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무디스는 나가면 춥다고 망토 하나를 더 챙겨 주면서 빠르게 말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마라. 섣부른 행동을 나서서 해도 안 돼. 주인은 포악한 성품은 아니나 주위의 시선에 매우 민감한 자라 자신보다 아랫사람이 방에서 화제가 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수지는 명심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병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어둑한 공간마다 횃불이 켜진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깊어 보였다. 창고답게 지나치는 방마다 정체 모를 상자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일꾼들이 분주히 움직여 그것들을 운반했다. 옆에서는 그 물건을 나르기 위한 동물들이 오고 갔다.
그러던 와중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거대한 사슴이 수지를 빤히 쳐다보더니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일꾼이 사슴 등을 막대기로 후려쳤다.
“……!”
수지가 놀라서 굳자 무디스는 얼른 눈치를 주었다.
“뭐하냐, 얼른 따라와라.”
수지는 머뭇거렸으나 당장은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맞고 있는 사슴이 신경 쓰여 몇 번이고 뒤돌아본 그녀는 곧 병사들이 서 있는 문에 도착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먼저 시선을 끈 건 흰 천을 머리에 감고 있는 젊은 여성이었다. 여성은 활동이 편한 널찍한 바지를 입고 가슴이 깊게 파인 상의를 입었는데 큰 키라 그런지 상대적으로 더 커 보이는 느낌이 있었다. 마차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외국 상인 같은 분위기에 수지는 멈칫했다가 재빨리 무디스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여인이 아는 척을 해 왔다.
“왔어? 저번에 자네가 준 수면제는 별로였어. 불로 태우니 역한 향이 나더군. 효과는 좋은데 향기가 별로여서 두 번 다시 사용하고 싶지 않달까. 그 부분, 개선될 수 있는 거지?”
여자는 무디스를 보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일꾼들이 옮기는 커다란 조각상에 꽂혀 있었다. 일꾼들이 작은 실수라도 하면 날이 선 목소리가 쏟아졌다. 무디스는 그녀의 태도가 익숙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네. 향이 좋은 꽃잎을 추가해 넣겠습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그리고 조만간 수도 귀족 하나가 이 항구에 내려온다고 하거든? 그의 눈에 띌 만한 참신한 게 없을까? 제국에서도 인기가 증명된 거로 말이야.”
“정력제는 어떨까요.”
“정력제?”
주인이 그제야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보였다. 그녀는 무디스 쪽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피처럼 빨간 입술을 튕겼다.
“먹는 거야?”
“바르는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먹는 게 좀 더 효과가 빠를 겁니다.”
“흠. 좋아. 괜찮은데? 예쁘장한 계집 서넛을 붙여서 정력제를 선물하면 좋아서 눈이 뒤집히겠지? 중앙의 물자 공급망도 따낼 수 있을지도 몰라.”
여자는 벌써 그 일을 해낸 것처럼 턱을 치켜올렸다. 그 눈에는 야망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솔리나. 남쪽 항구의 주인이자 거대 무역 창고의 소유주인 그녀는 훨씬 기분이 나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이 목표한 대로 잘 풀리면 네 숙소를 새롭게 단장해 주지. 너만 좋다면 1층으로 자리를 옮겨도 돼. 더 넓은 공간을 치료실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
노예에게는 꽤 파격적인 대우란 듯이 자신만만하게 말했으나 무디스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제가 원한 게 그게 아니란 의미에서였다. 눈치를 살피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걸 받고 싶습니다. 갈수록 통증이 오는 주기가 빨라지고 있거든요. 아무래도 여분의 약이 더 있어야 주인님의 명도 수월히 받들고 약초 조합도 원활하게……”
“또 그 이야기야?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푸른 열매는 딱 세 개만 줄 수 있어. 그것도 감지덕지해야 한다고! 그게 얼마나 비싼 건데! 판매상이 가격을 올리겠다고 벼르고 있는 걸 간신히 붙들고 있단 말이야! 그걸 알면서 더 달라고 하는 거야?”
대꾸는 앙칼지게 날아들었다. 무디스는 그 모난 반응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숙였지만 그가 불만투성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건방진 노예 같으니라고. 솔리나는 속으로 욕을 했지만 겉으로는 으레 보이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네 편의를 나도 봐주고 싶어. 네가 무리한 요구를 할 때마다 되도록 들어주려고 한다는 걸 알잖아. 잊은 건 아니지? 난 이미 널 거둔 것만으로도 큰 위험을 감수했어. 나 같은 주인은 흔치 않아. 그러니까 자꾸만 들어줄 수 없는 걸 바라지 마. 거절하는 내 입장도 생각해야지.”
솔리나는 입가를 올리며 부드럽게 그를 다독였다. 징그러운 피부에 삐쩍 마른 몰골은 언제 봐도 재수 없었지만 무디스는 그녀에게 있어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다른 이들이 쉽게 만들 수 없는 약을 제조하는 노예.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원하는 값비싼 조합 약들을 만들어 내니 그녀의 입장에선 절대로 놓아주어선 안 되는 보물이었다. 솔리나는 따라서 늙고 고집스러운 제국의 치료사를 회유하려 했다.
