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지 보고서 (72)화 (72/163)

72화

로난은 그러면서 의아하게 덧붙였다.

“피 냄새도 나요. 누가 사용한 걸까요?”

로난의 말에 수지는 긴장하며 한쪽이 무너져 내린 비석을 옮기려고 애썼다. 한참 용을 써도 움직이지 않아 근처의 나뭇가지를 지렛대처럼 이용해 들어 올리자 들썩하며 옆으로 떠밀렸다. 수지는 모래 먼지가 가라앉은 통로를 둘러보았다.

“확실해요! 여길 지나면 바다가 보일 거예요!”

로난은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더욱 확신에 차서 말했다. 수지는 어두운 내부를 보면서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굵은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횃불처럼 치켜들었다. 어서 가자고 해맑게 쳐다보는 로난에게 수지는 잠시 머뭇거렸다.

“우리, 여기서 헤어지자.”

“네? 왜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 소년이었다. 수지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 때문에 둥지에서 멀리 왔잖아. 여기까지 와 준 것만으로도 도움이 많이 됐어. 이제 가족들이 걱정하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겠어.”

그를 기다리는 존재들이 있는 곳으로. 수지는 그게 중요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무 멀리 나오면 나중에 가기 힘들어.”

“괜찮아요. 높이 날면 빨리 돌아갈 수 있어요! 집에 가는 길을 잃어버리지도 않고요! 못된 새만 만나지 않으면 금세 가죠!”

로난은 씩씩하게 대꾸했다. 수지는 망설였다.

“하지만…….”

“걱정이 된다고요? 하지만 전 여기 수지랑 있고 싶은걸요! 가족들이야 저는 늘 밖에 돌아다니니 특별히 걱정하지 않을 거고요! 일주일 안에만 가면 문제 없을 거예요!”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앞장서며 제가 먼저 갈게요! 하고 잽싸게 좁은 통로로 나서는 것이 아닌가. 결국 수지는 횃불을 들고 서둘러 그를 쫓아야 했다. 로난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신나게 떠들었다.

“확실히 인간들이 애용할 만한 통로에요! 좀 냄새나고 축축한 걸 빼면 위험한 게 없으니까요! 간혹 지네랑 애벌레는 좀 밟아야겠지만……. 아. 이 벌레는 맛있는 건데. 하나 먹을래요?”

대뜸 들이미는 검고 딱딱한 벌레에 수지는 고개를 바삐 저었다. 로난은 나중에 간식으로 먹어야겠다고 여덟 개 다리를 바르작거리는 벌레를 기쁘게 주머니에 챙기기 시작했다. 수지는 그런 그를 기다려 주었다. 먹어 보라고 하지만 않는다면, 외양은 인간이지만 본질이 새인 로난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거 구워 먹으면 맛있어요. 나중에 껍질째 구워서 줄게요. 쿠키처럼 껍질과 다리가 바삭바삭 씹힐 거예요!”

“어, 얼른 가자.”

그를 독촉했다. 그렇게 삼십여 분을 더 걸었을까. 이마에 닿는 바람이 이전과는 어딘가 다르다고 느꼈을 때 앞서던 로난이 크게 외쳤다.

“다 왔어요, 수지! 도착했어요!”

멀리서 빛이 보였다. 수지는 나지막이 감탄하며 넓은 광원이 빠져나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와- 바다에요!”

로난은 양팔을 두 날개처럼 펼쳤다. 수지는 아이처럼 좋아하는 로난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새인 그에게도 바다란 남다른 의미일까. 피부에 와 닿는 공기에 소금기가 있었다. 푸르고 시린 바다는 그렇게 그녀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공기처럼 사방을 에워싸며 망망대해란 이런 것임을 알리듯이.

‘저 너머에 정말 내가 모르는 세상만이 가득할까.’

수지는 아득한 심정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저곳에서 렉스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스며들자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여태 꽉 막힌 늪지의 광경만 바라보다 시야가 뚫린 바다를 응시하니 일순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다. 이전에 바다에 왔을 때는 렉스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바빠 바다를 구경할 정신이 없었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것이 바다 아니겠는가.

그때 모래밭을 발랄하게 뛰어다니며 발자국을 남기던 로난이 돌연 흠칫해서 수지를 향해 다급하게 뛰어왔다.

“해변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어요!”

수지는 그의 말에 긴장하며 몸을 낮췄다. 혹시라도 왕국의 기사들인 건 아닐까.

‘하지만 저번의 해변과는 멀리 떨어진 곳인데.’

기사들이 기구로 날아와 마을을 공격했던 것을 보면 이 통로를 모른다고 봐야 할 것이다. 통로를 이용하면 기습하여 더 신속하게 끝낼 수 있었을 테니까. 수지는 해변에 배가 정착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자신과 비슷한 복장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굴러다니는 해초처럼 물이 밀려오는 바닷가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잠시 그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던 수지는 한 여성의 얼굴을 확인하고 크게 놀랐다.

“루지?”

분명히 그녀였다. 파리한 얼굴이었지만 아는 이목구비에 수지는 한걸음에 그녀에게 달려갔다.

‘다쳤잖아?’

가까이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더욱 안 좋았다. 피부는 창백한 푸른빛이었고 군데군데 피가 흘렀다. 두 팔과 목에는 끈으로 묶였던 흔적도 있었다. 수지는 그녀가 숨 쉬는 것을 확인하며 얼른 바르게 누울 수 있도록 몸을 돌려 주었다. 로난의 안타깝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에게 공격당했나 봐요.”

