 수지를 다독인 건 오히려 무디스였다.
“괜찮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느냐? 어쩔 땐 꼬박 일주일 동안 물 한 모금이나 제대로 먹고 찬 바닥에서 경련을 견딘 일도 있었어. 초창기엔 지금보다 더 고집스럽고 독했으니까. 이 정도면 주인도 나도 많이 느슨해진 편이지.”
무디스는 별일 아니라며 열매 하나를 신중하게 집어 들었다.
“난 이걸 세 번으로 나눠 먹을 방법을 찾아봐야겠구나. 너는 저기 약초들을 다듬고 있어라. 일찍 끝낸다면 자기 전까지 하고 싶은 걸 해도 된다.”
무디스는 수지 옆에 있는 파란 새를 바라보았다. 털이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새. 주인이 이 귀한 녀석을 선뜻 수지에게 넘겨준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였다. 그냥 두면 어차피 말도 안 듣고 먹이도 안 먹을 테니까 관리하라고 준 것이겠지. 인간들의 음식은 없는 대신 새의 먹이는 도착한 걸 보면서 무디스는 귀찮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넌 털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치료실 바닥에 깃털 날리는 건 정말 질색이니까.”
무디스는 까칠하게 경고하고는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수지는 로난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가득한 수지를 보았는지 로난은 그녀의 어깨에 털을 비벼 왔다. 수지는 물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
삐삐삑. 로난도 역시 그렇다며 울었다. 수지는 조용한 시선으로 로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수지가 항구에서 쓰러지고 나서 로난은 수지를 깨우려고 노력했다. 하나 식수를 구하러 간 사이 수지가 사라졌고 몇 날 며칠을 항구 주변에서 날며 수지의 행방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그 고난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로난의 눈동자는 따라서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수지는 로난의 몸을 고요히 감싼 채 중얼거렸다.
“여기서 오래 머물 순 없겠지.”
어떻게든 달아나야 할 텐데. 수지는 방에서 콜록거리는 무디스의 기침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이 깊어졌다.
의외로 기회는 빠르게 왔다. 이틀 뒤 수지가 붕대를 완전히 벗는 날, 주인이 직접 무디스의 치료실로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저번에 봤을 때보다 초조한 듯 여유가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 있었어? 보아하니 손이 완전히 다 나았군. 다행이야. 뒤의 새도 힘이 넘치는 것 같고.”
솔리나는 저를 경계하며 뒤쪽에서 머리와 어깻죽지를 바짝 세우고 있는 새를 무심한 미소로 훑었다. 그녀는 무디스가 건네는 수면제를 받으면서 말했다.
“중앙에서 귀족이 온다고 했던 거 기억해? 그가 예상보다 빨리 내려와서 말이야. 내일 정오에 도착해서 3일간 영주의 성에 머문다고 하더군.”
“내, 내일이요? 하지만 정력제를 가공하려면 꼬박 삼 일은 걸리는데.”
“더 빠르게는 안 돼?”
“어렵습니다. 기본적으로 끓여서 졸이는 시간이 있거든요. 물론 시간을 줄일 순 있지만 그러면 효능이 떨어져서…….”
“그렇단 말이지?”
솔리나는 초조한 눈으로 고심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앙의 귀족이 이 변변찮은 항구 도시에 다시 얼굴을 들이밀 날이 다시금 찾아올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이 기회야.’
그를 맞이하겠다고 도시의 영주가 며칠 전부터 성을 대청소하던 것과 주변의 유지들이 분주하게 드레스와 제복을 사들였던 것을 떠올리며 솔리나는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 그럼 함께 영주의 성에 가자. 거기서 정력제를 완성하는 거야.”
“영주의 성이요? 하지만 전…….”
미간을 구기며 거부하려는 무디스를 솔리나는 차갑게 외면했다.
“네 사정을 봐줄 때가 아니야.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이번 기회에 중앙의 인맥을 터놓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안 올지도 몰라. 다른 이들이 먼저 채 가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한다고. 난 이 작은 항구에 만족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 별소리 말고 함께 가는 걸로 알고 필요한 약초를 챙겨. 정확히 삼 일 뒤 선물할 예정이니까.”
