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아.”
“영광으로 알라고. 내게 직속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는 국왕 폐하밖에 없으니까.”
그러면서 슬며시 수지의 머리를 쓰다듬는 렉스였다. 수지는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인지 아니면 어여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곧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파하지만 않는다면야.
“큭.”
그러나 그 바람이 무색하게 렉스는 가슴을 잡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수지는 하얗게 질려서 얼른 그를 붙들었다. 몸이 몹시도 뻣뻣했다. 그를 마른 장작같이 만들어 버린 경직에 놀라서 수지는 그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마비를 풀어 볼 수 있을까, 애타는 심정으로.
“……무섭지 않아.”
얼마나 주물렀을까.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을 때, 렉스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수지는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고개를 든 렉스가 보였다. 그의 낯빛은 으스름한 늪지의 색깔처럼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섭다며 뒤로 물러났겠지만 수지는 달랐다. 이미 알고 있는 공포였고 받아들인 두려움이었다.
렉스는 천천히 한 자 한 자 새겨 넣듯이 말했다.
“네가 어떤 존재든.”
그의 눈빛은 선명하게 빛났다. 그 선명함은 확신의 표현이었고 부동한 마음의 대변이었다. 렉스는 그녀가 자신을 죽일 존재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누구보다 명확하게 그걸 깨달았다. 연금술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수지가 자신을 죽일 운명의 존재여도 개의치 않겠다고.
‘하지만 이 이야긴.’
그녀에게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이미 그녀는 자신을 죽이러 왔다는 말에 한 차례 놀란 상태였다. 공포를 벗어나지도 못한 상태에서 더한 공포를 안겨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중에 상황이 안정되면 말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렉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놀란 듯 떨리던 눈가가 차차 진정되는가 싶더니 곧 부드럽게 휘어졌다.
“다른 세계에서 괴물이었다고 해도 안 놀란다는 거네요.”
뭉클한 심정. 이게 뭐라고 수지는 기분이 좋아져서 대꾸했다.
“난 이쪽 세계의 괴물인데 놀랄 게 뭐가 있을까? 오히려 네가 괴물이라면 그쪽 세계가 얼마나 살기 좋다는 건지 가 보고 싶어지는데.”
수지는 조금 웃었다. 그냥 하는 말이라도 좋았다.
“우리 세계에 놀러 오면 정말 놀랄 거예요.”
“왜?”
수지는 그를 부축했다. 아까보다 덜 뻣뻣해진 몸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전보다 훨씬 걷기 힘들어하는 모습에 수지는 등허리에 꼿꼿하게 힘을 주었다. 양팔에도 아까보다 강한 힘을 끌어냈다.
“신기한 거투성이거든요. 핸드폰이라든지, 컴퓨터라든지, 비행기라든지, 우주선이라든지.”
“그래?”
“네. 몇 달간 집에 틀어박혀 안 나올지도 몰라요. 구경하고 게임하느라 바빠서요.”
수지는 걷기 시작했다. 그를 끌어안은 채 질척거리는 땅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몇 없는 일이었다.
강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강을 앞두고서 괴물을 만났다는 것이다. 수지는 자신을 공격하는 거대한 식충 식물을 보면서 바닥에 있는 돌을 던져 집어던졌다. 그러나 그건 식물을 화나게 했을 뿐, 별 효과가 없었다.
수지는 일단 렉스의 앞에 서서 괴물의 시야를 차단했다. 라이터가 있다면 좋았을 텐데. 괴물을 저지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려던 순간, 거대한 촉수가 날아오자 그녀는 얼른 렉스를 옆으로 밀어 놓은 채 제 몸을 던졌다.
하지만 아픔이 없다. 눈을 깜박이자 렉스가 한 손으로 촉수를 붙잡은 게 보였다. 꿈틀거리는 촉수는 바로 코앞까지 와 있었고, 렉스는 힘겨운 숨을 뱉으면서 수지를 힐끗 바라보았다.
“뒤로 가.”
“네?”
“지저분해질 거야.”
수지는 더 물어보지 않고 얼른 뒤로 빠졌다. 그러자 렉스가 악력을 주어 촉수를 터트려 버렸다. 팽! 하면서 지저분한 액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식충 식물은 자신의 촉수가 없어지자 고통스러운 듯이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그렇게 끝이 난 줄 알았는데, 줄기를 꼰 식물에서 작은 촉수들이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가시처럼 날카로운 촉수의 끝은 렉스의 몸을 향해 달려들었다. 렉스는 팔을 움직여 그 촉수를 터트렸지만 경직된 근육 때문인지 움직임이 시원치 않았고 곧 여러 군데 팔에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
수지가 화들짝 놀란 것과 달리 렉스는 침착하게 자신의 팔을 꿰뚫은 촉수를 잡아 뺐다. 피가 울컥하고 쏟아지는 것을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어 수지는 애벌레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 근처라서 그런지 애벌레의 주 서식지인 뻑뻑한 나뭇잎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며 고개를 두리번대는 수지를 렉스가 불렀다.
