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뭐지?’
그가 깨어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로리엔은 고개를 들었다. 일꾼들이 사령관을 안으로 옮기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수하가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괴물들이 몰려듭니다. 아까 마나 공격에 반응한 모양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공격할까요?”
그녀의 성향대로라면 그냥 왕성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오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뜻밖의 질문이 던져졌다.
“마나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동력이 현재 얼마나 남아 있지?”
“많지는 않습니다만 이 일대를 날려 버릴 만큼은 됩니다.”
“그래?”
로리엔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녀의 눈길은 불경한 늪지를 향해 있었다. 거대한 진흙 괴물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기괴하고 불길한 땅. 몇 번을 보아도 섬뜩하고 낯선 이곳은 왕국의 오점이라는 말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
‘오점.’
그렇다. 저곳은 영원히 지워 버리고 싶을 곳일 뿐이다. 그러니 깊이 생각하지 말아야지. 아까 만난 여자의 선한 얼굴을 애써 지우며 로리엔은 입술을 떼었다.
“남은 동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위협은 제거한다. 그것이 얼마나 미약한 가능성이어도. 로리엔은 렉스가 두 번 다시 이 이상한 늪지에 관심을 두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겐 그것이 무척이나 중요했다. 따라서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다. 로리엔은 단호한 어조로 명했다.
“공격해. 어떤 것도 살아남지 못하도록.”
명확한 지시에 수하가 연금술사들에게 공격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마나가 응축되어 돌아가기 시작한다. 습기를 모두 태워 버리는 열이 응축되고 공기가 흔들렸다. 일순간 모든 게 정지된 것처럼 힘이 압축되었을 때였다. 포열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파앙-!
일대가 들썩거렸다. 까만 연기가 적란운처럼 높게 치솟는 것을 보면서 로리엔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
거대한 기구에 실려 렉스의 몸이 사라지고 난 지금까지도 수지는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렉스가 깨어나 내려오는 건 아닌지. 이제 괜찮다고 손을 내밀며 함께 도망가자고 하는 건 아닌지. 그런 작은 희망과 기대를 품고 바라본 것이다.
근데.
‘저게 뭐지?’
내려오는 것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눈이 멀 정도로 강력한 흰 빛이 곧장 아래로 떨어지더니 이내 쾅 소리를 내며 지표를 뒤흔들었다. 수지는 부지불식간에 두 팔로 눈을 가렸다. 더운 바람이 훅 불어오더니 이내 감내할 수 없는 열기가 그녀를 덮쳐 왔다.
‘이, 이건-.’
아까의 마나 폭발 여파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그녀는 소용돌이에 휘말린 상태였다.
‘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거센 바람 속 종잇조각이 된 것처럼 온몸이 흔들렸다. 숨을 쉴 수도 시야를 가늠할 수도 없다. 그저 파괴의 바람이 휘두르는 대로 수지는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굵은 길맛가지나무에 부딪쳐 의식을 잃고 말았다.
‘너와 있고 싶어.’
강렬한 목소리. 낮은 저음 뒤에 따라오는 건 저항할 수 없는 눈빛이다. 수지는 그를 바라봤다. 자신의 목을 감싼 남자는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와 있었다.
‘네가 위협이든 아니든.’
그의 숨결이 느껴진다. 동시에 목이 뜨끈해졌다. 그의 손길이 닿은 그곳에서부터 피를 타고 열이 번져 나간다. 그 열은 그의 정체를 대변하고 있었다. 무기라고 저를 지칭했듯이 굉장한 화기를 가진 사람. 그렇기에 두려우면서도 호기심이 생겼다. 처음 봤을 때부터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처럼.
‘……네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라도 상관없어.’
남자는 벌게진 몸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무기가 두렵다면 도망가야겠지만 수지는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무서워도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었으니까. 분명 설레고 있었으니까.
‘정말 성가신 여자라니까. 늘 무언가를 하려 하지.’
남자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수지가 도망가지 않아서 좋은지 잘 웃지 않는 눈가가 아주 조금 휘었다.
‘어디로 가고 싶어? 데려가 줄게.’
남자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수지는 가장 가고 싶은 곳을 떠올렸다. 늪지 밖. 더 시간을 주면 더 구체적인 장소를 떠올리겠지만 일단 지금은 이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수지가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떼려 했을 때였다.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속삭이는 게 아닌가.
‘……생각해.’
‘네?’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렉스의 몸이 붉은빛으로 분해되더니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그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커먼 어둠만이 존재할 뿐.
곧 어둠 속에서 무언가 꿈틀꿈틀 솟아 나왔다. 회갈색의 진흙이었다.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지만 곧 진창에 빠지고 말았다. 축축한 늪의 땅은 꾸역꾸역 그녀를 삼켰다. 수지는 비명을 질렀으나 이내 목까지 진흙이 차올랐다. 공포에 사로잡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아-!”
