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렉스의 표정이 어쩐지 어둠침침해졌다. 수지는 망설였다가 말했다.
“제가 다른 세계에서 왔기 때문일까요?”
그가 대답을 하려고 할 때였다.
“잠깐.”
렉스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방금 전 그녀와 왔던 호수로 향해 있었다. 그가 곧 인상을 찌푸린 채 수지에게 말했다.
“따라붙었군.”
“네?”
“기사들 말이야. 이렇게 빨리 쫓아올 줄은 몰랐는데.”
안개가 수색을 방해하기 때문에 시간이 소요되리라 보았는데. 렉스는 뜻밖의 상황에 짜증을 내며 수지에게 말했다.
“여기 잠자코 있어.”
“하, 하지만.”
“어차피 넌 도움이 안 돼.”
확인 사살에 수지는 굳어졌다. 그 얼굴을 본 렉스는 악의가 없었단 듯이 그녀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누군가를 죽이는 데 도움이 될 필요 없어. 그건 내 역할이니까.”
손을 좀처럼 떼지 못한다. 이 말랑거리고 보드라운 피부를 하루 내내 물고 빨았으면 좋겠다. 렉스는 솔직하게 욕망을 드러냈다.
“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도움이야.”
“……이상한 말인데요.”
수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렉스는 귀엽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의미인지 알잖아.”
렉스는 능글거리며 웃었다. 그 오만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수지는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어느새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렉스의 말에 마음이 편해졌다는 듯이 말이다.
“다녀오지. 내가 올 때까지,”
렉스는 낮은 어조로 강조했다.
“움직이지 마.”
“조금도 안 돼요?”
수지는 살짝 옆으로 점프했다. 렉스의 입가에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내 말은, 이 해변을 벗어나지 말라는 거야. 이 해변은 늪하고는 다르니까. 괴물이 등장하지도 안개가 깔리지도 않지. 가만히만 있으면 별일 없을 거야.”
렉스는 수지의 목을 끌어당겼다. 그녀를 잠깐이라도 온전히 소유하고 싶었다. 제 손안에서 뛰는 섬세한 맥박의 고동과 흐르는 피의 온전함을 느껴 보고 싶었다. 그녀가 이토록 자신을 끌어당기는 존재임을 재확인하며, 렉스는 수지의 전체를 눈에 담았다.
“금방 올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다리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고 나면 그 말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지는 그가 가는 모습만을 끈질기게 뒤쫓았다.
달려가던 렉스는 호수에 도착해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제가 있었다. 수지가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바라보자 렉스의 눈가가 살짝 부드러워졌다.
‘잘못 본 건가.’
눈웃음을 짓는 렉스라니. 수지는 그가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빛나는 모래가 그녀를 반긴다. 마치 제 세상의 일부를 떼어다 놓은 것처럼 익숙한 광경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방을 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산의 존재랄까?
‘보다 보면.’
바위산도 한국의 어디 명산 같다. 수지는 괜히 친근해져서 그 광경을 응시했다.
“어?”
그런데 무언가 희끄무레한 것이 시야에 잡힌다. 수지는 목을 빼고 그곳을 응시했다. 이곳엔 괴물도 안개도 없다고 했는데. 점점 다가오는 것의 정체를 확인하며 수지는 그 자리에 굳고 말았다.
* * *
펑, 펑, 펑.
마나가 연달아 터졌다. 렉스는 잇새로 욕을 삼키며 몸을 회전시켰다. 하지만 마나를 아낀 탓인지 충격이 그대로 몸에 전달되었고 그는 어느새 바닥으로 처박혀 두 바퀴를 진창에서 굴러야 했다. 덕분에 머리고 몸이고 엉망인 된 것은 당연지사. 렉스의 표정이 고울 리가 없었다.
“이 자식이.”
짧은 두 마디를 끝으로 렉스의 손에 얇은 마나막이 형성되었다. 그것을 장갑처럼 두른 렉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가 내려친 곳은 대체로 목이나 심장이었다. 치명적인 마나가 돌고 있는 손으로 급소를 내려치자 기사들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멀찍이 선 기사들은 서둘러 마나를 크게 피웠다. 마나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므로 충분하게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그건 밀도의 차이를 몰랐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들은 마나 방어막을 깨고 렉스의 팔이 들어오자 기겁해서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곧 밀도 높은 렉스의 마나가 그들의 목을 베었고 그들은 소리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공포 가득한 얼굴로, 철철 피를 흘리면서. 렉스는 그들을 보며 입술을 열었다.
“너.”
렉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마치 사신처럼 고요했다. 기사들의 리더, 아더는 자신을 부르는 것이 명백한 그 행위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검을 꽉 쥐며 아더가 대답했다.
