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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59)화 (59/163)

59화

아이 같은 답변이었다. 이렇게까지 거부하는 모습이라니. 수지는 어렴풋이 답을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의 확답이 필요했다.

“그렇더라도 이야기를 들어야겠어요.”

“어째서?”

“제 일이니까요. 쉬쉬하다가 남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요.”

수지는 조심스레 물었다.

“렉스는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그 발언은 꽤 파급력이 컸다. 렉스는 이번 임무에 대해서 다른 이가 수지에게 말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너를 죽이려 했다고 고백을 해야 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일에 다른 사람이 말을 얹는 건 더 기분이 헝클어지는 일이었다.

수지의 말대로, 이번 임무에 관해 누군가 말을 해야 한다면 그건 자신이어야 한다. 자신이어야만 정확한 단어로, 불필요한 말 없이 상황을 전달할 수 있었다.

망설이던 렉스가 마침내 입을 뗐다.

“이 늪에서 내 임무는 하나였어. 바로 왕국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 될 자를 제거하는 것. 너를 죽이는 일이었지.”

그 순간 수지의 심장이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수지는 어서 심장을 주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를 죽이려 했다고? 정말 나를 죽이려고 그 구덩이에 왔던 거야? 설레며 벅차하던 가슴이 얼어붙었다. 겁이 난 것처럼 어디 늪지 아래로 모습을 감춘 기분. 수지는 더듬거리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저, 저를요? 하, 하지만 전 아무것도 아닌데.”

말을 더듬고 있는 것이 성가셨다. 상황을 냉철하게 받아들이고 싶었으나 머릿속과 달리 몸과 입이 따로 놀았다.

“저, 전 그저 여기 낯선 늪에서 눈 뜬 사람일 뿐인데.”

그녀는 떨리는 손목을 양손으로 맞잡았다.

“수지.”

“뭐, 뭔가 잘못된 걸 거예요. 전 그렇게 위협적인 사람이 아니거든요. 가끔 요리는 태워 먹고 벌레는 짓이길지 모르겠지만…….”

렉스는 당황하고 있는 수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를 안정시키려는 의도였으나 수지가 그 손에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자 기분이 몹시도 나빠졌다.

……반사적인 행동이었을 뿐이야. 렉스는 별일 아니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하지만 수지의 표정이, 수지의 행동이 지금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렉스는 불안해하며 수지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네가 믿기 어렵다는 걸 알아. 나 역시 네가 그런 사람일 거라고 첫눈에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근데 왜 절 죽이지 않았어요? 렉스의 말대로 왕국의 가장 큰 위협이라면 왜 바로 죽이지 않은 거죠?”

커다랗게 흔들리며 묻는 눈. 대답을 듣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렉스는 그녀를 꽉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여기를 떠났어야 하지만 떠나지 않았던 이유와 같아.”

렉스는 솔직하게 말했다.

“수지, 네가 흥미로웠거든.”

“흥미?”

수지는 어안이 벙벙해져 그 단어를 반복했다. 흥미롭다니. 자신이 흥미로운 존재였던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평가라서 수지는 그 개념을 받아들이는 데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제가.”

수지는 예시를 들었다.

“여기 늪지 괴물들처럼 흥미로웠던 거예요?”

“아니.”

대답과 동시에 렉스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괴물들 따위 네 발톱만큼도 흥미롭지 않아. 차라리 바닥에 떨어진 네 머리카락이 더 흥미롭다고 해야겠지!”

“…….”

고맙다고 해야 하나. 저렇게 알기 쉽게 비유해 주니 말이다. 수지는 다시 물었다.

“그럼 이 늪지처럼 흥미로웠던 거예요?”

“이 지긋지긋한 늪지가 뭐가 흥미롭지?”

렉스가 되물었다.

“무서우면서도 신비롭잖아요.”

“무서워? 널 무서워한 적은 없어. 오히려 예상과 달리 약한 존재라고 생각했지.”

‘약한 존재.’

수지는 그 단어를 곱씹으며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렉스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약한 존재였다 그런 자신이 어째서 왕국의 가장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는 걸까. 수지는 핵심을 찔렀다.

“그래서 흥미롭다고 생각한 거군요? 제가 이렇게 약한데 어떻게 위협이 될까 하고요.”

렉스는 대답이 없었다. 수지는 무언의 긍정이라고 확신했다.

