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네? 무, 물론 그렇겠지만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왕국의 처지에서 생각한 겁니다. 실패했을 때의 위험이 너무 커서요!”
“위험이라.”
왕자는 잔을 흔들었다. 핏빛 물이 출렁거렸다. 그 속에 시선을 맞춘 왕자는 마치 그 진한 물속에서 세상을 흘러가게 하는 이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위험은 렉스를 만들 때 이미 감수했어. 생각해 봐. 왕국이 마나 인간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소모했는지. 목숨과 자원, 연금술과 권력. 그 모든 것이 발명이란 이름으로 사라졌지. 그 엄청난 희생 뒤에 마나 인간이란 그럴싸한 존재가 탄생한 거야.”
로리엔은 주먹을 꽉 쥐었다. 확고한 어조 뒤에는 확고한 결단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미 왕자를 설득하기에는 늦었다. 그는 모든 결정을 내린 후였다. 그래서인지 더 가라앉은 소리로 로리엔을 위로하듯이 말하고 있었다.
“물론 성급한 결단일 수 있어. 자네 말대로 렉스가 우리를 공격하는 악인이 될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걸 두려워해선 안 돼. 그러면 전쟁에서 지게 될 거야. 그리고 전쟁에서 졌을 때의 비용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하겠지. 사령관이 잘못되면 발생할 비용보다 더.”
“…….”
“왜 전쟁에서 이기려고 하는지 아나? 많은 땅덩어리를 차지하려고? 강력한 군주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주변국에서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아니야. 파산하지 않기 위해서야. 패배국이 전쟁 비용을 독식하게 될 거란 걸 알고 있지 않나. 제국도 그걸 알고 있어서 서둘러 전쟁을 끝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지. 길고 긴 전쟁은 두 나라의 재정을 빚더미로 만들었어. 그 비용을 누가 감당하느냐는 전쟁의 승패가 판가름할 거야.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제국에 뒤처지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해.”
“저, 전하…….”
“우린 정말 전쟁의 끝에 와 있어. 물러나면 안 되는 순간에.”
왕자의 눈이 암담하게 빛났다. 로리엔은 탄식하며 침을 삼켰다. 지금의 렉스를 잃을 생각을 하니 너무나도 슬프고 착잡했다. 얼마나 아끼며 애지중지한 사람인데. 지금 같은 사이가 되기까지 노력했던 것을 떠올리면 더더욱 왕자의 결정이 잔혹하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괴로운 심정을 보여 주듯이 두 눈을 감았다. 그런 로리엔을 향해 왕자가 말했다.
“그가 기억을 잃으면 슬플 거라고 했지? 그건 자네가 낭만을 갖고 있어서 그래.”
“…….”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라고 하지만 자네는 지금의 렉스가 사라지는 게 싫은 거야. 렉스 사령관이 이 왕국 내에서 그나마 자네의 말은 잘 듣고 따르니까. 그게 몹시 좋았겠지.”
로리엔은 손톱이 살에 박히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간파당한 것이 부끄러웠지만 왕자의 결정이 위험하다는 건 진심이었다. 울컥해서 입을 열려는 그녀를 보면서 왕자는 진정하란 듯이 손을 저었다.
“꾸짖는 게 아니야. 단지 자네는 그를 좋아하기 때문에 냉혹하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뜻이었어. 낭만은 연금술사에게 어울리지 않지. 하지만 그의 연락책엔 필요하니까, 지금 같은 태도를 유지하도록 해. 새로운 사령관은 더욱 무정할 테고 그런 그를 더 마음을 다해 챙겨야 할 테니까.”
로리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쓰린 눈으로 바닥을 내려보고 있던 그녀가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한 건 그때였다.
“그래서, 늪지로 기사들을 보내신 건가요? 냉혹하게 판단하셔서…….”
어쩐지 비난의 어조가 느껴지는 질문이었지만 왕자는 개의치 않아 하며 활짝 웃었다.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하고 대꾸하는 앤드루는 확실히 뻔뻔함이 남달랐다. 로리엔은 낮아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렉스의 상처에서 잔해를 찾았습니다. 왕국에서 개발 중인 폭탄이더군요. 왕자 전하께서 친히 명령하신 거라고 개발부에서 들었습니다.”
로리엔은 감정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절 믿지 못하셔서 보냈다는 거 압니다. 수석 연금술사인 것과 별개로 사람 관리를 못한다고 보시니 직속 기사들을 따로 보내신 거겠죠. 하지만 저는 폐하께서 허락해 주셨기 때문에 렉스의 연락책이 된 것입니다. 마냥 자원해서가 아니라 제게도 분명한 임무 수행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런, 로리엔.”
울먹이는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앤드루 왕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로리엔은 눈물로 얼룩진 눈을 들었다. 왕자는 측은하다는 듯이 그녀의 볼을 한 손으로 쓸어 주었다. 여자들이 껌벅 죽는 다정한 미소에 마음이 조금 진정될 때, 왕자의 조용한 어조가 뒤따랐다.