목소리가 나온 건 바로 그 뒤의 일이었다. 수지는 제 목소리를 듣고 퍼뜩 눈을 떴다.
깊은 물길에 잠겨 있다가 겨우 헤엄쳐 나온 것처럼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허공을 긁는 소리에 수지는 귀를 의심하며 눈을 깜박였다.
곧 그녀는 왜 그런지 알아차렸다. 어째 몸이 불편하다 싶더니 진흙 웅덩이에 몸이 반쯤 빠져서 상체는 나무뿌리에 걸쳐져 있었다. 목은 그 나무뿌리에서 뻗어 나온 덩굴들에 잡힌 채였다. 목이 조여 왔다. 아이러니한 것은 목이 덩굴에 꽉 붙들린 상태라서 몸이 웅덩이로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수지는 눈가를 강하게 찡그렸다.
벗어나야 해.
수지는 제 목을 움키고 있는 덩굴들을 쥐었다. 강경한 나무줄기를 쥐어뜯듯이 잡아당기자 기괴한 소리가 나면서 몸이 진흙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수지는 어금니를 악물고 몸을 진흙 밖으로 끌어내려 애썼다. 팔이 미끄러졌고 돌들이 그녀를 할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간신히 웅덩이 밖으로 기어 나왔지만, 시련은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달팽이. 앞에 주먹 두 개를 합친 듯한 연체동물이 다가와 있었다. 달팽이는 얼어 버린 수지를 투명한 눈으로 보고는 그녀의 상처 난 팔에 달라붙었다. 이윽고 쭉쭉 피 빠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달팽이의 반투명한 몸속으로 붉은 피가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수지는 일어나서 달팽이를 털어 내려고 했다.
“!”
그러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뒷골을 강타한다. 수지는 그대로 무릎 꿇고 말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뭐지? 뭐가 이렇게 아픈 거지? 사시나무처럼 떨며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진흙으로 엉망이 된 허벅지가 보이고 그곳을 관통하고 있는 굵은 나뭇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수지는 나지막한 탄성을 터트렸다.
“아-.”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도 다리 전체가 통증에 휩싸인다. 수지는 두 눈을 꾹 감은 채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엉엉 울고 싶어졌다. 어떻게야 할까.
‘움직일 수 없어.’
늪지에서 다리가 꿰뚫리고 말다니. 그건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고통에 붙어살아가는 기생충처럼 절망적인 생각이 이어졌다. 꿰뚫린 부위가 곧 썩을 것이고 썩으면 다리를 못 쓰게 될 것이다. 이동하거나 도망갈 수 없는 자신은 최약체였다.
수지는 기가 막히고 암담해져서 고개를 떨구었다.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이미 죽은 목숨인데.
죽어서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할 것이다. 이 늪지에선 미생물이 그녀보다 더 위였다. 뼈도 남지 않고 잘게 분해되어 잡아먹히겠지.
렉스를 구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제 몸에 대해서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왜 이 세계로 왔는지, 다시 삼촌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채로 이렇게 사라진다는 사실에 허망함과 무력감이 덮쳐 왔다. 수지는 바닥에 얼굴을 묻으려고 했다.
‘……생각해.’
그때 떠오르는 문장 하나. 수지는 멍하니 그걸 따라 했다.
“늘 네 몸만 생각해…….”
누가 말했더라? 그래, 꿈속의 남자가, 이 늪지에서 만난 무섭고 신비로웠던 사내가 말했다. 수지는 천천히 아린 눈을 떴다. 그의 말을 따라야 했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눈가를 두 손으로 닦았다. 그리고 팔뚝 위에 올라앉은 달팽이와 눈을 맞췄다. 신기하게도 수지가 쳐다보자 달팽이도 그녀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달팽이는 상처 부위의 피를 다 빨아먹었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며 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수지는 달팽이가 지나간 곳이 마비된 것처럼 덜 아프다는 것을 발견했다. 피가 얼마나 뽑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지혈의 효과도 있었다. 달팽이가 떠나지 못하도록 덩굴로 등 껍데기를 팔에 묶어 놓았다. 그렇게 연체동물을 사로잡은 그녀는 주머니를 뒤적여 아까 사용했던 신물(新物)을 꺼냈다. 그 소용돌이에서도 용케 떨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라이터.’
이것 덕분에 기구에서 낯선 자들이 내려왔었다. 강가에서 거처로 돌아온 수지는 라이터를 이용해 연기를 피워 그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폭발의 여파에도 가방 속의 라이터는 멀쩡했다. 냄비도 찌그러지긴 했지만 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수지는 그것들을 챙겨 놓은 채로 그들이 렉스를 데려가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설마 그 뒤 마나 폭발을 일으킬 줄은 몰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