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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71)화 (71/163)

71화

“인간들의 영역?”

설마 루지가 사는 마을을 말하는 걸까. 수지의 예상대로 로난은 그들의 거주지를 지날 것을 제안했다.

“그 땅에는 옛날에 이 늪지로 들어와 마을을 만들었던 인간들의 통로가 존재해요. 어떻게 아냐고요? 할머니의 할머니에게 전해져 온 이야기에요. 인간들이 이 늪지로 와서 괴물들에게 공격당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 통로를 지났기 때문이라고요! 통로는 섬의 외곽에서 마을 중앙까지 이어진다고 해요. 지금도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통로를 이용하면 해변으로 수월하게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물론 해변으로 나가서 바다를 어떻게 지나냐는 또 다른 고민거리겠지만요.”

로난의 말은 어떻게 해변으로 나가야 할지 고민하던 수지에게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의 말처럼 나중에 바다를 어떻게 건너가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우선 하나씩 해결하기로 했다.

“통로를 사용하려면 마을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겠지?”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나와 줄 것인가. 지난날 끝맺음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루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가서 도움을 요청해 봐야지. 수지는 로난에게 마을로 향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힘찬 응답이 돌아왔다.

“제가 안내할게요! 마을로 가는 길은 잘 알아요!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금방이거든요!”

푸른 새는 희망의 새가 맞다. 수지는 환하게 웃는 로난을 향해서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출발은 다음 날 하기로 했다. 로난의 도움을 받아 거처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어스름이 하늘 저편에서부터 시작해 늪지 구석구석을 물들이고 있던 것이다. 밤에 길을 떠나는 건 늪지 동물인 로난도 찬성하지 않는 터라 수지는 좁은 거처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 길을 떠나기로 했다. 수지는 찌그러진 냄비에 구해 온 열매를 투하했다.

“좋아요! 그 연녹색 열매는 맨 마지막에 넣어야 해요. 향기는 좋지만 물에서 금방 눅눅해지거든요. 씹히는 맛이 없으면 싫잖아요.”

로난은 새치고는 지나치게 인간의 요리 문화에 익숙했다. 표현력도 좋았다.

“그 채소는 오래 끓이면 국물이 구수해져요. 추울 때 먹으면 몸이 따끈해지는 게 정말 좋죠. 마치 배에 깃털을 두른 것처럼 말이에요.”

수지는 그의 설명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로난은 왜 웃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지는 말을 너무 잘해서, 라고 이유를 말했다. 로난은 조금 부끄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실 가족들한테 많이 혼나요. 너무 인간의 음식을 좋아하고 선호한다고요. 하지만 우리가 먹는 딱딱한 열매나 씨앗보다 인간들이 먹는 부드럽고 따뜻한 수프가 훨씬 맛있는걸요? 열매도 하나를 먹을 때보다 여러 개 함께 먹으면 더 맛있고요. 그거 알아요? 감자와 뾰족 나뭇잎은 같이 끓여 먹으면 무척 고소해요. 향긋한 감자 수프는 몇 번을 먹어도 질리지 않죠.”

로난은 행복하게 떠들며 원주민 마을에서 알아낸 요리법을 기꺼이 수지에게 전수했다.

“저 녹색 줄기는 손가락으로 찢어서 국물에 띄워 봐요. 그럼 맛이 더 깊어져요.”

냄비에서 아주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올라왔다. 늪지에서 음식점에서 만든 듯한 요리를 먹게 될 줄이야. 수지는 신기해하며 먼저 로난에게 한 수저 떠서 건넸다. 로난은 그걸 먹고는 방글방글 웃었다.

“먹어 봐요, 어서요!”

기대 가득한 심정으로 한 입 떠먹자 정말로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국물이 입 안을 채운다. 수지는 그 뒤 허겁지겁 냄비를 비웠다. 로난도 열심히 따라 먹었다. 그렇게 조용한 거처에는 음식을 먹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밤에는 추위가 몰려왔다. 수지는 두 팔로 몸을 끌어안았다. 그래도 음산한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렉스가 없는 밤은 온기란 걸 까먹고 냉기와 외로움만 지닌 것 같았다. 수지는 잠을 청하려고 애썼으나 살갗을 에는 바람에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무언가 보드라운 것이 수지의 팔에 닿았다.

‘어?’

수지는 눈을 크게 떴다. 밖에 나가서 주변을 살펴보고 온다던 로난이 푸른 새의 모습으로 들어와 깃털을 팔에 올려놓은 게 아닌가. 원래는 감싸려던 것 같았지만 작은 새라서 그게 뻗을 수 있는 전부인 듯 보였다. 수지는 눈을 깜박였다.

‘고마워.’

뭉클한 마음에 추위도 조금은 걷히는 것 같다. 수지는 푸른 새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아침이 되자 몸이 한결 가뿐했다. 수지는 감탄하면서 다리를 움직여 보였다. 어제보다 확실히 움직이기 편했다. 허벅지 상처 또한 희미해졌다는 걸 깨닫자 새삼스럽게 제 몸이 어떤지 와닿았다.

‘내일이면 다 낫는 거 아냐?’

심각한 상처도, 화상도 며칠이면 없어지는 몸이라니. 누가 보면 신기한 인간이라고 잡아가려 하지 않을까.

