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으, 으아-!”
렉스는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마나 인간에게 마나가 사라지는 것처럼 무서운 게 있을까. 아더는 괴로워하는 렉스를 보면서 검을 내렸다. 빛이 사라지며 검은 어느새 평범한 철검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더는 거친 숨을 뱉으면서 기사들에게 그를 포박하라고 했다. 그러나 렉스가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살기를 흩뿌리자 그들은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아더는 그 모습에 진정 감탄하고 말았다.
‘대단한 인간이야.’
군인으로서 그의 정신력은 탄복할 만한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적을 향한 살의를 잃지 않는다. 그 끈질긴 적개심이 전장에서 적들에게는 큰 공포를 선사하고 아군에겐 뜨거운 전의를 고취하리란 걸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훌륭한 무기란 막강한 힘만을 지닌 존재가 아니다. 적에게 끝없는 절망과 두려움을 선사하는 자다. 따라서 아더는 경외에 가까운 존경심으로 그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마나 억제제. 저게 묻으면 마나 기사들은 맥을 못 추고 쓰러진다.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간혹 나약한 기사들은 죽기까지 하는 물건인데. 사령관은 괴로워할지언정 눈을 부라리며 모두를 씹어 먹기라도 할 듯한 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더는 기꺼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내가 직접 하겠다.”
수하의 손에서 구속구를 받았을 때였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조금씩 움직이는 게 아닌가. 신음이 삐져나오는 줄 알았다. 마나 기사를 포박하려면 특수 금속이 들어간 밧줄과 족쇄를 써야 하는데, 일반 것들보다 훨씬 날카롭고 강하게 피부를 압박하기 때문이었다.
“……아나?”
족쇄를 목에 걸자 그의 입에서 문장이 빠져나왔다.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더는 네? 하면서 되물어야 했다.
“……비 오는 날 나타나는, 큿, 괴물을 아냐고.”
아더는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때마침 비가 오고 있긴 했다. 이 늪지의 환경이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는 것은 들었던 터라 그리 놀랍지도 않은데.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이 갑옷에서 더 크고 불길하게 튕겨 올라왔을 때였다.
“윽!”
기사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아더는 눈을 크게 떴다. 시야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숨은 적인가?”
기사들이 긴장하며 마나를 뿜어냈다. 그러나 마나로 벌게진 팔을 휘두르기도 전에 무언가가 그들을 덮쳤고 기사들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아더는 흠칫해서 기사들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보이지 않는 적이라면 다시금 마비 능력을 사용해서 죽이는 게 유리해 보였기 때문이다.
“큭!”
그러나 마나가 깃든 검을 공중에 치키려는 순간 무언가 그를 덮쳤다. 차가운 물이었다. 난데없는 물벼락에 놀랐지만 아더는 침착하게 마나를 뿜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손과 팔이 치키는 동작 그대로 멈춰 버렸다.
‘평범한 물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더가 난감해하며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비뚤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도 기괴한 능력을 지닌 괴물들이 있어.”
사령관. 그는 아까보다 더 수월하게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내리는 비에 마나 억제제가 씻겨 나가는 것이다. ……시간이 얼마 없어. 얼른 그를 묶어 끌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굳어 있던 기사들이 갑자기 엎어지더니 무언가에 끌려가기 시작했다.
“윽! 이거 놔!”
“놓아줘!”
그들은 공포에 질린 채로 눈동자를 굴렸지만 적을 볼 수 없었다. 진흙 바닥에 긴 자국만을 남긴 괴물은 모처럼 듬직한 먹이를 여럿 잡자 기분이 좋아져 걸음을 성큼성큼 옮기고 있었다. 이들을 끌고 가 호수에 가라앉힌 뒤 먹을 셈이었다.
“크읏!”
질질질.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저 멀리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아더는 답답한 신음성을 냈다.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 움직여서 죽여야 해! 그런 생각으로 마나를 간신히 발동시켰을 때였다. 마나가 팔에서 빠져나와 검으로 흘러 들어가기 직전에 무언가가 아더의 팔을 후려쳤다. 차갑고 눅눅한 느낌이었다.
아더는 신음을 내며 검을 놓치고 말았다. 누군가가 앞에서 크후, 크후,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마나를 뿜어낸 것이 기분 나쁘다는 기색이었다.
‘괴물인가.’
긁는 듯한 숨소리는 이 척박한 늪지처럼 축축해 귓속을 섬뜩하게 파고들었다. 아더는 오싹해져서 앞을 응시했다. 곧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괴물이 나타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길쭉한 개구리처럼 생겼으나 일반 개구리라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근육질이었다. 연금술로 만들어진 거인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 개구리는 아더를 차가운 눈길로 슥 보고는 허리째로 잡아 들었다. 그리고 호수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군.’
