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가깝네요?”
“가장 거리가 짧은 항구는 그렇다고 했어요. 바람이 나쁘지 않으면 더 빨리 갈 수도 있고요. 물론 날씨가 안 도와준다거나 더 무서운 적을 만난다거나 하면 다르겠지만…….”
그때 배가 크게 휘청거렸다. 수지와 루지는 기울어져서 벽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 말았다. 파루는 그 소동에도 잠에서 깨지 않았으나 수지와 루지는 출렁거리는 파도에 휩쓸려서 저녁까지 잠을 청하기는커녕 먹던 것도 게워 내야 했다. 반나절 만에 파리한 안색이 된 루지가 산발이 된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하루도 못 버티겠어요. 늪지에서 원숭이들의 공격을 받아 나무줄기에 밤새 매달렸을 때도 이렇게 힘들지 않았는데…….”
그러면서 루지는 해적들이 먹으라고 던져 준 지저분한 물병을 보며 소리쳤다.
“어떻게 저딴 걸 먹고 견디나요?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에요, 여긴!”
“그, 그래도…….”
“파루, 일어났어?”
남자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쓰러져 있던 파루가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뜨는 게 보였다. 루지는 일어나려는 그를 도와주었다. 파루는 상처를 한 손으로 덮은 채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겨야 합니다. 해적들은 대부분 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이거나 군대에서 쫓겨난 탈영병입니다. 애초에 믿을 만한 인간들이 아니죠. 우리를 살려 준다면 대가 때문일 테니까, 지닌 것을 잘 숨기고 있어야 합니다.”
파루는 루지가 지닌 배낭을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루지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 마, 파루. 내 목숨처럼 지킬 테니까!”
“목숨이라뇨? 그 어떤 것도 루지의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습니다. 루지의 목숨이 제일 귀합니다. 목숨을 위협받으면 그깟 가방은 줘 버리세요.”
“파루…….”
“그 어떤 것도 루지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제 목숨까지도.”
루지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는 루지를 보면서 파루는 당황했다.
“네 목숨도 소중해! 왜 나만 중요하다 말해, 흑. 이 바보야! 이렇게 다치고서……!”
더 큰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울어 버리는 루지였다. 그동안 억눌렀던 마음이 터진 걸까. 파루의 품에 안겨서 우는 루지를 보니 둘만 있을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수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란 새가 파닥거리며 얼른 그녀를 뒤따라왔다.
갑판으로 올라갈 순 없었다. 해적들은 뒤통수를 맞기 싫다고 갑판으로 올라가는 문을 꽉 닫아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수지는 지하엔 뭐가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계단을 내려갔다.
바로 아래층에는 요리하는 작은 키의 절름발이 노인이 있었다. 그는 수지가 내려오자 눈살을 팍 찡그리며 꺼지란 듯이 위협적으로 식칼을 휘둘렀다. 수지는 부리나케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겁이 나 다시 위로 돌아가려 했지만 파란 새가 무언가 있다는 듯이 머리를 자꾸만 아래로 까닥거렸다.
수지는 망설였다가 계단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렸다.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는 공간이 이어 나타났다.
그물이 담긴 상자, 창과 활이 담긴 상자가 있는가 하면 화약처럼 보이는 검은 포환이 담긴 상자도 있다. 상자 안의 것들은 대부분 해적들이 사용할 만한 물건처럼 보였지만 벽에 붙어서 커다란 천으로 가려져 있는 상자만은 유독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로난이 그 위에서 요란하게 날개를 퍼덕거리자 수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천을 잡아당겼다.
“어……?”
무서운 괴물이라도 나오는 건 아닐까 했지만 뜻밖에도 나타난 것은 작은 사슴이었다. 사슴은 쇠창살의 우리 안에서 기척을 느꼈는지 힘겹게 머리를 들었다. 수지는 사슴의 이마에서 막 돋아나고 있는 뿔의 흔적을 보고 멈칫했다.
‘금빛?’
수지는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설마 늪지에서 잡혀 온 거니?”
얼핏 해적들이 개고생을 하며 섬에 왔었다고 이야기한 게 떠올랐다. 섬 근역의 해류가 험해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사슴을 잡으려다가 고생을 한 거라면? 그렇게 갖은 고생 끝에 사슴을 잡았고 떠나려다가 그녀의 일행이 피운 연기를 보고 태워 준 거라면?
‘왜 하필 해적들이 그곳을 지나고 있었는지가 설명되네.’
수지는 착잡한 심정으로 커다란 눈망울의 사슴을 살폈다.
‘다쳤구나.’
작은 짐승은 성치 않았다. 보드라운 털은 거칠어져 있었고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잡히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저항을 한 것처럼 보이는 사슴을 보며 안타까워하는데 사슴이 몸을 일으켰다.
“배고픈 거야?”
얼떨결에 손을 내밀자 그 손가락을 핥아 왔다. 애처로운 모습에 수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과 건초가 상자 옆면에 놓여 있었다. 머리를 내밀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거리였지만 한 입도 먹지 않았는지 물그릇과 건초 그릇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수지는 파란 새를 한 번 바라보았다. 파란 새는 건초와 물 위를 날며 먹어도 된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자, 먹어도 된대.”
