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이 나쁜 자식, 그만하지 못해!”
보다 못한 루지가 끼어들었지만 사내는 그런 루지의 뺨을 순식간에 갈겨 버렸다. 루지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고 흥분한 파루가 일어났으나 그 역시 수하들에게 잡혀 사정없이 밟혀야 했다.
“끄, 크악!”
“파, 파루! 그, 그만해! 멈춰! 멈추란 말이야!”
루지가 기겁하며 말렸으나 수하들은 멈추지 않았다.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모습을 힐끗 보고는 태연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까닥였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야. 신파도 취향이 아니고. 너도 그런가?”
“…….”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질 않는다.
하얗게 질린 안색의 수지를 보면서 사내는 기분 좋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공포를 조장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데 도가 튼 자. 바로 해적을 잡는 해적, 이 바다에서 절대 마주쳐서는 안 되는 배의 유령이라고 불리는 바갈이었다. 그는 기사였을 때의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는 듯이, 환기라도 하는 것처럼 흉갑이 있을 법한 자리를 툭툭 쳤다.
“침착한 태도가 아주 맘에 들어. 일이 끝나고 나면 우리 섬으로 데려가 주지.”
‘뭐?’
“영광으로 알라고. 정말 맘에 드는 여자만 그 섬으로 모셔 가니까. 크크.”
선심 쓰듯이 하는 말에 수지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해적을 잡는 해적을 만난 것도 모자라 어디 이상한 데로 끌려가야 한다니. 쓰러져 있는 루지와 기절한 파루까지 보자 더욱 눈앞이 캄캄해지는 수지였다. 과연 어떻게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머리가 꽉 막힌 것처럼 돌아가지 않을 때였다. 그의 수하들이 지하에서 사슴 우리를 끌고 나왔다.
“이딴 게 신성하다고? 기껏해야 한 끼 식사로 그만일 생김새인데. 하여간 귀족들은 별거에 다 환장하면서 돈을 낸다니까.”
사슴을 유심히 보던 사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리 안으로 손을 뻗었다. 신성한 뿔이 자라나는 부분을 만져 보려고 말이다. 그러나 사슴은 먼저 머리를 내밀었던 수지 때와는 달리 사내에게는 잡히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이에 신경질이 난 사내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모가지를 잡으려 하자 팔을 물어 버렸다. 사내는 아팠는지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 짐승 새끼가!”
사내는 불같이 화를 내며 사슴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작은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사내는 숨이 막혀 괴롭다는 짐승의 눈망울을 보며 잔인하게 웃었다.
“비싼 몸이라 잘 봐주려고 했는데. 감히 내 팔을 물어?”
사내는 목을 잡지 않은 손으로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사슴을 찌르려는 태도에 모두가 놀랐을 때, 수하 하나가 우물쭈물 끼어들었다.
“서, 선장님! 그 사슴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의뢰자가 돈을 지급할 테니까요! 그것 때문에 이 해적선을 공격한 건데…….”
“누가 그걸 몰라! 돈이라면 나도 신경 쓰고 있어!”
버럭 외친 그는 다시 사슴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깔보던 귀족들의 눈빛처럼 사슴의 눈빛에는 어딘가 역한 게 있었다. 제가 잘났다는 부류들. 실력은 개뿔도 없으면서 신분 때문에 자신을 깔보던 그들처럼 말이다. 사내는 원한 가득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난 단지 이 버릇 없는 짐승 새끼에게 가르쳐 주려는 것뿐이야. 누가 이 배의 대장인지, 똑똑히 머릿속에 새겨 줘야지. 이미 상처 난 몸뚱이에 하나쯤 더 나도 상관없을 테니까.”
잔인하게 웃으며 옆구리를 검으로 찌르려던 참이었다. 수지가 끼어들어 그의 손목을 두 손으로 붙잡는 게 아닌가.
사내는 꺼지라며 손을 털었지만 수지는 물러나지 않았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로,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서도 사슴을 구하겠다고 자신에게 맞서는 여자. 바갈은 왠지 모를 호기심과 짜증을 동시에 느꼈다. 마냥 순진한 여자가 아니었던 걸까? 멋도 모르고 행동하는 덜떨어진 귀족 여자들 같지는 않았다.
‘나중에 정체를 알아봐야겠군.’
무엇이 됐든 바갈은 자신을 막고 있는 여자가 가소로웠기 때문에 크게 팔을 휘두르며 그녀를 땅으로 밀쳐 버렸다.
“흐읏…….”
결국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아까 다친 옆구리를 부딪친 것인지 허리를 잡으며 아픈 신음을 내는 수지를 보니 음심이 마구마구 돋아났다. 가슴 부근의 천을 잘라서 하얀 속살이 드러난 것도 그의 눈을 뒤집히게 만드는 포인트였다. 이 순간에도 철저하게 본능대로 움직이는 아랫도리가 기특하다 생각하며 바갈은 소리 없이 웃었다.
“난 신파는 질색이야. 실력 없는 자들의 희생은 죽음을 예쁘게 포장하려 발악하는 행위라 여기지.”
바갈은 쓰러진 수지 앞에 한 무릎을 꿇은 채로 희희낙락 지껄였다.