“자네를 못 믿어서가 아니야. 나는 아바마마께서 자네를 수석 연금술사로 지목했을 때부터 응원했던 사람이라고. 내가 기사들을 늪지로 따로 보낸 건 자네의 임무를 방해하거나 감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어. 오히려 자네를 돕고 싶어서였지.”
“네? 그게 무슨…….”
“렉스 사령관이 늪지에서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 말이야. 무언가 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게 있었을 거라고 판단해 그게 무엇이든 제거하라고 보낸 거야. 사령관의 귀환은 어디까지나 자네의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 뒀지. 물론 그렇게 실패할 줄 알았으면 자네와 처음부터 협력하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도 들지만. 뭐. 이미 늦었지.”
왕자는 입맛이 쓰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가벼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내 기사들은 살아남았어. 사령관의 상태가 안 좋았기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모두 죽었을 거야. 아. 살아남은 자들은 조만간 자네에게 보낼게.”
“네?”
로리엔이 눈을 크게 떴다. 왕자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그들 말이야. 많이 다쳤거든. 이대로는 내 수하 구실을 못 할 테니 회생할 다른 기회라도 줘 보게.”
“마나 기사로 바꾸길 원하신다는 건가요?”
로리엔의 질문에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길 본인들도 바라니까. 그들은 마나 기사로 변해서도 여전히 내 직속 수하들이 될 거야. 렉스 사령관을 향한 원한이 대단하니까. 마나 주입이 성공하면 되도록 사령관과 부딪치지 않도록 하는 게 좋겠어.”
로리엔은 무심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또 한 무리의 마나 인간이 늘어난다는 소식은 착잡한 그녀의 마음에 어떠한 파문도 만들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새로운 렉스를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길들여야 할지로 꽉 차 있었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더 애틋한 관계가 되고 싶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를 처음부터 자신이 교육해서 빚어내면 되지 않을까. 제가 없으면 안 되는 사내로 말이다. 로리엔은 새로운 목표에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왕자는 단호해진 그 얼굴을 보며 눈빛에 이채를 띠었다.
“결정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다만 이번엔 그가 눈을 뜬 순간부터 제가 모든 걸 주도해서 가르치고 싶습니다.”
로리엔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 최선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를 이전보다 더 잘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요.”
“응? 자넨 이미 우리 왕국의 수석 연금술사야. 당연히 모든 과정을 주도해 그를 관리하게 될 거야.”
왕자는 헤픈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다정하다기보다 약간 상대를 비웃는 듯한 기색에 가까웠지만 로리엔은 딴생각을 하느라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새 사령관을 상상하느라 바쁜 그녀를 보면서 은근하게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번 위기도 잘 헤쳐 나갈 테니까 걱정 마. 오늘 내 약혼식인 거 특히 잊지 않았겠지? 우리 왕국이 자랑하는 수석 연금술사가 웃어 줘야 손님들도 안심이 될 테니 억지로라도 웃으라고. 모든 게 잘 되고 있다는 듯이.”
진한 향수. 그 독한 향기처럼 왕자는 상대를 잠식한다. 제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로리엔은 그의 결정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이 비참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과감한 결단력과 실행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끝내려면 자신 같은 이가 아니라 그와 같은 강력한 행동가가 필요할 테니까. 착잡해지려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좋아, 다시 가 볼 때가 됐군.”
어느새 시종이 들어와 왕자에게 새 예복을 건네고 있었다. 새 제복을 입은 그는 번듯한 새신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가다듬었다. 여자들이 보고 반할 근사한 자태가 금세 완성되었다.
“알겠지만 오늘 자넬 부른 건 비밀이야. 제국의 첩자들도 기웃거리는 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티 낼 수는 없으니까. 렉스 사령관은 멀리서 임무 수행 중인 것으로 하자고. 그가 사람들 앞에 사령관으로 다시 나설 때까진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네.”
왕자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웃어, 로리엔.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듯이. 그래야 사람들이 모두 그걸 믿을 테니까.”
로리엔은 허락이라도 맡듯이 좌우 입꼬리를 양껏 올려 보았다. 왕자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곤 나갔다. 방에는 그녀 혼자였다.
“새로운 사령관이라…….”
술잔을 한참을 바라보던 로리엔은 이내 결심을 굳히며 술잔을 들어 삼켰다. 독한 술이 그녀의 목구멍을 쓸고 내려갔다. 가슴속에 남아 있던 한 줌의 낭만이 그에 휩쓸리며 뚜렷한 욕망으로 변화했다. 새 사령관은 그녀가 좌지우지하게 될 거다. 몸과 마음 모두.
“좋아.”
그녀는 비장하게 눈을 빛내며 술잔을 내려놓고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귀족 청년들과 춤을 추고 귀부인들과 수다도 떨었다. 독한 술도 마셨으며 과장된 포부도 늘어놓았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경쾌한 웃음소리가 멀리 번져 나가는 것을 보면서 왕자는 미소 지었다. 역시, 알기 쉬운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