한편 렉스 또한 개구리 거인에게 잡혀 옆구리에 매달린 채 이동되고 있었다. 기사들이 두려움에 떠는 것과 달리 렉스는 편안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겪어 본 괴물이었다. 물론 자신이 상대한 녀석은 훨씬 작은 크기였다. 이번에는 기사들이 사용한 마나가 그들에게 그대로 돌아온 것이다.
‘늪지의 규칙대로.’
렉스는 제 할 일을 대신해 주는 이 늪지가 점점 맘에 든다고 생각하며 앞을 주시했다. 곧 동굴처럼 어두운 호수의 입구가 나타났다.
괴물은 끌고 온 기사들을 먼저 호수에 던졌다. 기사들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차갑게 밀려드는 물에 비명을 삼켰다. 묵직한 갑옷을 입은 이들답게 빠르게 가라앉으며 물거품을 뿜어냈다. 아더는 그 모습에 소리 없는 신음을 내뱉었다.
풍덩.
뒤이어 옆구리에 있던 아더와 렉스가 호수에 던져졌다.
아더는 물에 빠지기 전 서둘러 숨을 들이켰다. 머금을 수 있는 최대한으로 많이, 재빠르게 들이마셨지만 차가운 물에 금방 호흡이 고파 왔다. 아더는 답답한 가슴을 느끼며 눈가를 찡그렸다. 더운 늪지임에도 물이 차가워 살갗이 에일 것처럼 아파 온 것이다. 아더는 다급하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천금처럼 무거운 갑옷을 벗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헤엄쳐 살아남을 수 있을 텐데! 그런 각오로 집중했을 때였다.
“……!”
아더는 위쪽에서 뽀그르르 물거품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어느새 몸의 통제권을 되찾은 렉스가 두 손을 뻗어 헤엄치고 있는 것이다. 마나 억제제가 모두 씻겨 나간 그는 대단히 자유로워 보였다. 아더는 허탈해져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물속에서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렉스가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으로 가라앉는 기사를 내려다보는 사령관의 시선은 대단히 냉정했다. 이 얼어붙은 호수보다 더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적군보다 못하다는 눈초리군.’
어찌 보면 당연할지 모른다. 아군이면서도 그를 공격했으니까. 그것도 수하가, 최고 상관을 말이다. 아더는 물끄러미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죽어 가는 주제에 임무에 대한 미련이 웬 말이란 말인가. 하지만 사령관은 왠지 눈을 뗄 수 없는 자였다. 전장에서도 그랬고 이 늪지에서도 그랬다. 보다 보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일까, 순수하게 궁금해지는 남자.
따라서 아더는 그가 멀어질 때까지 응시했고 이내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수면으로 가겠거니 했던 렉스가 방향을 틀어 호수의 다른 면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가야 할 데가 있는 건가.’
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도 아더는 그의 의도를 궁금해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군.’
렉스는 팔을 길게 뻗었다. 물길을 헤쳐 나가는 그의 몸짓에는 조바심이 가득했다. 수지를 이렇게 오랜 시간 혼자 둘 생각은 아니었다. 렉스는 한 호흡에 낼 수 있을 만큼의 힘을 모두 내어 수면으로 튀어 오르듯 올라왔다. 기력이 현저히 떨어진 게 느껴졌으나 그래도 로리엔의 기사들을 모두 처리해 마음만큼은 가벼웠다.
하나 렉스의 표정은 곧 급속하게 얼어붙었다. 저만치서 누군가 그를 향해 아는 척을 해 온 것이다.
“이거, 이거.”
그는 팔을 높이 들었다가 내리며 가슴으로 우아하게 휘었다. 고상한 인사법은 이런 곳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과장적이었다.
“적군의 수장들이 모두 이름만 들으면 목을 움츠린다는 위대한 알도스 무어 렉스 사령관님이 아니십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상당한 비음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약간 여성스럽게 들려왔지만 그의 기세는 강성했다. 뒤에 선 수십 명의 기사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두드러질 만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렉스는 말없이 그의 앞에 선 수지를 바라보았다. 수지의 표정은 핏기가 사라진 것처럼 창백했다.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고, 바짝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등 뒤에 검이 세워져 있군.’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발꿈치를 들었지만 남자가 더 빨랐다.
“진정하십시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제 손이 불행하게 미끄러질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히죽 웃는다. 간사하고 능글거리는 성격. 분명 상대를 손에 쥐고 농락하는 타입일 것이다. 렉스는 그의 목을 검을 쥔 몸뚱이에서 떼어 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물었다.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