“봐. 강이야.”
어느새 그의 시선 끝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이 있었다. 렉스는 그걸 보면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제 안전할 거야.”
그의 눈가는 아주 조금 휘어져 있었다. 수지는 그 눈가를 보면서 잠시 굳어 있었다. 아까부터 그가 이상했다. 수지는 그를 좀 더 관찰했다. 그는 미동도 없었다.
“렉스?”
“…….”
“렉스.”
“…….”
“렉스!”
이내 감긴 눈가.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수지는 그의 가슴에 얼른 귀를 대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가슴이 쿵쾅쿵쾅 요동쳤다.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을 뒤로하고도 그녀의 마음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양 사나웠다. 지금 그가 죽은 건가? 아니 멈춘 거야? 수지는 그의 했던 말을 떠올리려 애썼다. 아까 뭐라고 했더라? 주, 죽지 않는 몸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마나가, 마나가…….”
수지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손 아래 느껴지는 감각이 오싹하리만큼 차가웠다. 아까까지 자신이 부축했던 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직되어 얼어 버린 육체에 수지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절망감이 그녀를 내리눌렀고 슬픔이 그녀를 삼켰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태. 그녀가 커다랗게 커진 눈을 깜박일 때였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광경이 있었다.
“……카리반.”
아름답게 빛나는 강물과 울창한 수풀, 망망한 갈대와 기괴한 생물들이 어우러진 늪지의 광경 말이다. 그 광경이 뭐라고 이토록 시리도록 신비로운 걸까. 절망적인 순간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알려 주려는 걸까. 수지는 이 광경을 가르쳐 주었던 남자를 떠올렸다. 늪지가 무섭고 두려워도, 마냥 그런 것만은 아님을 알려 준 사람.
‘렉스.’
수지는 그를 바라봤다. 고이 잠든 그는 마치 작동이 멈춘 조각상 같았다. 움직일 동력을 잃은 아름다운 전신상. 수지는 상처 가득한 그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마나만 공급하면 돼.”
멍하니 있던 그녀는 서둘러 눈물이 어른거리는 눈을 닦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저번에 강에서 탔던 배를 찾았다. 배는 강어귀에 덩굴로 묶여 있었다. 수지는 그걸 풀어서 진흙이 가득한 땅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끙끙거리며 렉스를 태웠다. 배의 위쪽, 튀어나온 부분에 덩굴을 다시 묶은 그녀는 두 손으로 온 힘을 다해 줄을 잡아끌었다.
* * *
“로리엔 님! 일단 전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괴물들은 모두 쓸어 버렸지만 언제든 다시 나올 수 있는 상황인지라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수하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빗소리에 가려지지 않은 그 큰 고함 소리에도 로리엔의 입술은 굳게 닫혀만 있었다. 답답했는지 수하가 그녀의 이름을 다시 한번 외쳤다.
“로리엔 님! 어떻게 하실 건지, 계속 싸우실 건지-.”
“……퇴각 준비를 해.”
“네?”
기사가 진심이냐는 듯이 되묻자 로리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걸 말하는 것이 몹시도 쓰다는 듯이 그녀는 쥐어짜는 어투로 말했다.
“떠날 준비를 하라고!”
“아, 예!”
기사가 저쪽 간판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로리엔은 어둡고 칙칙한 눈으로 늪을 내려다보았다.
이 끔찍한 습기를 품은 땅덩어리에 결국 수십 명의 값비싼 목숨만 버린 채 쫓겨나야 한다니.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이 비참했다. 설사 수백 명의 기사를 잃더라도 렉스 하나만은 되찾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 이상하고 괴상한 늪은 렉스를 내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왜 왔냐는 듯이 수백 마리의 해괴한 괴물들을 보내 기사들을 처단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국왕은 물론이고 까다로운 고위층에게서 어떤 말이 들려올지 뻔했다. 로리엔은 혼나는 게 겁나는 게 아니었다. 렉스를 잃은 채로 홀로 왕성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괴로웠다. 자신의 보물을 잃어버리고서 혼자만 그 커다란 성에 입성해야 한다는 것이.
따라서 아쉽고 미련한 마음에 그녀는 망원경을 들어 늪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렉스가 보일까 싶어서. 그러한 그녀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믿을 수 없어 그녀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다.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수하가 다가왔다. 왕성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그를 보면서 로리엔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멀쩡한 기사가 몇이 있지?”
“네?”
“아래로 내려갈 기사가 몇이 있냐고!”
“아. 다섯 명 정도는…….”
“좋아, 내려간다!”
“네?”
수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러나 로리엔은 설명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기사를 찾아 갑옷을 껴입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 역시 마법의 가루와 무기를 챙겼다. 여태 기구에 탄 채로 지휘를 했던 터라 갑자기 다른 면모를 보이는 그녀가 무서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그녀는 서둘러 밧줄을 내려 기사들과 하선하기 시작했다.
굳어 있던 수하는 서둘러 망원경을 보았다. 늪지 한군데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