수지가 물을 밀어 주자 그제야 고개를 뻗어 물을 먹는 사슴이었다. 내민 건초도 허겁지겁 먹는 모양이 많이 굶주렸던 것 같았다.
“너를 어떡하려는 걸까.”
바깥세상에서 신성시된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그 말은 이 사슴을 돈을 주고 사서라도 보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까? 하지만 잡는 과정에서부터 이런 대우라면 팔려서도 과연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지. 수지는 난감해져 사슴을 응시했다.
‘도와주고 싶은데.’
괜스레 황금빛 문양이 있는 손등을 손으로 문질렀다. 자신처럼 낯선 세계에 떨어진 사슴이 얼마나 공포에 떨고 있을지 알 것만 같다. 도와줄 방법이 있을까. 고민하는 찰나에 배가 믿을 수 없이 강하게 흔들렸다. 수지는 그대로 밀쳐져 상자에 옆구리를 찧고 말았다.
“읏.”
무슨 일이지? 아픈 옆구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쪽이 시끄러웠다. 폭탄이 터진 것처럼 이상한 굉음도 연신 들려왔다. 가슴이 철렁해진 그녀는 우리 위에 천을 다시 올려놓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무슨 일이에요?”
“수지! 큰일 났어요!”
루지는 파루를 붙든 채로 하얗게 질려서 외쳤다.
“해적들이 습격했대요!”
“네?”
이미 해적선에 타고 있는데 해적들의 습격이라니, 그게 무슨 말일까. 수지는 그 의미를 곧 알 수 있었다. 여러 번의 포탄이 울리고 칼 부딪치는 소리가 나길 오래지 않아, 갑판으로 올라가는 문이 열린 것이다.
“!”
수지는 먼저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핏물을 발견했다. 해적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는 작은 천처럼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등골이 섬뜩해졌을 때, 검은 옷을 입은 장정들이 우르르 내려왔다. 수지와 루지, 파루는 저항도 해 보지 못한 채 양팔이 잡혀 끌려 나왔다.
“너흰 뭐야?”
중앙에 서 있는 사내 하나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이 무리의 대장인 듯 눈빛이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손에 들린 검에서 피를 태만하게 털어 내면서 수지 일행을 가는 눈으로 훑었다.
“옷차림이 이상한데? 노예인가?”
뱃사람답게 검게 탄 피부. 이리저리 아무렇게 휘날린 머릿결처럼 눈빛도 사납고 억셌다. 수지는 제게 시선이 향하자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아니지. 그러기엔 너무 멀쩡하단 말이야. 생김새도 곱상하고 피부도 맑고. 심지어 냄새도 안 나. 귀족 처녀들처럼.”
사내는 히죽 웃었다. 한 발짝 다가올 때마다 사냥감이 된 것처럼 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수지는 그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그의 발아래 쓰러져 있는 해적들이 아니더라도 잔인한 눈빛과 몸짓을 보면 말이다. 사내는 은근하게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해적선을 타고 다니는 순결한 귀족 아가씨들이라. 그것도 이상하단 말이야? 수상쩍은 냄새가 나. 과연 정체가 뭘까? 응?”
사내는 광기가 서린 눈을 부라리며 수지 앞에 다가섰다. 칼로 그녀의 검은 머릿결을 들추는 동작에서 수지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파란 새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공격했지만 오히려 성가시다는 듯이 검을 휘두르는 사내였다.
수지는 로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 도망가라는 고갯짓을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던 로난은 수하들이 그물을 던지며 잡으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위로 날아 시야에서 멀어졌다.
“새를 길들였나? 희귀종 같은데. 제법이야. 생긴 것과 달리 재주가 있어. 기껏해야 침대에서 앙증맞게 우는 게 다일 뿐일 거 같은데.”
사내는 낄낄거리며 검으로 수지의 가슴 부근을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수지는 마침내 치가 떨린다는 듯이 입술을 떨었다.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자 사내의 입술에 더욱 짙은 미소가 맺혔다. 그는 상대가 겁먹는 걸 즐기는 사악한 부류였다. 수지가 무서워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기분이 좋아지는 자. 그는 능글맞게 말했다.
“뜻밖의 수확이란 말이야. 너 같은 여자가 이런 장소에 있다니. 기껏해야 사슴 새끼 한 마리 얻겠다 싶었는데 토실한 암사슴을 덤으로 얻겠군.”
사내는 수지의 가슴 부근 천을 검으로 천천히 찢어 내렸다. 배꼽까지 다 찢기기 직전 수지가 반항하듯이 손을 움직였으나 그 손목이 붙잡힌 채 그의 코끝까지 당겨져야 했다. 사내는 목으로 웃으면서 수지의 행동이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토실토실해. 특히 엉덩이가.”
“그, 그만-!”
수지가 울상이 된 채 거부했다. 사내는 입가를 찢어 웃으며 찡그린 얼굴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참다 참다 우는 얼굴이 볼만한데? 침대에선 더 귀엽게 울겠지? 길쭉한 내 거길 받으면서 좋아서 울고 아파서 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