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로리엔은 머지않아 그들과 헤어져야 했다. 왕이 그녀를 부른다고 시종을 보내온 것이다. 양해를 구하고 물러나 경직된 얼굴을 매만졌다. 왕을 만나는데 이렇게 작위적인 얼굴로 갈 수는 없었다. 입 근육을 움직여 부드럽게 피는 동안 시종은 계단을 올라 어두운 복도로 안내했다.
“응? 여기에 계신다고?”
이곳은 왕이 거주하는 깊은 내궁이 아니다. 왕성에 초대한 손님들이 지내는 곳이다. 의아해하는 로리엔에게 시중은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왕가를 수호하는 인장이 박힌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방문을 지키며 서 있었다. 로리엔은 직감적으로 그 안에 누가 있는지 알아차렸다.
“아, 좋아요! 더, 더 쑤셔 주세요! 아, 아앙-! 거기! 너, 너어무우 좋아!”
문밖으로 빠져나오는 원색적인 소리에 낯이 뜨겁다. 연회가 열리는 한낮에 손님들이 머무는 방에서 이런 대담한 짓을 할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이내 절정으로 치달아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최고야! 으흥, 왕자님!”
퍼억, 퍼억. 살을 꿰뚫는 소리가 험상궂다. 로리엔은 나중에 와야 하는 걸까,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
“아아-! 왕자 전하아-!”
잠시 후.
조용해진 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숄을 걸친 여인 하나가 빠져나왔다.
“응?”
문밖에 누가 있을 줄 몰랐는지 여인이 눈을 크게 떴다. 땀으로 번진 화장이 야하게 보이는 여자는 뜻밖에도 로리엔이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왕국의 하나뿐인 공녀이자 우아한 자태로 유명한 란드 공작의 딸이 아닌가. 놀라서 굳어 있는 그녀의 귀에 새초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 주시겠어요?”
그러고 보니 길을 막고 있었다. 얼른 옆으로 비켜서자 여인은 정사로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로리엔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그 모습이 매우 오만하면서도 뻔뻔했다. 살피는 눈초리는 마치 네가 다음 상대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왕국의 하나밖에 없는 공녀로 추앙받는 삶을 살아온 공녀에게는 어두운 낯빛으로 굳어 있는 로리엔의 모습이 자신감이 없어 위축된 것처럼 보였다. 저런 목석같은 여자 따윈 내 상대가 안 되지. 공녀는 콧바람을 흥 내뿜고는 도도한 걸음걸이로 사라졌다. 로리엔은 그 멀어지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서 와, 로리엔.”
방에 들어가자 이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남자가 보인다. 약혼식을 위해 공들여 제작된 흰 제복이 한껏 구겨져 있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왕자는 환히 드러난 앞가슴을 보란 듯이 로리엔 쪽으로 돌렸다. 거칠고 앙칼졌던 정사의 흔적을 보여 주듯 그의 목과 가슴에는 손톱자국이 입술 자국만큼 잔뜩 남아 있었다.
‘저래도 되는 거야?’
왕자 몸에 상처를 남기다니. 로리엔이 생경한 충격을 받았을 때 왕자가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설명했다.
“이거? 공녀가 남긴 거야. 예상했지만 훨씬 더 야성적이더군. 얌전한 척하다가 갑자기 달려드는데, 나도 놀랐어. 이렇게 사납게 몸에 부딪쳐 올 줄은 몰랐거든. 한 마리 발정 난 암고양이 같더군.”
왕자는 키득거렸다. 은빛 머리를 한 손으로 여유롭게 넘기면서 다른 손으로 유리잔에 술을 따르고 있는 그는 부끄러움도 민망함도 전혀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양해를 구하듯 술잔을 들었다.
“목이 타서 말이야.”
왕자는 작은 잔을 들어 연거푸 마셨다. 다 마시고 카, 소리를 내는 것이 고귀한 신분답지 않게 털털했다. 마치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길 원한다는 듯이 몇 차례나 소리를 내어 삼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젤 공녀. 자네도 얼굴 알지? 약혼식 전에 나를 불러내더군. 그동안 그렇게 튕기더니만, 갑자기 내가 약혼한다고 하니 아쉬워졌다나? 역시 왕국의 하나뿐인 공녀다워. 까다로우면서 제멋대로인 게 딱 제 아버지 같지. 란드 공작은 정책을 내면 그에 호응하다가도 마지막엔 딴지를 걸며 반대 의견을 내거든. 아나? 정말 상대하기 힘든 부녀지간이야.”
왕자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신나서 떠들었다. 딱히 변명으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그저 이런 사실 관계가 있다고 설명하는 것일 뿐.
로리엔은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왕자에게 약혼식을 올린 날 다른 여자랑 정사를 하면 안 된다는 도덕성 짙은 설교를 할 의도도 없었다. 그걸 모르는 바보도 아니고 신경 쓰며 전전긍긍할 자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대담하게 불륜을 저지르고도 그 안에서 제가 바라는 목적을 이뤄 내 최후에 웃는,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인이자 실리 추구형 권력자였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마에뜨가 불쌍했다. 지금도 타국의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열심히 웃으면서 비위를 맞춰 주고 있을 텐데. 로리엔은 그녀를 만나면 친절히 대해 주겠노라 마음먹으면서 실실 웃는 왕자를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부르신 줄 알았습니다.”