그의 시선은 루지 바로 옆에 있던 남성에게 꽂혀 있었다. 가늘지만 숨을 뱉는 루지와 달리 그는 완전히 숨이 끊긴 상태였다. 아마도 등에 커다랗게 난 자상 때문인 것 같았다. 붕대로 감은 흔적이 있지만 출혈이 심했는지 옷이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로난은 불쌍하다는 시선을 떼어 옆쪽에 누운 사내로 보냈다.

“이쪽은 살아 있네요. 상태는 썩 좋지 못하지만요. 배를 찔린 것 같아요.”

로난은 그를 유심히 살펴보며 말했다. 수지는 처음 보는 사람의 시체에 겁을 먹는 것도 잠시, 남은 사람이라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혈을 위해 옷을 잘라 붕대를 만들려고 하는데 루지가 눈을 떴다.

“아. 아아악-!”

루지는 일어나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겁에 질린 그녀를 보면서 수지는 얼른 두 팔을 벌렸다. 상체를 품을 듯이 꼭 끌어안자 비명이 잦아든다. 루지는 넋이 나가서 수지를 바라보았다.

“어?”

“나예요.”

“어어?”

그녀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듯이 멍한 소리를 반복했다. 수지는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머릿속이 진정됐는지 루지가 그녀를 알아봤다.

“수, 수지?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와 준 거예요? 우, 우리, 도망쳤는데……. 아버지가 밀어 넣은 통로로 간신히 기어 나왔는데……. 근데 해변에서 더 갈 데가 없어서, 자만이 쓰러지고 파루마저 쓰러져서…….”

중얼거린 루지는 곧 쓰러져 있는 남자 둘을 발견했다. 놀라서 달려간 그녀는 곧 한 명이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수지는 슬퍼하는 그녀를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한동안 어깨를 들썩거리던 루지는 벌게져 부푼 눈을 두 손으로 닦으며 말했다.

“이, 이럴 줄 몰랐어요. 기구가 도착했을 때만 해도 저는 들떠 있었거든요. 드디어 바라던 외부와의 교류가 이루어진다고요. 정말 바보같이 좋아했죠. 흑. 아버지 말이 맞았어요. 외부인들은 좋지 않아요. 왕국의 권력자들은 모두 살인마들이고요!”

그러면서 또 울음을 크게 터트리는 루지였다. 수지는 그녀의 상태가 걱정되었기에 잠시 쉬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 옷을 마저 잘라서 파루의 상처에 가만히 덧대어 주었다. 로난이 찾아 온 뾰족한 조개껍질로 천을 고정해 주자 파루의 입에서 조금 편안해진 호흡이 빠져나왔다. 루지는 흐느끼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파, 파루는 아버지의 명으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어요. 원래는 그들을 지켜야 했는데……, 묶인 저를 구하겠다고 검에 뛰어들었다가 크게 상처를 입고 말았죠. 흑. 그 혼자라면 도망이라도 갔을 텐데……. 나 때문에 다친 거예요.”

그녀는 자만이란 자를 보면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대충 흐느끼는 소리를 들어 보면 통로로 들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공격을 막아 냈던 자가 그였던 것 같다. 수지는 극심한 공포로 떨고 있는 루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거죠? 왕국의 기사들이요! 그들은 내려오자마자 무작정 공격했어요! 아버지의 말을 들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고요! 우리를 무슨 쓰레기처럼 보면서 검을 휘두르는데……! 정말 무서웠어요! 가족들이, 친구들이. 이웃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데……. 너무 끔찍해서…….”

루지는 또다시 울음소리를 내었다. 수지는 괴로워하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그녀를 더 괴롭게 옥죄는 거 같아서. 그저 안타깝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수, 수지는 괜찮아요? 어떻게 여기 온 거예요? 기구를 본 거예요? 호, 혹시 렉스도 함께 왔어요? 그, 그라면 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붙잡힌 마을 사람들을 구할 수도 있고요! 도와줘요, 제발! 제, 제가 줄 수 있는 건 다 줄게요! 제 목숨까지 줄 테니 제발…….”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희망에 차서 외치던 루지는 곧 수지 옆에 누군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년만이 있는 것을 확인하자 루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수지를 바라봤다.

“그는 어디에……?”

수지는 힘겹게 말했다.

“왕국으로 갔어요. 기구에 실려서…….”

몹시 놀란 루지의 얼굴에 수지는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왕국에서 렉스를 잡아가려고 기구가 도착했고 마나 폭발이란 게 터졌다고. 그래서 렉스가 크게 다친 채 여길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세세한 설명은 생략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루지는 이해가 갔는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렉스가 떠났군요. 어쩐지. 늪지에 있다면 수지를 혼자 둘 사람이 아니죠. 무서워도 철저해서 수지를 품에서 떼어 놓을 남자가 아니니까. 그가 있다면 우리 가족들도 찾을 수 있을 텐데.”

“…….”

“어떡하죠? 자만은 죽고 파루는 다치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너무 무섭고 화가 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다시 울음을 터트린 루지를 보면서 수지는 라이터를 꺼냈다. 갑작스러운 물건에 그게 뭐냐는 듯이 루지가 고개를 들었다. 수지는 천천히 말했다.

“전 렉스를 찾아보려고요.”

“아.”

“그러려면 바다를 건너야 하고요.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불을 피워서 조난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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