“그러니까 희생이란 예쁜 발악을 하기 전에 다른 데서 먼저 울어 보라고. 맘에 들면 예쁜 노리개로 삼아 오래도록 데리고 있어 줄 테니까.”
그러면서 수지의 벌어진 앞가슴에 노골적으로 손을 내미는 남자였다. 그 순간, 우리에서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다.
“선장님!”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사슴이 황금빛으로 변해 작은 빛으로 분해되는 게 보인다. 바갈은 흠칫해서 우리 안으로 손을 뻗었지만 이미 몸체가 빛으로 산산이 흩어진 뒤였다.
“이 무슨 망할…….”
기가 막혀 중얼거리는 바갈의 눈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빛 하나가 눈에 띈다. 별빛같이 황금 꼬리를 남기면서 날아가는 빛을 바갈은 잡으려고 애썼지만 그것은 그런 그를 비웃듯이 요리조리 피해 다니더니 우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수지의 손등으로 스며들었다.
“뭐야…….”
황당한 바갈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보고 있던 해적들도 어안이 벙벙했는지 잠시 황량한 침묵이 갑판을 휩쓸었다.
“이, 이렇게 되면 의뢰는…….”
“금화 수십 개가 달린 일이었다고요! 섬 주변을 맴돌다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은 동료들 목숨까지 치면, 더 받아도 부족한 돈이잖습니까!”
“어떻게 할 겁니까! 선장님!”
“말이라도 해 보세요!”
돈을 잃었다는 생각에 흥분한 선원들이 너도나도 입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갈이 괜히 자극한 탓에 사슴이 금빛으로 변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극한 상황에서 제 목숨을 끊어 귀한 상대에게 빛을 넘기는 건 사슴 일족만의 독특한 행동이었지만 잘 모르던 이들에게는 그저 귀한 값을 지닌 동물이 궁지에 몰려 죽은 것으로 보였다. 목청을 높이며 항의하는 수하들에게 바갈이 곧 소리를 빽 질렀다.
“시끄러워! 한 번만 더 요란하게 지껄이는 녀석이 있다면 그 목을 몸뚱이에서 분리해 버리겠어!”
그러자 단번에 조용해지는 해적 무리였다. 바갈이 어떤 성격인지 잘 아는 수하들은 불만이 일었지만 죽기 싫었던 탓에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바갈은 입을 다문 수하들을 둘러보며 살기가 어린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귀머거리는 없나 보군.”
바갈의 눈은 곧 텅 빈 우리를 향했다. 황금 뿔 사슴을 잡으려고 한 달을 고생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일지라도 늪지의 해역은 고난스럽고 까다로워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해적선 하나가 황금 뿔 사슴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중간에 그것을 강탈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었다.
‘다 된 일이었는데!’
의뢰자는 수십 개의 금화를 한 번에 낸다고 했다. 망토 속의 얼굴이 무척이나 단아하면서도 위엄찼던 것을 떠올리면 제법 지위가 있는 귀족일 것이다. 청아하면서도 조용한 어조를 지닌 그는 늪지에 사는 황금 뿔의 사슴을 원한다고 했다. 이것만은 지켜 줄 것을 강조하면서.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의뢰자의 주문이 떠오르자 바갈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우리를 여러 번 사납게 쳤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돈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될 판이었다.
“너.”
바갈의 손가락이 수지를 향했다. 굳어 있던 수지는 그 손길에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덜덜 떨고 있는 수지를 내려보면서 바갈은 성난 짐승처럼 다가왔다.
“무슨 일인지 알고 있지?”
“……네?”
“사슴이 빛으로 변해서 너한테 들어갔잖아! 어떻게 된 거야!”
바갈은 윽박지르며 수지에게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수지도 몰랐다. 다만 남자가 자신을 괴롭혀 보다 못한 사슴이 나선 게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수지는 놀람과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빈 우리를 보았다가 제 손등을 바라보았다.
“어서 말해 봐! 무슨 짓을 한 건지.”
“……당신이잖아요.”
“뭐?”
“무슨 짓을 한 건 당신이라고요!”
검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자신을 응시했다. 바갈은 겁에 질려서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이 빛나는 눈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었다. 바갈은 짧은 실소를 터트렸다. 그 뒤 그의 얼굴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이게 맘에 들어서 봐주려고 했는데…….”
“악!”
“수지!”
어느새 바갈의 손이 수지의 손등을 꽉 짓밟고 있었다. 신음을 삼키며 몸을 움츠리는 수지를 보며 루지가 일어나려 했으나 수하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수지는 그가 밟은 손등이 아파서 등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런 수지의 고통을 읽으며 바갈은 천천히 눈꼬리를 휘었다.
“아까 말하지 않았던가? 신파는 질색이라고. 희생은 발악이라 생각한다고.”
“으, 으으…… 아!”
바갈은 더 아프게 수지의 손등을 찍어 눌렀다. 그 탓에 나뭇조각이 손바닥에 박혀 피가 새어 나왔지만 개의치 않아 하며 더 세게 힘을 실을 뿐이었다.
“못 알아먹은 거야? 모처럼 똑똑한 암사슴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그런 건방진 계집년일 뿐이라니. 실망스럽잖아. 이 바갈에게 어울리는 태도를 좀 보이라고!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