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그는 지쳤다는 듯이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한차례 병증을 겪었기 때문인가, 몹시도 고단해 보였다. 그를 건드리지 않은 채 수지는 조용히 탁자 앞에 앉았다. 생각보다 훨씬, 렉스의 존재가 이 나라에서 거대해 보였다.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니. 왕국의 고위층들이 얼마나 그를 아낄지 상상이 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렉스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거 같은데.’
수지는 그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다. 모든 걸 다 뒤로한 채 자신과 늪지에 남으려고 했던 남자. 그의 마음속엔 어떤 감정과 생각이 머무르고 있을까.
그가 자신과 살고 싶어 한다는 건 좋고 기뻤다. 그와 별개로 전쟁 사령관을 원하는 수많은 기사와 추적자가 따라온다고 생각하면 걱정이 앞섰다. 그걸 막으려다가 그가 다친다면? 저번처럼 숨이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안 돼.’
수지는 몸서리치듯 약초를 쥔 손에 힘을 꾹 주고 말았다. 그 탓에 약초 줄기가 소리를 내며 부러지자 선잠이 든 무디스가 깨어났다.
“으응? 뭐 하는 거야! 그건 상하면 안 되는 거니까 각별하게 조심해! 어떤 건 우린 몸값보다 비싼 거야! 망가지면 주인의 불호령은 물론이고 며칠 동안 물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없어!”
수지는 딴생각을 멈췄다. 어차피 여길 벗어나 렉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해결될 문제였다.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하루가 지났다. 잠을 설치며 어떻게 도망갈까 궁리하던 수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무언가를 조심스레 매만지는 무디스를 발견했다. 그는 그녀가 일어난 것에 눈을 힐끗 돌리며 아는 체를 해 왔다.
“일어났냐. 잠을 못 잔 얼굴인데. 얼른 세수하고 와서 도와라.”
씻고 오자 열매 같은 것을 커다란 냄비에 넣고 끓이려는 무디스가 보였다. 수지는 가까이 다가갔다가 깜짝 놀랐다.
“이건…….”
“이게 바로 내 몸을 정화하는 열매다. 흔치 않은 나무에서 나는 열매지. 일반 상점에서는 구할 수도 없어. 비싼 값을 줘야 주문을 받으니까. 주인이 매번 생색내면서 하루에 세 알만 공급해 준다고.”
“늪지에선 많이 자라지 않나요?”
무심코 묻고야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애지중지하며 그릇에 넣는 열매는 렉스가 다듬던 푸른 열매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무에서 다발로 따 왔었는데. 그래서 물었으나 무디스의 미간은 말도 안 된다는 것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늪지가 어디 흔하냐? 항구 주변을 다 뒤져도 그럴싸한 물웅덩이 하나 발견하기 어려울 거다. 물론 왕국의 그 버려진 섬인가 저주받은 늪인가 가면 다르겠지만. 설마 거길 말하는 건 아니겠지?”
농담처럼 되묻는 말에 수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디스는 전기 충격을 맞은 것처럼 굳었다.
“뭐? 거기라고? 진짜 거길 말하는 거야?”
“네. 거기에서 많이 봤었거든요. 마법의 가루도 그 열매랑 섞어서 만들었는데…….”
“그걸 섞었어? 하. 그래서 네 능력이 글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좋은 거군. 통역을 위한 마법의 가루를 사용해 봤자 보통은 한 가지 언어를 통역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해. 가루 가공도 간단하고. 근데 너는 읽을 수 있기까지 하니까, 수십 명이 달라붙어서 몇 달을 가공해야 성공할 양을 쓴 거지. 늪지에서 네가 그런 대접을 받았다니. 늪지의 공주냐, 뭐냐.”
“아니……. 절대 그런 사람은 아니고 그냥 늪지에서 살았어요. 가공은 다른 사람이, 남자 한 명이 했고요.”
무디스는 콧등을 왈칵 구겼다. 그 모습이 마치 늪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의 등짝처럼 친숙했다.
“한 놈이 그걸 했어? 열매를 따다가 가공을 혼자 했다고? 널 위해서? 하. 대단한 녀석일세.”
그러고는 무척 놀랐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보통 놈이 아니야. 그런 녀석은 조심해. 좋은 쪽이라지만 무척 위험한 근성이 있는 자니까. 함께 있으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약초에 문외한인 수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치료사인 무디스 입장에선 푸른 열매를 개인이 가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푸른 열매는 워낙 단단하고 그만큼 형태가 쉽게 변하질 않아서 그도 끓여 먹는 형태로만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늪지라. 그래서 네가 침착한 거였군. 낯선 곳에 끌려와도 엉엉 울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 괴악한 땅에서 왔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지. 듣기론 거기엔 온갖 괴물들이 열 발자국도 못 가 튀어나온다며? 대륙에선 흔히 볼 수 없는 귀한 약재들도 무성히 자란다고 들었다. 그런 괴상하고 신비한 곳에서 살았다니. 너도 생각보다 근성이 있는 자로군.”
무디스는 새롭다는 듯이 수지를 바라보았다. 그 늪지 출신이라면 마도 시대를 모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갈 테니까. 무디스는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네가 늪지에서 왔다고 하면 주인은 기막혀할 거야. 어떻게 써먹을지 고민하겠지. 좋은 일은 아니야. 네게 말이야. 특이한 출신이라는 건 항상 부작용이 있어서…….”