수지는 타인에게 쉽게 밝힐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어깨에 매달린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무기와 요리에 쓸 냄비와 식사 대용인 열매가 든 주머니. 수지가 챙긴 것은 이 두 가지가 다였다. 나머지는 늪지에서 그때마다 구하기로 생각하며 그녀는 지난날 렉스를 끌고 왔을 때 썼던 배를 잡아끌었다.

머리 위 새는 분주하게 날개를 파닥였다. 가는 길에 괴물이 있으면 크고 짧게 울며 수지에게 숨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육식 동물들은 수지의 금빛에 곤란하다는 듯이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그렇게 서너 차례 피하고 도망가기를 반복하자 어느덧 은빛으로 빛나는 강물이 보였다.

‘확실히 도움이 많이 돼.’

안개가 덮인 땅에선 로난이 방향을 잡아 주고 위험을 알려 준다. 그리고 손등의 금빛은 무시무시한 괴물을 멀리 쫓아내 준다. 수지는 이 둘이 자신과 함께한다는 것에 감사하며 배에 올라탔다. 땀이 흥건한 이마는 시원한 강바람에 편히 식도록 두었다. 어느새 로난도 날개를 접고 선체에 앉아서 둥실둥실 몸을 흔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자.’

수지는 긴 나무 막대기를 힘주어 밀었다. 등에 땀이 배도록 저어 가며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던 그녀는 정찰을 나간 로난이 파란 날개를 다급하게 퍼덕거리며 돌아가란 신호를 보내자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지?’

날갯짓은 심각해 보였다. 수지는 마을 벽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지 않고 멀찍이 배를 세웠다. 조심스럽게 로난의 신호에 맞춰 한 발자국씩 다가가던 수지는 타는 냄새를 맡았다. 고개를 들자 마을 위쪽으로 검게 치솟은 연기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작지만 단단하게 보이는 기구가 하나 떠 있었다.

‘설마…….’

마을을 공격한 게 저것일까. 수지는 겁이 나서 냄비를 꽉 잡았다. 잠시 후, 로난이 날개로 입가를 가리면서 움츠리라는 동작을 선보였다. 수지는 재빠르게 덤불에 몸을 납작 엎드렸다.

오래지 않아 쿵쿵, 서너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은 컸고 소리는 무거웠다. 갑옷이 무릎에 부딪혀 딱딱거리는 듯한 불편한 소음도 이어졌다. 수지는 숨을 멈춘 채로 걷는 자들이 떠드는 말을 들었다.

“……어떡할까요?”

“핵심 인물은 모두 잡았으니까. 나머지는 쫓아갈 필요 없어.”

“하지만 도망간 자들이 동족들을 구하려고 나중에라도 쫓아오지 않을까요?”

수하의 말에 기사단장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이? 그들은 늪지에 사는 야만인들일 뿐이야. 철제로 만든 갑옷이나 무기도 없이 그저 얇은 옷 하나 걸친 채 열매를 따고 식물을 주워 잎사귀 안에서 자지. 그나마 이 지역에 괴물이 적어서 생존하는 거지 마을 밖으로 벗어나면 금방 죽을 거야. 이번 습격에 단번에 무너진 꼴을 봐. 기껏해야 알고 지내는 괴물에게 마을 방어를 맡긴 거 외에는 그들이 제 마을을 지키기 위해 한 게 뭐가 있나? 헐렁해 빠진 활이나 무딘 칼로 우리를 공격한 게 다였어. 전하의 말씀처럼 예전에 없애 버려야 했던 우리 왕국의 불법 체류자들일 뿐이지.”

기사단장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주변을 돌아보고 더 이상이 없으면 돌아가지. 이 늪지에 더 있다가는 갑옷 안이 습기로 꽉 차 몸이 흐물거릴 지경이니까.”

“알겠습니다.”

수지는 그들이 떠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발소리가 멀어지자 수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늘에서 기구로 이어진 긴 밧줄이 보였고 붙잡힌 마을 주민들이 그것을 잡고 올라가는 게 보였다. 착잡했다. 루지도 저기 있을까. 유심히 살폈으나 멀어서인지 잘 확인할 수 없었다.

이윽고 기사들까지 모두 태운 기구가 하늘 저편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지는 마을 방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벽은 반쯤 무너진 채로 처참해진 내부를 드러냈다. 식물로 만든 집들은 모두 불타 있었고 무기를 들고 반항했던 자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곡식과 씨앗, 옷감과 애벌레 등 마을이 귀하게 취급했던 것들은 모두 군홧발에 짓밟혀서 가루가 되어 흩어져 있었다.

삐삐.

로난이 슬픈 음색으로 울었다. 수지는 어두운 눈길로 망가진 마을을 둘러보았다. 이 마을이 무슨 해가 된다고 이렇게 파괴해 버린 걸까.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수지는 착잡한 심정으로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살폈다. 혹시라도 루지의 흔적이라도 찾을까 싶어서.

“수지, 여기서 바람이 느껴져요!”

어느새 사람으로 변한 로난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수지는 그가 가리킨 곳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비석 세 개가 마치 장승처럼 세워져 있는 곳이었다. 로난은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바람을 코로 킁킁거렸다.

“짠 냄새에요. 바다에서 불어오나 봐요. 여기가 그 통로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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