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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73)화 (73/163)

73화

수지는 루지의 심정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저도 그러지 않았던가. 다친 다리를 끌어안은 채 현실에 절망했었다. 고독히 죽을 거란 생각에, 두 번 다시 렉스를 보지 못한 거란 생각에 두려워져서.

“배를 타는 게 우선이니까요.”

아직도 그때의 공포가 그대로 제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느끼면서 수지는 말을 이었다.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 그저 머무를 수는 없어요.”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연기를 피워서 지나가는 배에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배가 선량한 의도를 지녔다면 좋겠지만 최악의 경우엔 그게 아니어서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나중에 도망가는 한이 있더라도 수지는 시도를 해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렉스에게 가려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까.

따라서 무서움에 흔들리는 용기를 그러모으듯 수지는 한 손을 꽉 쥐면서 말했다.

“루지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전…….”

멈칫한 그녀의 입에서 곧 울음 섞인 소리가 나왔다.

“여길 빠져나가고 싶어요! 가족들을 되찾고 싶어요!”

수지의 담담하지만 솔직한 고백에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진정된 걸까.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반복해 외쳤다.

“수지처럼 여길 나가서 가족들을 찾겠어요!”

“좋아요. 그럼 할 일이 있는 거네요.”

수지는 펴진 손을 내밀었다. 루지는 그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팔을 내밀어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오가며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는 것만 같았다. 수지는 기운을 북돋듯 말했다.

“불 피울 만한 것을 찾아볼까요?”

“해변이라 그럴 만한 게 있을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걱정하는 루지였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해변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덤불이 제법 있었다. 로난은 푸른 새가 되어 그중에서도 불에 잘 탈 만한 것들을 물어 왔다. 루지는 소년이 사라지고 새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을 기이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파루를 돌보는 동안 수지와 로난은 제법 많은 양의 땔감을 모았고 루지는 감탄하며 말했다.

“이 정도면 지나가는 해적선의 시선을 충분히 끌겠어요.”

“그래요?”

안도하던 수지는 곧 이상한 단어를 발견했다.

“해적선이라뇨?”

“다른 배를 노략질하는 배요.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이 근방으로 다니는 배는 해적선이나 불법적인 일을 하려는 외국선밖에 없다고요. 여기는 해류가 거칠고 변덕스러워서요. 통상적인 왕국의 배는 다니려 하지 않는대요. 몹시 위험하니까.”

한마디로 왕국의 눈을 피해 바다를 이동하려는 자들만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게 보통은 해적선이라는 것에 수지는 혼란스러워졌다. 배가 다닌다니 다행이나 안도할 수가 없다. 불을 피우지 않는 게 나을까, 어쩌면 이곳의 나무들을 그러모아 조각배를 만드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고민하는 수지에게 루지가 희망적인 말을 했다.

“하지만 해적선들은 돈을 주면 무슨 일이든 해 준대요. 마치 용병처럼요. 사람들을 태워 주는 일도 한다고 들었어요.”

“돈이요?”

역시 이 세계에서도 돈은 필수인 건가. 수지는 난감해했다. 늪지에서 눈을 떠 생존하기 급급했던 그녀에게 돈이 될 만한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곤란한 기색의 수지에게 얼른 로난이 제 꽁지깃을 가리켰다. 푸른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꼬리 깃털은 매우 특별하다. 귀한 상대에게만 주는 것인 만큼 로난은 기꺼이 이 깃털을 팔아 수지가 노잣돈을 마련하길 바랐지만 수지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루지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게 도움이 될 거예요. 마을을 빠져나올 때 물건들을 몇 개 챙겨 왔거든요.”

가방 안에는 곡식과 약초의 씨앗이 넘치게 들어 있었다. 문 옷감도 두 필이나 있었고 늪지에서 주운 빛나는 돌, 보석도 있었다. 잘 모르는 수지가 봐도 돈이 될 만한 것들. 루지는 조금 의욕이 생긴 눈빛으로 말했다.

“이걸로 충분하겠죠?”

수지는 땔감 위로 넘실거리며 피어오르는 불꽃을 보며 진심으로 그러길 바랐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배는 생각처럼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불을 높게 피운 지 나흘이 되어서야 검은 배 한 척이 멈춰 섰다. 해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정박한 배는 큰 선박은 아니었으나 해적선의 표식인 해골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

“그래, 가장 가까운 항구로 옮겨 달라고?”

작은 나룻배를 타고 다가온 자들은 세 명이었다. 거친 바다 생활을 알려 주듯 해에 까맣게 탄 피부에 지저분한 복장을 한 자들은 첫눈에도 그리 호감 가는 얼굴은 아니었다. 비열한 눈빛으로 건들건들 위협적인 무기를 쥔 그들은 수지 일행을 깔보듯이 내려다보았다.

“돈은 있나? 옮겨다 드릴 돈.”

“무, 물론이죠! 이 옷감을 드리겠어요.”

신비로운 옷감의 자태에 해적들의 눈이 일순간 욕망으로 번들거렸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드름을 피우는 이들이었다.

“옷감이라고? 험한 바다를 지나 왕국의 항구까지 무사히 정박해야 하는데?”