“잘 생각해 봐. 1층을 네 치료실로 쓰는 거 말이야. 네 활동 공간도 넓어지는 거니까. 기분 전환이 되고 좋을 거야.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네 시중을 들 만한 노예 하나를 줄게. 조용하고 손이 빠른 녀석으로…….”
말을 이어 가던 솔리나는 일꾼들이 옮기는 새장을 보며 갑자기 소리 질렀다.
“잠깐만! 그 새가 왜 아직 거기 있는 거야? 어제 옮기라고 했을 텐데? 그 새가 어제 뭔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거야? 털가죽 창고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잡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더 말썽을 부리기 전에 얼른 가게로 옮겨!”
일꾼들이 사죄하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수지는 새장 속에서 익숙한 푸른 깃털을 발견하고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로난. 그동안 어디로 갔을까 궁금했었는데 저기 잡혀 있을 줄이야. 두 발이 묶인 채 부리와 눈이 천으로 꽁꽁 감긴 있는 새를 보자 가슴이 시큰해졌다. 그쪽으로 발이 절로 움직였다.
“아니, 이 새가 왜 이래……!”
수지의 기운을 느낀 걸까. 축 늘어져 있던 푸른 새가 갑자기 바르작거리며 요란하게 움직이자 새장을 놓칠 뻔한 일꾼이 신경질을 냈다. 그가 새장을 쾅쾅 두드리기 전에 수지가 그런 그의 등을 밀치며 로난의 앞에 섰다.
“뭐야? 비켜.”
일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으나 수지는 그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건 무디스였다. 무디스는 얼른 이쪽으로 오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수지는 새장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서 비켜서면 로난을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든 것이다. 창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는 수지에 솔리나의 시선이 움직였다. 수지는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이 새는.”
솔리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 새에요.”
무디스와 일꾼들이 황당해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반면 솔리나는 쏘아보듯이 수지를 응시했다.
무디스 옆에 있던 낯선 얼굴. 저번에 주워 온 노예다. 보지 않는 척 수지를 훑어봤던 솔리나는 얌전한 성품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갑자기 적극적으로 나선 모습이 불쾌하면서도 그것에 이상한 흥미가 생겼다. 따라서 느릿하게 물었다.
“네 새라고? 저 크고 말 더럽게 안 듣는 새가?”
“네. 제 새가 확실해요.”
“증명할 수 있어?”
솔리나의 눈빛이 거짓이면 가만 안 두겠다는 듯이 살벌하게 빛났다. 수지는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새장에 넣었다. 잠시 후, 수지의 손길에 자유를 얻은 파란 새는 애처롭게 울며 부리를 얼른 손등에 비벼 왔다. 보고 싶었다는 듯이 정겨운 동작이었다. 솔리나는 그 모습에 ‘정말이군’, 하며 짧게 중얼거렸다.
“그제 잡은 거야. 우리 창고 주변을 맴돌고 있었거든. 잡느라고 고생했지만 여기 보관해 두느라고 더 큰 고생을 했어. 희귀한 새라서 경매에 올리려고 했는데 말을 도통 안 듣더군. 길들여지지 않는 짐승은 선호되지 않거든. 그건 그냥 야만의 짐승일 뿐이니까. 그래서 죽여 동물 장식으로 팔려고 했는데.”
움찔하는 수지를 보면서 솔리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네 거라니? 널 찾아 그럼 우리 창고를 맴돌았다는 건가?”
“저, 저어…… 주인님.”
“더 놀라운 건 네가 외국 노예가 아니었단 거야. 무디스, 설마 알았어? 알면서도 내게 말 안 한 거야? 잡혀 온 노예 중에 특이 사항이 있으면 무조건 다 말하라고 했을 텐데.”
싸늘한 시선이 쏟아지자 무디스는 서둘러 대꾸했다.
“그, 그게 아직 회복 단계라서요. 조만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흠.”
그 말에 솔리나의 시선이 수지의 손등에 향했다.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아직 치료 중이라 내게 말 못 한 거라니. 이해할 수 있어. 근데 말이야.”
솔리나는 구두 소리를 내며 수지에게 걸어갔다. 그녀의 표정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기분이 안 좋아. 노예로 잡힌 주제에 내 물건에 대해서 제 것이라고 소유권을 당당히 외치는 모습이!”
버릇을 고쳐 줘야지! 그런 생각으로 한 손을 쳐들어 수지의 뺨을 갈기려던 그녀였다. 하지만 수지가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움츠린 것과 별개로, 솔리나는 그다음 동작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갑자기 사슴 한 마리가 달려와 그들 사이에 끼어들고 만 것이다.
“뭐, 뭐야.”
솔리나가 기막혀 말을 더듬었다. 저리 꺼지라고 손을 휘저었지만 사슴은 겁먹기는커녕 저를 되레 노려보는 게 아닌가. 초식 동물 주제에 저렇게 서늘한 눈빛을 낼 수 있다니. 철렁하면서도 짜증이 일었다. 곧 병사들이 다가오자 솔리나는 사슴을 끌고 가라고 외쳤다.
“이 녀석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그러나 병사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에도 사슴은 낑낑거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무기를 꺼내 들어 찌르려고 하자 수지는 당황해서 얼른 사슴의 몸을 토닥였다. 그제야 사슴은 느릿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기이한 행동을 해 놓고 여상하게도.
“……너, 정체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