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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62)화 (62/163)

62화

짤막한 질문에 남자는 눈치 빠르게 반응해 왔다.

“저는 노만이라 합니다. 벤젠 가문이지요. 유명하지 않은 지방 소도시의 가문이라 들어 보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저 왕가를 위해 충성스럽게 일하는 기사로 알아주시면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왕가? 폐하께서 보낸 기사인가?”

그렇게 말한 렉스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폐하께서 보내셨을 리 없지. 이 길목에 대해 아는 자가 보냈을 거야. 애초에 내게 이 늪의 입구에 대해 아냐며 넌지시 정보를 흘린 자가 있거든.”

렉스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가 말한 자는 왕국에서는 알아주는 책략가이자 기회주의자였다. 바로 왕국의 다음 대 황금의 관을 쓸 사람. 렉스는 그의 이름을 말했다.

“너는 앤드루 왕자가 보내서 왔군.”

“역시 전장에서도 뛰어난 지략으로 유명한 렉스 사령관답게 추리가 명확하군요.”

웃는 모양새가 비열하고 추잡하기 짝이 없다. 꼭 그의 상관인 왕자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렉스는 수지를 바라봤다. 여기서 그녀를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는 것은 자신의 약점을 전시하는 것과 다름없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본능적으로 그녀의 안부를 확인하려는 눈동자와 그녀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입은 그 의지를 배반했다.

“왜 그녀를 구속하고 있지? 날 찾으러 온 거니까 그녀는 놓아줘.”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노만은 빙긋 웃었다.

“사령관님에 대해선 지겹도록 이야기를 들었죠. 전략상 우위를 선점해도 절대 방심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요. 아주 작은 틈이라도 내어 주면 그 틈을 무자비하게 공격해 와서 형세를 뒤집을 테니까요. 그만큼 대단한 실력이라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제 곁에 있을 겁니다. 제 안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겠죠.”

노만은 힐긋 수지를 바라봤다. 수지의 연약한 몸을 바라보는 노만의 눈초리에는 어쩐지 비웃음과 조롱이 깔려 있었다. 이런 곳에 이토록 나약한 여자라니. 마치 뱀이 먹이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렉스는 그 눈깔에 단검을 쑤셔 넣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노만은 그를 쳐다보며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화가 나셨군요? 살기가 느껴집니다. 제가 듣기론 사령관님께선 어느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 완벽한 전투형 인간이라고 들었는데. 예상외군요. 그만큼 이 아가씨가 특별하다는 의미겠죠?”

“만지지 마.”

노만의 손길이 수지의 옆 머리칼을 건드리자 당장에 반응이 나타났다. 노만은 히죽 웃으며 손을 뗐다.

“바로 제 말을 입증해 주시는군요. 큰일입니다. 전쟁을 이끌어야 하는 왕국의 주요 인사께서 여자에게 빠지는 것만큼 위험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앤드루 전하께서도 늘 그런 점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셨죠. 여색에 빠져서 대의가 뒷전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노만은 얼른 그의 몸을 살폈다. 마나가 많이 느껴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마나 기사라면 저 상태만으로도 이미 행동이 불가했을 텐데. 사령관은 움직이는 것도 모자라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노만은 그의 목에 감겨 있는 족쇄를 확인하면서 가만히 미소 지었다. 로리엔의 기사가 그래도 아주 실력이 없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특수 합금으로 만든 족쇄는 마나 기사들이 마나로 반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는 렉스의 행동을 제약하는 무기가 될 터였다.

“전하께서 사령관이 임무를 수행하는 데 방해하는 모든 것을 없애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걸 위해서 왔죠. 사령관님께서 본연의 목적대로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여간 거지 같은 말 한번 그럴싸하게 한다. 렉스는 분노에 기름을 붓고 있는 노만을 보면서 족쇄를 손으로 잡았다. 그러자 손이 타들어 가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억제로 떼어 내려고 하면 반응하는 금속으로, 무리 없이 풀 수 있는 건 연금술사가 유일했지만 렉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을 우지직, 힘으로 떼어 냈다.

“!”

노만의 눈이 커졌을 때였다. 렉스는 부서진 족쇄를 그의 옆으로 던졌다.

깡. 소리가 두 남자의 간격을 보여 주듯 크게 울려 퍼졌다.

“충실한 삶이라니. 목줄이 채워진 삶 말인가?”

노만은 소리 없이 웃어 보였다. 사령관은 자신의 처지가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걸 계속 유지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어째서 이 아가씨에게 애착을 보이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것에는 더한 탐구심과 호기심이 발동한다. 노만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

그러자 수지가 움찔하며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칼끝이 등을 파고드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칼이 자신의 몸을 관통할 거라는 추측도 하고 있겠지. 공포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끝내 울음을 터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과 달리 우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의외군.’

그녀에게서 마음에 드는 한 가지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며 노만은 싱긋 그녀의 뼈 사이에 칼끝을 대었다.

“뭐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무엇이 됐든 사령관님께선 돌아가셔야 하니까요. 로리엔 님이 섬 중앙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안 가신다면 저도 어쩔 도리가 없군요. 가실 때까지 이 아가씨를 불행하게 만들 수밖에는요.”

그러면서 힘을 가하자 수지의 몸이 버들잎처럼 떨렸다. 렉스는 참지 못하고 바로 외쳤다.