“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옅은 미소가 맺힌 얼굴에는 살기만이 번들거린다. 아더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에갈라스 성벽에서 두어 번 뵈었습니다. 제국군의 최신식 무기를 파괴하는 일이었죠.”
“아, 그래. 로리엔이 현재 개발 중인 인간이라고 소개했었지. 그중에서도 네가 성공작이라고 말이야.”
“맞습니다.”
아더는 공손하게 긍정했다. 렉스는 진흙과 피가 묻은 얼굴을 가볍게 손으로 닦으면서 흥얼거렸다.
“돌연변이라고 들었는데? 원래 그런 몸이 아니었다며?”
“마나의 주입 과정에서 급격한 신체 변화가 있었습니다. 특별기사단원들 중엔 저와 같은 자들이 몇몇 있는 편이지요.”
“흠. 돌연변이라. 단지 그것 때문에 네가 성공작이 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또 다른 비밀이 있는 건가?”
역시 예리한 사람이었다. 아더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는 공기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폭주를 앞둔 짐승처럼, 그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나의 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회를 노려 공격하려는 것일까. 자세는 무척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그 여유로운 자태가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상대는 철저히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제작된 인간.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장 귀한 성공작이었다. 아더는 빠르게 뒤의 기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기사들이 진형을 바꾸었다. 여태 포위하던 식으로 에워쌌던 모양이 쭉 늘어선 형태로 일자로 바뀌자 렉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건 보통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나 하는 것인데. 하지만 의아함에 지켜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위협은 보통 자라기 전에 잘라 버리는 것이 현명하니까.
렉스는 그대로 다리에 힘을 쥐어 튀어 나갔다.
빠르게 접근한 렉스를 방어하는 것은 중앙에 선 아더가 아니었다. 양옆에 도열한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은 마나를 입힌 검으로 렉스의 팔다리를 공격해 왔다. 그러나 그런 공격이 먹혀들 리가 없었다. 렉스는 공격을 하나하나 쳐 냈고, 기사들에게 더 강한 공격을 돌려주었다. 세 명을 쓰러뜨렸을 때, 아더의 검에서 산발하는 빛이 쏟아졌다.
“이건…….”
움찔하는 순간, 렉스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빛이 닿는 순간 굳어진 것이다. 사지가 마치 수십 개의 보이지 않는 천에 묶인 것처럼 억압되자 렉스는 있는 대로 미간을 구겼다.
“무슨 짓을……! 네 마나가 이런 것인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도 정확히 추리해 내는 그였다. 아더는 인상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일시적으로 ‘마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마나를 지닌 기사들에게도 통할 만한 능력이지요.”
그래서 기사들을 일렬로 도열하게 한 모양이었다. 실제로도 기사 둘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여덟은 빛에 닿지 않았다. 사정 범위에서 벗어난 것이다. 마나 기사들까지 굳게 할 정도면 강력한 능력임에 틀림없지만 공격 범위에는 제한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힘을 유지하는 데도.’
아더의 미간은 자신만큼이나 구겨져 있었다. 생각보다 마나 소모가 큰 것이다. 한번 능력을 발휘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힘을 집중해야 하는 것 같았다.
렉스는 전쟁에는 걸맞지 않은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이 기술은 능력 발휘 중에 자신을 보호해 줄 아군을 필요로 했다. 능력을 쓰면 힘을 유지하느라 몸이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다수의 적을 상대로 쓸 수조차 없었다. 기껏해야 적수 한둘을 상대로, 틈을 노려 쓸 만한 기술. 렉스는 저걸 성공작이라고 부르는 거냐고 비웃은 채 눈동자를 굴렸다.
여유도 잠시, 주위에 접근하는 기사들이 갑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이상한 냄새. 마나 억제제라는 것을 깨닫자 그는 헛웃음을 금치 못했다.
‘빌어먹을 로리엔!’
평소에는 왕국의 보물 창고에 있어 구경도 할 수 없는 고가품을 사람 하나 잡겠다고 일개 기사들에게 모조리 지급해 버리다니. 렉스는 기사들이 마나 억제제가 든 병을 던지자 살기를 뿜어냈다. 그 살기에 다가오던 기사들이 흠칫하는 것도 당연지사. 떨지 않은 자는 렉스와 같이 아더의 기술에 굳어 버린 기사들뿐이었다.
“젠장.”
하지만 걸쭉한 액체는 이미 몸을 뒤덮은 후였다. 렉스는 심장에서 소용돌이치던 힘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그 여파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온몸이 뻣뻣해졌으며 머릿속이 흐릿해졌다.
이것은 아더의 마비 능력과는 달랐다. 육체만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까지 멈추게 했다. 더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이라는 사형 선고가 내려진 인간으로 만들었다. 3분 정도의 효과일 뿐이었지만 그동안은 그 어떤 공격에도 무방비한, 무력해진 인간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