“그래야 내 약혼식 연회에서 자연스레 빠질 만한 사유가 생기니까.”
“그럼 절 이곳으로 부르신 이유가…….”
왕자는 빙긋 웃으며 새로운 잔에 술을 따랐다.
“술 한 잔 건네려고.”
로리엔은 왕자가 주는 유리잔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핏빛처럼 붉은 포도주. 은은한 향내와 다르게 독한 술이었다. 로리엔은 잔을 받으면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잘 못 먹습니다.”
“알아.”
왕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에 반해 눈빛은 추궁하려는 게 있다는 듯이 날카롭게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관리 대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속이 탈 텐데. 강렬한 게 당길 거야.”
“…….”
로리엔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면서 왕자는 날카로운 눈빛을 쏟아 냈다.
“오늘도 실험실 한쪽 벽이 완전히 날아갔다고 들었어. 하여간 지독히 강한 인간이야. 무의식 상태에서 그 정도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 심지어 마나 공급을 완료한 상태가 아닌데도 그랬다니.”
왕자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통제 안 되는 야수를 보는 느낌이랄까?”
로리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질책하는 소리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에게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왕자는 사령관이 도착한 날부터 그의 상태를 세심하게 확인해 왔다. 서둘러 복귀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인지를 알길 원했다. 로리엔은 그에게 아무 문제 없다는 대답을 들려주고 싶었으나 렉스의 상태가 여기 도착한 이후로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터라 가슴이 타던 중이었다.
“……렉스 사령관은.”
로리엔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입을 열었다.
“그 괴상한 섬에서 크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전하께서도 알다시피 그 섬의 늪지는 독특해서요. 마나 인간에게 어떤 심각한 부작용을 주었을지 모릅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몸을 치료하면서 마나를 공급하다 보면 원상태로 돌아올 겁니다. 더 섬세하고 면밀한 관리를 통해서 정성스럽게 돌보면…….”
“우린 애를 키우는 게 아니야.”
로리엔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왕자는 단호할 정도로 냉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린 무기를 창조해 냈어. 엄청나게 강하면서도 값비싼, 이토록 획기적인 살상용 인간을 만들어 냈지. 근데 더 기다려야 한다니? 우린 기다릴 수 없어. 전쟁은 막바지에 접어들어 종결이 코앞이야. 우리에겐 이 전쟁을 확실하게 승리로 이끌어 줄 존재가 필요해. 그러라고 만들어진 무기가.”
“…….”
“안타깝지만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해.”
“하, 하지만, 전하! 그건 너무 성급해요!”
로리엔은 울컥해서 소리쳤다. 그녀는 왕자가 말한 결단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렉스의 의식을 몸하고 분리한 뒤 다시 넣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렉스의 의식이 백지처럼 깨끗해지며 모든 것이 초기화된다. 마치 갓 창조해 냈을 때처럼.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어.’
로리엔은 하얗게 질린 채로 말을 이었다.
“위험하기도 하고요! 지금의 렉스처럼 될 거란 보장이 없습니다! 의식이란 건 알려진 게 없는 난해한 영역입니다! 공식대로 한다고 하더라도 원래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단 말입니다! 그, 그리고 그렇게 되면 피해는 예측할 수 없을 만큼 크리란 걸 알지 않습니까! 정신이 망가진 자들이 얼마나 큰 문제를 야기했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관리되지 않는 그들은 잠재적인 파괴자들입니다. 가둬 두지 않으면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망가뜨릴 겁니다! 왕국의 근간을 흔들 거라고요! 일반 기사들이 그런데 하물며 렉스야 어떻겠습니까! 가장 강한 그가 잘못되어 버린다면……!”
로리엔은 가쁘게 넘어가는 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걷잡을 수 없을 겁니다! 사후 수습이 되지 않을 겁니다! 가둬 두는 것만으로는 절대 막지 못할 괴물이 될 거고요! 어쩌면 대륙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단 말입니다!”
로리엔은 격한 마음이 파도처럼 일어나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모든 기억을 잃게 됐을 때의 단점이 이토록 큰데 어찌 성급히 결단을 내리려고 하십니까! 렉스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요!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결정을 내리셔야지! 그, 그래야지! 모두에게 좋은데……!”
숨을 헐떡이며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 왕자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결 좋은 은발 사이로 분석적인 눈을 하고 있을 뿐이다. 로리엔은 문득 그 차분한 모습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이미 무언가 진행됐구나. 두려움으로 범벅이 된 애원이 흘러나왔다.
“저, 전하. 제발 다시 생각해 주세요. 의식을 함부로 없애는 건 위험합니다! 다시 온전하게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시간을 주신다면 제가 책임지고 렉스를 원래대로 돌려 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언제부턴가 사령관이란 호칭도 빼고서 절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짖는 로리엔이었다.
“자네는.”
왕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바로 숨죽이며 입을 다물었다.
“그가 기억을 잃으면 슬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