“그녀의 몸에서 피 한 방울이라도 흘러내린다면, 네 목에선 그 열 배가 흘러내릴 거야!”

경고하는 렉스 주변으로 음산한 마나가 소용돌이쳤다. 거의 소진했다고 느꼈는데. 노만은 그의 팔다리가 벌건 색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며 놀람을 삼켰다. 역시 왕국의 병기는 병기구나. 마나가 없다고 픽 쓰러지는 기사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노만은 일부러 그를 도발했다.

“제 목이요? 이 아가씨가 감히 저하고 비교가 될 수 있을까요? 기껏해야 사령관님의 아랫도리를 기쁘게 해 주는 사람일 텐데 말입니다.”

“너…….”

“하지만 전 다릅니다. 전하의 직속 기사거든요. 명령 체계에 따라선 사령관님의 말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늪지에서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고요. 이런 저를 무자비하게 죽이시겠습니까? 이 아가씨 한 사람 때문에요?”

사령관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건지를 노만은 실험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사령관은 무척이나 흥분했는지 뿜어 내는 마나가 들쭉날쭉 날카로웠다. 정제되지 않는 힘은 분노를 의미한다. 그리고 무기가 분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노만은 이 여자가 사령관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유는 몰랐지만 말이다.

“저를 죽이고 싶으십니까? 살기가 피부로 느껴지는군요. 저와 제 수하들을 모두 핏덩이로 만들 차가운 기운이 말이죠. 이거 제 손이 다 떨립니다.”

노만은 그러면서 얄밉게 칼을 더 수지의 등에 바짝 갖다 대었다. 렉스는 그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진작 알아차린 상태였다. 문제는 알면서도 수지에 관한 일이라 마음대로 몸이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분노와 살기를 꾸역꾸역 누르면서 렉스가 말했다.

“로리엔에게 내가 돌아가면 되나?”

“네, 그렇죠. 돌아가시면 됩니다. 근데 정말 돌아가실 겁니까? 아, 이렇게 되묻는 게 이상하다 보지 마세요.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죠. 감정이 없다고 알려진 무자비한 사령관께서 한 여자를 구하고자 여태 거부하던 일을 하시다니.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감정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 여자가 뭐라고 말입니다. 기껏해야 흥미를 유발한다면 모를까, 사령관께서 여자를 살려 둘 이유가…….”

노만은 제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것인지 갑자기 눈을 빛냈다.

“그거군요! 흥미! 무감한 사령관께서 여자에게 마음을 쏟는 이유 말입니다. 분명히 이 여자가 흥미로워서 그런 거예요?”

비음이 더욱 커졌다. 노만은 말이 없는 사령관을 보며 더욱 자신감을 얻었다. 사령관이 이 여자에게 애착을 갖는 이유, 그녀를 구하려는 이유, 특별하게 대하는 이유의 가닥을 잡아 가는 것만 같았다.

“그냥 여자였다면 흥미로워하지 않았을 거예요. 매일 수십 명의 귀부인과 미녀들을 보는 사령관님이시니까요. 그렇다면 이 가냘픈 여자는 뭐가 달랐을까요? 숨겨진 힘? 상냥한 태도? 끝내주는 밤 기술? 아니에요. 그런 걸로는 사령관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없죠. 분명 특별한 게 있는 겁니다. 사령관님께서 이 늪지로 애초에 올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분명한 이유가. 혹시 그녀는…….”

노만은 사령관의 반응을 민감하게 살폈다. 침묵한 사령관은 마치 어둠의 사신처럼 고요했다. 일부러 반응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노만은 의미심장하게 의혹을 던졌다.

“사령관님께서 원래 죽이려던 목표가 아니었는지.”

“…….”

“그렇죠? 하하! 그런 거예요! 제가 맞지요? 그녀는 바로 사령관님의 임무 대상이었던 겁니다!”

눈을 부릅뜨고 꺽꺽 웃는 모양이 병에 걸린 미친놈 같았다. 그만큼 답을 찾아서 기쁘다는 모양새였지만 렉스는 귀찮게 됐다며 손으로 젖은 머리를 뒤로 쓸었다.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하는 수밖에 없나.

“나름대로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군.”

“칭찬 감사합니다. 전하께서도 그래서 절 예뻐하시지요.”

“그런가. 하지만 앞으로는 예뻐할 새 수하를 찾아야 할 거야.”

“네?”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렉스의 몸이 움직였다. 일차적으로 렉스의 상대는 노만이었다. 렉스는 마나를 뿜어 노만의 가슴을 후려쳤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노만이 윽 소리를 내며 뒤로 나동그라졌을 때, 렉스는 두 손을 교차해 더 강한 마나를 끌어냈다.

쾅.

마나 폭발은 노만을 향해 있었다. 노만은 서둘러 특수 합금으로 된 검을 빼 들었다. 그러나 마나를 방어했어도 그 여파까지는 피할 수 없었고 노만은 그 상태로 더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수하들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암기가 아니라 폭탄이었다. 렉스가 한 번에 쳐 낼 수 있던 것은 서너 개가 한계였다. 놓친 하나가 수지에게 달려드는 것을 발견한 렉스는 바로 제 몸을 던졌다.

‘……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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