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수지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단순히 하는 말 같지 않았다. 진지하면서 엄숙한 렉스의 표정을 보면서 수지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잠깐만요. 다시 살아난다니요? 렉스는 그럼 죽어서도 죽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죽었다는 상태 표현이 정확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인간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그는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얼핏 죽은 듯 보여도 피를 섭취하면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드라큘라 같은 존재인 건지 알고 싶었는데 렉스가 ‘비슷해.’라고 답해 왔다.
“목이 잘리지 않는 이상, 웬만한 상태 이상은 마나 공급으로 해결할 수 있어. 숨이 멎은 것과 별개로 내 몸은 마나로 작동되니까, 마나 공급이 이뤄지면 다시금 움직여지지.”
“그, 그럼 렉스는 목이 잘리지만 않으면 죽지 않는 거네요? 불멸의 존재처럼?”
“이론상으론. 하지만 전쟁이란 게 목이 잘리지 않는 상황보다 목이 잘릴 만한 상황이 더 많은 법이니까.”
렉스는 냉정하게 말했다.
“나는 결국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죽을 거야. 나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출현해 내 목을 날려 버리는 날이 오겠지.”
그 말에 수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렉스는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에선.”
렉스는 수지를 바라보았다. 푹 젖은 상태에서도 빛을 발하는 그녀를 보자 얼어 있던 심장이 슬며시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따뜻하고 편안한 그녀의 존재처럼, 심장에도 이름 모를 온기가 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온기는 온몸으로 퍼져서 그에게 활력을 제공했다. 손발을 쭉 펴고 봄날에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한가로운 짐승처럼. 삶이 흥미로웠고 여유가 넘쳤다.
“그런 생각할 필요가 없지. 너랑 어떻게 살 것인지만 고민하면 되니까.”
그게 좋았다. 더도 덜도 말고. 수지랑 지내는 삶이란 게 단순하면서 흥미를 충족하니까. 노만은 흥미라는 단어를 얕잡아 보고 비하했지만 그것은 그게 렉스의 삶을 바꿀 만큼 파격적이란 걸 몰랐기 때문이었다. 흥미, 그게 아니면 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세상을 어찌 살아갈 것인가. 렉스는 그 대상을 뚜렷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짓 저런 짓 하면서.”
“전 제가 약해서 흥미로운 줄 알았는데요.”
수지는 조금 빨개진 얼굴로 대꾸했다. 날 것의 표현이었다. 렉스는 희미하게 웃음을 베어 물었다.
“그것도 맞아. 그게 흥미의 시작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네 전부에 흥미가 생겼지. 뭘 먹고 뭐에 웃고 뭐에 전율을 느끼는지.”
렉스의 눈길이 그윽한 듯 짙어졌다.
“네 엉덩이를 주무르며 내 것을 쑤셔 넣으면 더 울며 흥분하는 걸 아나?”
“왜, 왜 하필 많고 많은 것 중에 그걸 예시로……. 그 이야긴 지금 하고 싶지 않아요.”
수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쏘아붙였다. 렉스는 그런 수지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지.”
“기사들이 쫓아오는 거예요?”
다급한 동작에 수지가 묻자 렉스가 고개를 저었다. 노만과 그 무리는 치명상을 입었다. 대다수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게 느껴졌고 살아남은 자도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이 연약한 기만을 뿜어 냈다. 렉스는 제 몸을 가리켰다.
“내가 쉴 공간이 필요해.”
“아.”
몸에 남아 있는 마나를 안정시켜서 순환하면 그럭저럭 몸을 예전처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몸이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이 늪지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렉스는 걸음을 재촉했다. 수지가 얼른 그를 부축해 왔다.
하지만 속도가 빠를 수가 없었다. 잘 가던 렉스는 몇 번이나 앞으로 고꾸라졌고 그를 붙들고 있던 수지도 땅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몸을 추스르는 동안 렉스는 몇 번이나 욕지거리를 삼켰다. 온전치 않은 몸뚱이 때문에 도망가는 데 차질을 겪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수지를 데리고 도망쳐야 하건만 도리어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 짐덩어리가 되고 말다니…….
렉스는 어질거리는 정신에 등걸에 앉아 숨을 돌리며 생각했다. 최대한 빨리 강으로 가야 한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몸을 숨길 만한 바위 지대가 나타날 것이다. 그곳에는 괴물들도 많지 않으니 며칠간 몸을 움츠리고 있기 안성맞춤이었다.
“……뭐지?”
몸이 지치니 시야도 흔들린다. 렉스는 안력에 힘을 주려고 애썼다. 수지가 쉬는 동안 무언가를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곧 자신의 등에 손을 뻗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스친 곳이 미끄러웠다.
“애벌레 으깬 거요.”
수지는 착잡한 목소리로 상처 부위에 애벌레 즙을 바르기 시작했다. 커다랗게 박혀 있는 파편이 너무나 아파 보여서 수지의 손은 몇 번이나 멈춰 섰다. 이걸 뽑고 싶은데, 혹시라도 잘못 뽑아 출혈이 커지면 어떻게 될지. 수지는 망설이기를 여러 번 하다가 물었다.