무디스는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알아들었다는 소리를 냈다. 솔리나는 만족했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가 방금 생각난 척 말했다.
“그녀도 데려가지.”
“네?”
“쟤 말이야.”
솔리나는 턱짓으로 한구석에서 약초를 싸고 있는 수지를 가리켰다. 무디스가 뜻밖이란 듯이 쳐다보자 솔리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조수가 하나 있으면 좋잖아?”
솔리나는 그것 때문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지만 무디스는 그게 다가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솔리나의 눈빛이 뭔가 꿍꿍이 가득하게 빛났다고 할까? 괜히 불안해진 무디스는 수지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쪽 어깨에 파란 새를 얹고 있는 그녀는 너무 연약하고 순진해 보였다.
‘저런 녀석이 주인의 욕심에 휘말려 다치기라도 하면.’
밤에 잠이 안 올 것 같다.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인상을 찌푸렸다는 걸 알지 못한 채로 무디스는 항의하려는 듯이 입술을 달싹였으나 솔리나는 그가 말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내일 출발할 테니 그리 알아.”
쌩하니 나가 버리는 그녀를 보면서 무디스는 복잡한 한숨을 짧게 터트려야 했다.
“들었지? 내일 아침 여기를 떠날 수밖에 없겠구나. 그러니 준비를 해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철저하게 준비하는 거야.”
무디스는 의미심장하게 말하고는 쩌렁쩌렁 쇠사슬을 움직여 가며 약초를 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수지는 병사들을 따라서 거대한 수레 마차에 올라탔다. 내부는 사람들이 앉아서 타고 갈 수 있도록 개조되어 있었다. 병사들과 일꾼, 시종들이 차례로 앉고 끝에 수지와 무디스가 앉았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싫어하는 무디스는 온몸을 로브에 숨긴 채로 약초와 약병이 든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멀리 길을 떠나면 쇠사슬을 풀어 줄 만도 하건만 그의 다리에는 여전히 무거운 쇠사슬이 매달려 있었다. 가면서 그의 발을 누르지 않도록 수지는 그것들을 한쪽으로 얌전히 치워 놓았다.
무디스가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할 때였다. 솔리나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 준비됐지?”
솔리나의 시선은 무디스와 수지에게 머물렀다. 무디스가 그렇다는 듯이 황폐한 시선을 깜박였고 수지는 가만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좋아.”
솔리나는 수지의 옆에 파란 새가 든 새장이 놓인 것까지 확인하고는 마부석에 올라탔다.
영주의 성으로 가는 길은 한적했다. 널찍한 도로에는 물건을 운반하는 짐마차를 제외하고는 시선을 끌 만한 것이 없었다.
수지의 시선은 자연스레 도로의 주변으로 머물렀다. 하얗고 낡은 건물들. 저택이라고 하기엔 소박한 생김새의 주택들이 도로 주변으로 조약돌처럼 늘어서 있었다. 갈매기처럼 보이는 하얀 새가 그 위를 미끄러지듯 날아다녔고 부둣가에서 뿔 나팔 소리가 배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며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정말 다른 세상이구나.’
지나치는 건물과 선박에는 왕국을 알리는 인장의 깃발이 바닷바람을 따라서 이리저리 휘날렸다. 괜스레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를 찾을 수 있겠지?’
낯선 장소에 도착하더라도 겁먹지 말아야지. 수지는 새로운 생태계에 발 디딜 저를 다독이며 앞을 바라봤다.
도착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친 도로 사정으로 인해 딱딱한 마차 바닥에 몇 차례나 엉덩방아를 찧은 수지는 텔레비전에서만 봤던 커다란 갈색 성이 눈앞에서 존재를 과시하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감탄하고 말았다.
높은 탑들이 하늘을 찌를 것처럼 뻗어 있었다. 견고한 벽돌들이 담과 담을 이루며 내부를 안락하게 감쌌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탑과 성벽 주변에 엄격한 얼굴들로 경계를 서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