자신의 경우를 떠올리며 무심히 중얼거린 무디스는 수지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하고 말았다. 그 짧은 마주침의 순간. 커다란 눈동자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나고 싶어 하는 그녀의 애절한 심정이 읽혔다고나 할까?
‘곤란하군.’
하필 저런 눈이라니. 무디스는 만신창이인 몸으로 제국에서 도망쳐 왕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던 날을 떠올렸다. 모국을 뒤로 한 채 낯선 땅, 그것도 적국에서 어떻게든 삶의 작은 희망이라도 찾고 싶어 했던 순간을 말이다.
‘별게 다 기억나는군.’
코끝을 스치는 차가운 바닷바람에 눈가가 시려 눈물이 나왔던 때를 떠올리며 무디스는 괜히 눈을 비볐다. 머뭇거리던 그는 이윽고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 너에 대한 건 하나도 모른다고 하겠다. 어차피 내 일도 아니고 내 알 바도 아니니까. 네 앞가림은 네가 알아서 해야 할 거야.”
“감사합니다.”
툭 던지는 말투에서 배려를 느낀 수지는 진심을 다해 머리를 숙였다. 그 인사에 쑥스러워진 무디스는 그만하라는 듯이 손을 거칠게 휘젓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게 뭐라고 저리 좋아하는 걸까. 도망치게 도와준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네가 어디서 왔는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인데. 작은 배려에도 행복해하는 모습에 무디스는 메말랐던 감성이 촉촉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몸을 돌린 채로도 수지를 힐끔거리던 그는 우연히 수지의 손등에 시선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붕대를 갈 때가 되었군. 이리 와 봐.”
다가가자 그가 새 붕대를 꺼냈다. 상처는 많이 아물어 있었다. 무디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낫고 있구나. 일주일이면 완전히 나을 거야. 딱지는 저절로 떨어질 거고. 약간 상처가 남겠지만 감염되어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지. 근데 표정이 좋지 못하구나. 누르면 아프기라도 한 거냐?”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상처가 남아 있어서…….”
“응? 이 정도면 많이 좋아진 거다. 처음 봤을 땐 보기 흉할 정도로 피부가 짓물렀었어. 감염되기 일보 직전이었지. 뼈가 상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밖에…….”
그러나 수지에게는 그의 설명이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왜 절로 상처가 낫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만이 가득했다. 어쩐지 손등이 불편하다 했다. 분명 시간이 지날 만큼 지났는데, 평소대로라면 깨끗한 피부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능력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이게 뭐란 말인가.
‘능력이 없어져?’
무심코 생각을 이어 가던 수지는 섬을 빠져나올 때 경험했던 현기증을 떠올렸다. 이상하다 싶었는데. 설마 그게 몸에서 회복 능력이 빠져나간다는 신호였을까?
‘정확히 말하면.’
몸의 시계가 멈춰 있어 회복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섬을 빠져나오면서 다시 신체의 시계가 원래대로 흐르게 된 것이고 그래서 상처가 빠르게 낫지 않는 것 같았다. 즉 예전처럼 평범한 인간이 되었다는 소리였다.
‘그 말은 이젠 다치는 걸 조심해야 한다는 건가?’
다치면 불구가 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몹시도 아쉬웠다. 렉스를 찾을 때까진 몸의 시계가 멈춘 편이 더 좋았을 텐데. 잡힌 처지인지라 더더욱 그런 능력이 절실해지는 수지였다.
시간은 속도 모르고 흘러갔다. 탈출 방법을 찾지 못한 채로 일주일이 금세 지나갔다. 무디스를 돕는 일이 익숙해졌지만 그만큼 수지의 시선도 욕조 너머의 창에 머무르는 일이 잦아졌다.
어떻게 해야 달아날 수 있을까. 수지는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진 작은 방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무디스가 간혹 나가서 바깥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 왔지만 사교성이 좋지 않은 그라서 전달하는 소식은 기껏해야 오늘 저녁 메뉴라든지, 주인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정도였다.
갈수록 침울해하는 수지를 보면서 무디스는 아껴 놓은 달콤한 과자를 실수인 척 꺼내 준다든지 그녀가 읽을 만한 책을 슬며시 탁자에 펴 놓는다든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기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그녀가 활기를 띠는 순간은 늪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뿐이었다. 무디스는 늪지에 관해서 자주 물었다. 처음엔 밝은 모습이 좋아서 물은 거지만 듣다 보니 등장하는 괴물들과 식물들이 학자로서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치료사로서의 탐구심을 충족시킨 것이다. 푸른 열매를 남자가 어떻게 가공했는지를 들으면서는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기까지 했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그런 식으로 늪지에서 가공을 했다니! 끈질긴 인내심이 뭔지 아는 자야.”
수지는 그의 칭찬을 들으면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한창 청춘이구나, 하면서 무디스는 혀를 찼지만 그 뒤로도 남자 이야기를 일부러 꺼내 묻고는 하였다.
그렇게 작은 방에서 도란도란 담화의 꽃이 피었을 때, 병사 하나가 문을 사납게 두드렸다. 주인이 저녁을 먹기 전 무디스와 수지를 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