“이대로 두어도 돼요?”
“마나가 순환되면 그때 뽑으면 돼.”
순환과 동시에 피부 재생이 이뤄지기 때문에 파편을 뽑으려면 그때가 적기였다. 렉스는 자신의 상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채로 괴로워하는 수지의 손을 잡아당겼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진짜 괜찮아요?”
수지는 상처 난 가슴을 꾹 눌렀다. 그러자 윽, 소리를 내며 렉스의 눈썹이 일그러지는 게 아닌가. 렉스의 표정은 곧 황당하게 변했다. 수지는 그것 보라며 말했다.
“하나도 안 괜찮잖아요.”
“난 강화된 인간…….”
“그래도 고통은 느끼잖아요. 아프면 괴롭고요.”
말을 하는 수지의 표정은 제가 당한 것처럼 찡그려져 있었다. 고통이 가득한 눈을 보면서 렉스는 왜인지 할 말을 잃었다.
이상하게도 그 눈이 좋았다. 변태 같게도 그 눈에 입 맞춰 주고 싶었다. 제 고통을 자신의 아픔처럼 생각해 주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몽글거리는 가슴의 온기처럼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다. 렉스는 그걸 또 다른 흥미로운 발견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는 네가 예쁘다는 걸 알고 있나?”
“네?”
그게 무슨 개구리 물에 빠져 자맥질하는 소리냐고 묻고 싶었다. 그만큼 어이없었다. 느끼한 듯 관능적인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 있는 남자는 너무나 아파서 정신이 어떻게 된 것만 같았다.
“너는, 네가 예쁜 줄 아냐고.”
“열 있어요?”
수지는 그의 이마에 서둘러 손을 올려 보았다.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도 렉스는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수지의 모른 척하는 반응이 귀여웠다. 아마도 그녀는 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부끄럼이 많은 성격이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을 빨고 핥아도 모자랄 인간.’
렉스는 그런 감정이 충만한 눈으로 수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수지는 그의 그 한결같이 뜨겁고 형형한 눈을 보면서 머뭇거렸다. 분명 심각한 상황인데 렉스의 반응 때문에 어떻게 이 분위기를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좋은 걸까. 수지는 천천히 물었다.
“제가 다른 세계의 존재인데 무섭지 않아요?”
“내가 이 세계의 무기인데 무섭지 않나?”
질문에 질문으로 답이 돌아왔다. 누가 더 무서운 존재인지 말다툼이라도 해 보자는 것일까. 수지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끄덕였다. 렉스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수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서둘러 설명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무섭지 않아요. 처음에 엄청 무서웠지만요. 렉스가 절 죽이려는 건가 싶어서…….”
수지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쿵쿵 불안하게 뛴다. 낯선 늪지에서 그를 만난 순간이 무척이나 섬뜩했다는 듯이. 수지는 크게 울리는 가슴에 손을 꽉 쥔 채 말했다.
“근데 렉스가 절 구했잖아요.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위기 속에서 보란 듯이.”
수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무기라고 불리는 검은 눈의 사내를.
“그러니까 무섭고 두려운 감정보다 고마움이 커요. 렉스가 좋고, 저를 죽이려고 왔다는 것과는 별개로, 절 살려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고요.”
“난 네 인사를 받을 만한 인간이 아니야.”
렉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혹시라도 수지가 오해하면 안 된다는 듯이.
“널 구한 건 흥미로워서였지,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좋은 마음 때문이 아니었어.”
“어쨌든 살려 주었잖아요.”
수지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그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고 만다. 그가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잘 느껴져서 서글퍼진다고 할까. 그는 결코 평범한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수지는 담담히 생각했다. 평범하지 않은데 억지로 평범해질 순 없는 노릇이다. 그는 무기였고 무시무시한 마나를 지닌 존재였다.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수지는 찬찬히 미소 지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밝고 명확한 미소를.
“그리고 절 잘 보살펴 주었고요.”
수지는 제 가슴 위에 올렸던 손을 펴서 그의 가슴 위에 올렸다. 피가 나는 상처 부위를 조심스럽게 훑는 동작을 보면서 렉스의 고개가 다시 수지를 향했다.
“그러니까 반대 상황이 오면 저도 그러고 싶어요.”
“…….”
“렉스를 잘 보살피고 보호해 주고. 그래도 되죠?”
대답이 되었느냐는 수지의 얼굴을 보면서 렉스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곧 그는 얼굴을 한 손으로 쓸면서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유혹해 오면 곤란해.”
“제, 제가 언제요?”
“지금 상황이 안 좋으니까 유혹에는 다음에 반응해 주지.”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어물거리는 수지를 보면서 렉스는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리고 날 보살펴 주고 보호해 주고 싶다고? 당연히 되지. 내가 말했잖아. 네가 명령하는 것도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