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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81)화 (81/163)

81화

“후우.”

수지는 긴 한숨부터 토해 냈다. 팔다리가 납덩이를 단 것처럼 늘어졌고 긴 머리카락이 젖은 해초처럼 느껴져 거슬렸다. 어릿거리는 시야를 간신히 붙든 채로 연안의 흔들리는 부표를 붙잡아 사람들이 없는 항구의 계단으로 올라선 그녀는 땅바닥을 밟자마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미안. 못 걷겠어.”

로난이 위험하다는 듯이 울었으나 일어날 수가 없었다. 파도라는 겹겹이 육중한 담요에 몸이 깔려 있다가 나온 것만 같았다.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수지는 가느다란 숨만을 뱉어 냈다.

마음속이 분주했다. 할 일이 떠올랐다. 헤어진 루지와 파루를 찾아내야 한다. 파도에 떠밀려 간 그들이 과연 무사할지. 아픈 파루를 데리고 루지가 항구에 도착했을지 걱정되었다.

도망도 가야 한다. 바갈은 끈질긴 해적이었다. 근성인지 집념인지 모를 것이 그의 눈에 독기처럼 맺혀 있었다. 잡히면 끔찍한 일을 당할 거라는 것은 안 봐도 뻔한 일. 죽기 살기로 도망가야 그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왕성으로 가야 한다. 수지는 이 험한 바다를 건너온 단 하나의 이유를 떠올렸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에 대한 생각은 잦아지고 걱정은 커졌다. 자신보다 몇 배나 강한 상대를 근심하다니. 누가 보면 우습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순진한 데가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에 얼이 나간 듯 행동하던 것만 봐도 그렇다. 그는 누군가의 온기가 분명 필요한 사람이었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지도.’

수지는 제 목을 붙잡은 채로 달콤한 말을 속삭거리던 그를 떠올렸다. 전혀 편치 않은 행동인데도 그가 하면 괜찮았다. 잡힐 만했다. 그러다 곧 이런 생각을 한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얼굴을 붉혔다. 그가 그렇게 좋을까? 제게 묻기에도 어딘가 민망한 질문이었다.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처음이라서 모든 게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때 로난이 유난스럽게 울어 왔다. 가물거리는 시야를 움직였다. 얼른 일어나라고 날갯짓을 하는 것이 고맙고 미안했다. 수지는 꺼져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쉬었다가.”

……일어날게. 그러나 차마 끝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뜬 건 하루가 지나서였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녹슨 천장이었다. 버린 금속을 재활용한 듯이 납빛의 철근 구조가 사선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저런 식으로 건물을 지을 수도 있구나. 신기해하던 와중 바닥에 쇠가 끌리는 불편한 소리가 났다.

“……응? 일어났군.”

사내는 놀라울 정도로 하얀빛이었다. 흰 물감을 뒤집어쓴 듯한 외양은 자연적이라기보다 인위적이어서 수지는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사내는 성가신 눈초리로 저를 보며 손에 든 작은 병을 흔들었다. 그 태도가 무심해 보였다. 나이는 40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창백한 피부와 마른 체형에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내 사내가 뼈다귀 같은 팔을 들었다.

“마셔.”

수지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먹으라고.”

그는 그녀 옆쪽에 놓인 컵을 들어 마시는 시늉을 했다.

“상처가 문드러져 죽지 않으려면 다 먹어야 해.”

수지는 그제야 제 손에 감겨 있는 새 붕대를 발견했다. 오래된 것 같았지만 깨끗했고 약물에 담근 듯이 향긋한 풀 냄새가 난다. 손등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아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됐다는 듯이 한 손을 저었다.

“고마워할 거 없어. 명을 받은 거니까. 널 죽여서 처리하는 비용보다 살려서 써먹는 비용이 주인 입장에선 더 나았겠지.”

주인이라니.

‘설마…….’

바갈을 떠올리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수지였다. 먹기가 망설여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겁이 난 눈으로 컵만 쳐다보고 있자 남자가 삐죽한 입가로 웃었다.

“독약 같나? 안 먹고 싶다면 좋을 대로 해. 어차피 네가 죽어도 나에겐 별 영향이 없으니까. 시체를 치우나 병자를 치료하나. 그게 그거 아니겠어?”

남자는 비뚤어진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세상사에 시달릴 대로 시달렸다는 듯이 어딘가 지친 눈빛을 보면서 수지는 어째야 하나 망설였다. 드러난 피부가 온통 하얀 것과 달리 그의 눈은 맑은 가을 하늘처럼 파랬다. 그 익숙한 색이 싫지 않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혹시 푸른 새를 보셨어요?”

수지의 질문에 남자는 무척이나 놀란 얼굴이었다.

“말을 못 할 줄 알았는데. 입고 있는 옷이 이상해서 외국에서 도망친 노예 같다고 주인이 말했었거든? 근데 아니군. 정확히 왕국 언어를 쓰는 걸 봐선 왕국 사람 같은데 어쩌다 이 남부 항구에 도망 노예처럼 쓰러져 있었지?”

수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는 한층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네가 발견되고 오래되지 않아 젊은 여자를 찾는다고 해적 하나가 방문했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응접실에 울려 퍼지는 발소리가 사납더군. 그는 자기 소유의 여자가 자신을 모욕하고 배를 부순 뒤 달아났다고 했어. 파란 새를 데리고 다닌다며. 그런 여자를 찾아 주면 아주 후하게 사례를 하겠다고.”

“…….”

“딱 보니 그 여자가 자네 같은데.”

당연히 수지의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다. 경직된 채로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는 수지를 보면서 남자는 곧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 일이 아니란 눈빛 같았다.