“여기까지 오느라 개고생한 걸 떠올리면 옷감 두 필로 안 되지. 아가씨들은 모르겠지만 이 해역은 항해하기 엄청 힘들다고. 웬만한 돈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을 거야.”

“도, 도착하면 삯을 더 내겠어요.”

빛나는 보석을 줄 생각으로 루지는 가방을 끌어안은 채 대답했으나 해적들은 만만치 않았다.

“얼마나? 금화로 줄 건가? 우린 왕국의 금화가 아니면 취급하지 않아. 연합국의 금은 불순물이 많아서 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하거든. 왕국의 금화도 한두 개로는 안 되지.”

“그럼, 주머니가 찰랑거릴 정도는 받아야지!”

“혹시 그게 없다면 배를 얻어 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이, 있어요. 약속해요! 도착하면 줄게요! 섭섭지 않게 받을 거예요!”

“흠, 그래? 만에 하나 약속을 깨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해적 하나가 눈을 번쩍였다. 살기가 가득한 눈에 파루가 아픈 배를 움켜쥐며 일어설 정도였다. 해적들은 그런 그를 비웃으며 음산한 어조로 경고를 이어 갔다.

“해적들은 값을 치르지 않는 자들을 바다 한가운데 가라앉혀 버리지! 쓰레기를 꽁꽁 묶어서 말이야! 옆의 그 우스꽝스러운 새는 통구이가 될 거고! 그러니 값을 치러야 한다는 거 잊지 말라고!”

“조, 좋아요.”

루지는 겁을 잔뜩 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적들은 그 모습에 실실 웃더니 루지의 손에서 문 옷감을 강탈하듯 가져갔다. 그리고 타라는 듯이 조각배를 턱으로 가리켰다. 수지는 루지와 함께 파루를 부축했다.

그러나 올라타려고 해변에서 발을 떼는 순간 알 수 없는 현기증이 그녀를 덮쳤다.

“아…….”

몸이 무언가에 휩쓸리는 기분. 수지가 갑자기 휘청대자 루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뛰었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설명할 수 없는 힘이 그녀의 몸에서 떠나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멈춘 채로 힘들어하자 해적 하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거야! 서두르라고! 이 바다는 오래 머물기 힘들단 말이야! 파도가 잠잠할 때 떠나야 해!”

“아, 알겠어요! 수지, 내 어깨를 잡아요.”

루지의 말에 수지는 더듬더듬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한결 나았다. 심호흡을 여러 차례 시도하니 머리가 차츰 맑아져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다. 수지는 안도하며 눈을 끔벅거렸다.

“괜찮아요?”

루지의 맑은 눈동자. 걱정 가득한 시선에 수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거예요? 배 어지럼증이라도 있나요?”

멀미라면 없는 걸로 알았는데. 수지는 알 수가 없어서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루지는 해적의 험상궂은 눈이 신경 쓰였는지 일단 배에 타자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수지를 토닥여 주었다. 수지는 배에 올라타서 섬을 바라보았다.

힘겨운 검은 동공에는 푸른 해변 뒤로 자리한 짙은 녹색 숲이 비치고 있었다.

저기, 저 늪지에 살았었는데.

이제 떠난다니 안도감과 동시에 약간의 아쉬움도 든다.

‘맙소사.’

그 사이 정이라도 든 걸까. 질척대는 땅과 무서운 괴물들을 겪고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거냐고 수지는 저를 책망했다. 하지만 그런 장소였기에 렉스를 만나 인연을 엮을 수 있지 않았을까. 무서웠던 장소인 만큼 놀라움도 가득했고 뜻밖의 만남도 있었다. 수지는 제 옆에 앉은 루지와 어깨에 앉은 파란 새를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늪으로 눈을 돌렸다.

렉스에게 이 모험에 대해 말할 날이 올까. 수지는 파도로 출렁거리는 작은 배에서 또 다른 세상에 휩쓸리는 저를 느끼고 있었다.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다는 듯이 해적의 경고가 들려왔다.

“자, 꽉 잡으라고! 파도가 험해지니까! 넘어져서 뒤통수가 깨져도 몰라!”

수지 일행이 커다란 배에 올라타자 잠잠했던 바다가 사나워졌다. 늪지를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파랑이 크게 일어 묵직한 배를 뒤흔들었다.

해적들은 서둘러 조각배를 배 옆 편에 묶고 닻을 올리기 시작했다. 암초가 많은 지역이라서 파도가 더 출렁이기 전에 떠나야 했다. 그들이 줄을 잡으며 애쓰는 사이 수지와 루지, 파루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배의 지하로 자리를 옮겼다. 해적은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을 대충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부리나케 간판으로 사라졌다.

“윽. 여긴 음식물을 보관하는 장소인가 봐요.”

쾨쾨한 비린내가 진동한다. 술 냄새가 펄펄 나는 드럼통도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루지는 코를 막은 채로 앉을 만한 곳을 찾았다. 그나마 구석이 상대적으로 깨끗했기에 그곳에 엉덩이를 내렸는데 파루는 피곤했는지 앉자마자 잠들고 말았다. 루지는 그의 상처를 한 번 살펴보고는 다행이란 듯이 말했다.

“이삼일 후면 항구에 도착할 테니까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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