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그녀의 눈길은 잠시 마에뜨에게로 향했다. 사교계에 파격을 선사한 공주는 약혼자인 왕자 없이 홀로 귀족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앤드루 왕자는 그녀와 입장해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더니 어느 순간 일이 있다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낯선 나라의 왕성에서 이국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기죽을 만도 하건만 마에뜨의 얼굴에선 그런 기색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대화를 주도해 나가며 환하게 웃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 자신감에 찬 모습에서 왕국의 안주인이 될 만한 자질이 느껴졌다.
하지만 로리엔의 관심은 시선과 달리 그녀에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문제가 있는 거죠?’
혀끝에 남아 있는 씁쓸한 포도주의 맛처럼, 로퍼의 목소리는 그녀를 괴롭혔다. 왕의 전갈이 온 터라 꾸역꾸역 약혼식에 참여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녀는 실험실에서 의식을 잃은 렉스를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면서 말이다.
마나 공급 중에 깨어난 그는 실험실을 반쯤 부수다시피 했다. 특수 합금으로 몸을 꽁꽁 구속해 놔서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중요한 마나 동력 기구가 부서져 마나 공급에 큰 차질을 겪었을 것이다. 겨우겨우 그를 진정시키고 고개를 들었을 때 로퍼가 엉망이 된 실험실을 둘러보며 질문을 던졌다.
‘사령관님의 상태. 확실히 문제가 있는 거죠?’
로리엔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입술만을 깨물었다.
렉스가 또 기구에서처럼 행동할 줄이야. 왕국의 주요 병기인 만큼 하루라도 빨리 몸을 회복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중요한데 어째서 그는 마나 공급을 거부하며 뛰쳐나가려고만 할까.
몸에는 이상이 없었다. 상처가 있었지만 그건 마나가 공급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였다. 로리엔은 그의 의식이 잠깐 돌아왔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몸 안의 마나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나가 안정되려면 이론적으로 충분한 양이 몸에 들어가야 하는데 렉스는 그게 되기도 전에 장치를 부수고 달아나려 해서 의식이 온전하게 돌아오질 않는 것이다.
‘정신 차려요, 렉스!’
로리엔은 본능적으로 마나를 분출하려는 사내를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회유도 해 보고 울며 달래기도 해 보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로 실험실은 물론이고 왕성의 일부까지 날아갈 것 같아 로리엔은 마나 공급 장치를 역으로 돌려야 했다.
으아아아-!
이는 마나를 강제로 추출하는 것을 뜻했다. 보통 망가진 마나 기사들에게서 마나를 회수하기 위해 하는 조치인데 렉스에게 이걸 쓰게 될 줄이야. 회수 과정에서 극심한 고통이 따르는 걸 아는 로리엔은 괴로워하는 렉스의 모습에 도리어 제가 아픈 것처럼 눈가를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이어 노크 소리가 울렸다.
‘로리엔 님.’
그녀를 데리러 온 왕궁 기사였다.
‘아, 약혼식에 가셔야겠군요.’
인상을 찌푸리며 함께 렉스를 지켜보던 로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로리엔은 그에게 엉망이 된 실험실을 부탁하고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왕께서 참석하라고 직접 사람을 보내 온 만큼 참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근데 폐하께서 계시지 않는다니.’
약혼식이 끝나고 이어진 연회 자리에서 로리엔은 왕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찍 실험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왕의 상태가 생각보다 더 위중했던 걸까. 방금 전 수다를 들어 보면 이 약혼식을 실제로 주도하는 이는 왕자 같았다.
“오, 로리엔.”
그때 몇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로리엔은 활짝 미소 지었다. 수염이 멋들어진 란드 공작과 풍채가 좋은 알다리스 후작 그리고 상당히 젊은 미남인 로도스 백작으로, 꽤 지체 높은 귀족들이었다.
수도 귀족들을 이끄는 이 세 사람은 왕궁의 주요 예산이 투입되는 연금술에 관심이 무척 많아 로리엔을 자주 찾곤 했다. 자신들에게서 걷어간 세금이 주로 쓰이는 것인 만큼 그에 대한 호기심도 대단했는데 왕은 그런 귀족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데 주저하지 말라고 로리엔에게 직접 당부까지 한 터였다.
따라서 그녀는 속이 편치 않은 가운데에도 공손하게 웃어 보이려고 애썼다. 먼저 란드 공작이 말했다.
“그래, 마나 실험은 잘 진행되고 있소? 특수 능력을 개발 중이라 들은 거 같은데.”