“뭐, 나야 상관없지. 주인이 데려오면 묻지도 않고 치료하는 게 내 일이거든. 자네가 누구인지 왕녀인지 노예인지 알 게 뭐야. 어차피 주인도 해적 따위와 조금도 엮이고 싶지 않다고 당장에 그를 쫓아냈으니까. 자네만 얌전히 고개 숙이고 있으면 여기 있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수지는 무의식적으로 크게 안도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면서 남자는 흥미가 돋은 눈을 했다. 치료하면서 느낀 거지만 여자는 귀족 여인들처럼 순결한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지저분한 몰골에 주인은 그녀가 노예가 틀림없다고 말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노예들은 몸에 상처가 많고 손발이 보통 지저분했다. 손톱 발톱이 깨끗한 수지는 이와 정반대였다.

‘타국의 귀족 아가씨인가?’

종종 헛된 꿈을 찾아 결혼의 의무를 피해 도망치는 아가씨들이 있었다. 그런 철부지들은 보통 바다를 건너려고 해적과 모종의 계약을 할 때가 있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래서 수지도 그런 경우인가 했다. 사내는 그녀를 가느다란 눈으로 살피면서 말했다.

“어쨌든 자네 질문에 답하자면 새는 보지 못했어. 자네는 혼자였지. 축 늘어져서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자고 있었다고 하더군. 주인이 데려오지 않았으면 험한 일을 당했을 거야. 늦은 밤엔 술꾼이나 범죄자가 돌아다니거든. 전쟁이 길어진 후로는 굶주린 거지들도 많아졌는데 그들도 난폭하게 행인을 습격하곤 하지. 배를 오래 곯으면 폭력적으로 변하니까.”

남자는 수지에게 옷 한 벌을 건넸다. 수지는 얼떨결에 그 옷을 받았다. 남자는 정 없이 딱딱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씻고 입어. 물은 저쪽 복도 끝 방에서 얻을 수 있어. 소금기로 치료실 바닥이 버석거리는 건 딱 질색이니까 깨끗하게 몸을 닦으라고. 옷을 입고 돌아오면 자네가 할 일을 말해 주지.”

수지는 그의 말을 따랐다. 어두운 복도를 따라 물이 나오는 욕조에 도착한 수지는 반지하에 난 것만 같은 작은 창을 발견했다. 새벽이 오는 듯 하늘은 온통 창백한 푸른빛이었다. 그 어슴푸레한 빛깔에 가슴이 시려 왔다. 낯선 장소에 또 예기치 않게 도착했기 때문일까. 자신은 대체 어디로 휘말려 가는 것일까.

앞날을 한 치도 예상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수지는 붕대 감긴 손이 젖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닦아 나갔다.

낯선 장소에서 몸을 씻는 만큼 소극적인 자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옷을 준 사람이 남자인 것도 좀 더 조심스러워지는 이유였으나 수지는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열심히 탁자에서 무언가를 조합하는 남자는 발목에 긴 쇠사슬을 매달고 있었다. 쇠사슬은 움직일 때마다 쩌렁쩌렁 울었고, 그가 어디를 가는지를 생생하게 알려 주었다. 아마도 그가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도구인 것 같았다. 사슬의 무게에 오랫동안 짓눌려 발목 주변에 피딱지가 앉은 것을 보며 왠지 가슴이 착잡해질 때 남자가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좋아, 이제야 바닷물 냄새가 안 나는군. 근데 왜 굳어 있어? 어서 이리 와.”

수지가 조심스레 다가가자 사내는 그녀에게 말린 약초들을 내밀었다. 훅 하고 진한 향들이 뿜어져 올라왔다. 사내는 그것들을 묶는 끈을 가리켰다.

“이걸 한 줌씩 묶어서 저 종이에 싸 놔.”

“아, 네.”

“해가 뜨기 전까지 끝내 놔야 해. 어제 널 치료하느라고 못 했으니까.”

수지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고분고분한 그녀가 의외라는 듯이 쳐다보고는 이내 획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난 이만 자러 가야겠어.”

“…….”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주인은 다친 노예에겐 관대해도 도망친 노예에게는 그렇지 않으니까.”

수지는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게 많다. 그러나 그는 그럴 여유를 주지 않고 쇠사슬을 끌며 들어가 버렸다. 마치 이런 일에는 진력이 났다는 듯이. 이윽고 문 잠그는 소리가 이어지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약초로 손을 뻗어야 했다.

그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났다. 그때까지 일만 하던 수지는 일어난 그가 마른 빵과 수프를 챙겨 주자 허겁지겁 먹고야 말았다.

수지가 먹는 것을 잠깐 지켜보던 남자는 수지가 일을 끝낸 탁자로 고개를 돌렸다. 제법 마감 솜씨가 꼼꼼했다. 단단하게 감긴 끈도 그렇지만 수북이 쌓인 양을 봐도 그녀가 성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인심 썼다는 듯이 제가 먹으려던 말린 과일 한 쪽을 내밀었다. 수지는 그걸 받아 얌전히 씹어 먹었다. 남자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차분하고 침착해. 근래에 잡힌 노예 중에서는 가장 행실이 맘에 드는 여자였다.

‘그래 봤자 잡힌 신세지만.’

사내는 시큰둥하게 새로 다듬을 약초로 눈을 돌렸다.

“당분간 내 일을 돕게 될 거야. 손이 나을 때까진 내 소속이라고 했거든.”

“그 뒤는요?”

“주인의 일을 돕게 되겠지. 항구는 일이 많아. 어린 노예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전쟁 중이라 많은 물자가 오고 가는 만큼 말 잘 듣는 너 같은 노예가 더욱 긴요할 거다.”

“일이라면 부둣가의 일이요? 하, 하지만 전 노예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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