“맞습니다. 왕궁에 도움이 될 만한 능력들을 찾으려는 중이지요. 아직 큰 성과는 없지만 꾸준히 시도하면 마나 기사들에게 놀랄 만한 능력이 생길 거라 봅니다.”
“그렇군요. 전쟁에 도움이 되는 좋은 능력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니 꼭 결실이 있길 바라겠소.”
란드 공작이 근엄한 어조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알다리스 후작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말씀이십니다. 공작님께서 중요한 걸 지적해 주셨군요.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는 적들이 모르는 능력이 필요하다고요. 알려진 능력은 방어하겠으나 모르는 능력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왜 렉스 사령관이 강하겠습니까? 마나를 늘 새로운 형태로 변형시켜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때문이지요. 그를 본받아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습니다.”
“명심하여 더 실험에 박차를 가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리엔은 다시 웃으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란드 공작과 알다리스 후작이 조만간 실험실을 방문해 그를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잠자고 있던 로도스 백작이 입을 열었다.
“마나를 주입한 기사들 중에서요, 정신이 불안한 자들은 여전히 문제가 많습니까?”
“아무래도…….”
로리엔은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설명하기 어려운 동시에 시원하게 답하기 곤란한 영역이었다.
수많은 기사들이 마나 기사를 자원하지만 마나를 받아들이는 데 성공한 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성공하더라도 정신이 불안정해져서 사후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에 정말 완전한 마나 기사가 되었는지는 시간을 두고 판단해야 했다. 로리엔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지속적인 관리가 오래도록 필요할 겁니다.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통제가 전혀 되지 않으니까요. 그건 무척 위험해서…….”
왜 갑자기 렉스가 떠올랐을까. 로리엔은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느끼면서 다시금 대화에 집중했다.
“잘못하면 아군에 큰 피해가 갈 수 있습니다. 반드시 지양해야 하는 일이죠.”
“그렇죠. 확실히 맞는 말입니다.”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로도스 백작을 보면서 란드 공작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성공작을 두고서 왜 실패작을 언급하는 거요? 정신이 불안정한 마나 기사들은 모두 잡혀 있는 걸로 아는데.”
로도스 백작은 그의 질문에 제법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제국군은 마도 시대 때 썼던 무기들을 재활용한다고 합니다. 오래된 무기가 가진 작은 마나의 한 조각까지 놓치지 않고 전쟁에 재사용하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들보다 더 유용하게 사용할 만한 게 많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흠. 젊어서 그런지 머리 돌아가는 게 남다르구려.”
란드 공작의 말을 알다리스 후작이 받았다.
“과연 그래요. 이미 버렸다고 생각되던 힘을 다시 사용할 수 있다면 확실히 큰 강점이 될 겁니다. 로리엔. 어떻습니까. 로도스 백작의 제안이요. 정신이 불안정한 마나 기사들을 최전선에라도 보내 전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게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날아오는 화살이라도 막을 수 있게 인간 방어벽으로 말입니다.”
로리엔은 미소로 굳어진 입가가 떨리는 걸 느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고위 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비위를 맞춰 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세요. 돌아가서 다른 연금술사들과 논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래! 잘 됐으면 좋겠군요!”
좋아하는 알다리스 후작을 보면서 로리엔은 대답 대신 유리잔을 물었다. 어느샌가 란드 공작은 소싯적에 기사로 활약했던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는데 로도스 백작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질문하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알도스 사령관께선 약혼식에 참여하지 않으셨군요. 멀리 출타하신 모양이죠?”
은근히 떠보는 어조다. 로리엔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훈련된 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임무 수행 중이세요.”
“저런. 아쉽군요. 약혼식에서 그 무심한 얼굴을 보나 싶었는데. 처음에 봤을 땐 무서워서 소름이 다 돋았던 걸 생각하면 크나큰 발전이죠.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사령관은 아군인 것을 알고 봐도 두려운 존재니까.”
“하지만 그만큼 든든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알다리스 후작이 서둘러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가 한 번에 죽인 적국의 사상자가 무려 천 명이나 됩니다. 천 명! 어떤 무기가 그런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령관 정도 되니까 해내는 겁니다. 우리 왕국의 보물이자 위대한 무기니까요! 제국 놈들이 모두 탐내는 귀하디귀한 전쟁 종결자이지요!”
“후작께선 사령관을 참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로도스 백작의 말에 알다리스 후작은 당연하지 않냐며 껄껄 웃었다.
“승리를 가져다주는 사람이니까요. 내 편에 승리를 이끄는 특별사령관이 있다는 게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천금을 준다고 해도 절대 바꾸지 않을 겁니다. 사령관은 우리 왕국의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