“……그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물어야 한다는 걸 아는데 대답에 따라 심장이 영영 숨어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후.”

렉스는 기어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다. 수지가 겁먹고 불안해하며 자신을 두려워할 줄.

하기야.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나. 자신을 죽이러 왔다면 누구든 회의에 차서 저렇게 물을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요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상대는 수지였다. 자신이 처음으로 흥미 있어 하고 살려 두고 싶고 그래서 곁에 함께 하고 싶은 존재.

렉스는 성큼 다가섰다. 이번에도 수지가 물러났지만 저번처럼 도중에 포기하지 않았다.

“윽.”

기어이 수지의 목을 꽉 붙든 채로,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은 뒤 말했다.

“잘 들어. 나는 너와 있고 싶어.”

“……!”

“널 죽이러 왔던 것도 사실이고 널 약하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야. 데리고 있으면 흥미로울 것 같아서 초반에 죽이지 않은 것도 있었어. 하지만 그게 어때서? 나라는 인간은 원래 글러 먹었어. 머리 자체가 산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지 않도록 설계됐지. 기껏해야 강한 적이면 좀 더 재미를 보다 죽여야겠다고 생각할 뿐. 그게 다인 인간이야. 수십 수만을 죽여도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아까울 정도의 감정과 사고만 할 뿐이지. 한데 너를 만나니.”

렉스는 떨고 있는 수지를 보며 좀 더 낮고 은밀한 어조가 되었다.

“평소의 무기다운 생각이 안 들어. 그저 여기서 놀다 가고 싶고, 임무 따윈 던져 버리고 싶고, 왕국 따윈 될 대로 되라 하고 싶지. 이런 태만한 내가 어디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나는 게을러졌어.”

“아.”

“그러니 널 만나서 내가 이상해졌냐고 물으면 대답은 ‘맞다.’야.”

렉스는 수지의 얼굴을 관통했다.

“널 죽일 거냐고 묻는다면.”

수지는 가슴이 세차게 뛰는 걸 느꼈다. 이어지는 말에 따라서 그들의 미래가 결정될 것을 직감했다. 그건 렉스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눈빛이 쏟아질 것처럼 수지에게 달려왔다.

“‘절대 그럴 수 없다’야. 왜냐면 나는.”

렉스의 입술이 다가왔다.

“네가 위협이든 아니든 너랑 있고 싶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렉스의 입술이 겹쳐졌다. 입술에선 조바심이 느껴졌다. 꽉 목을 붙든 손길에서 절박함이 밀려왔고 물기 어린 몸에선 안달하는 냄새가 풍겨 왔다. 모든 게 진실이라는 듯이 처절했다. 따라서 그를 경계해야 한다는 마음 어딘가의 위기의식에도 수지는 그를 가엽다는 듯이 토닥였고 그 틈을 타 입술 안쪽으로 혀가 깊게 찔러 들어왔다.

“읏.”

잘근잘근 입술이 입술을 말아 먹었다. 수지는 온몸을 긴장시켰다. 입술을 완전히 문댄 입술이 뜨겁게 젖은 혀를 내밀어 안을 휘저었다. 열이 가득했다. 수지는 침이 가득한 혀를 내밀었지만 오히려 그게 열을 더 부추겼는지 긴 혀가 감아 왔다. 한 차례 혀와 혀가 부딪치며 나른하고 끈적거리는 소리를 만들었다.

“으, 읏…….”

그녀를 탐색하는 건 혀뿐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의 손이 등과 허리를 만지며 그녀를 능란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수지는 흐릿해지는 정신을 느꼈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는데 그 진실을 물리치는 고백이 뒤따라 그녀의 긴장을 완화시켜 버렸다. 저 바닥에 떨어져 버린 심장을 들어 올리며 멈춘 듯한 박동을 다시금 빠르게 약동하게 만들었다.

렉스라는 존재가, 어느새 그녀에게 이렇게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수지는 깊고 끈적한 키스에 농락당하는 자신처럼 마음도 그에게 무력해졌음을 느꼈다. 어느 순간인지 모르게 그에게 몸과 마음을 온전히 빼앗긴 것이다.

“하아.”

키스를 멈춘 렉스가 느릿한 숨을 뱉어 냈다. 끈적한 열기와 꺼지지 않는 열꽃이 수지의 얼굴에 피어나 있었다. 렉스는 그 야들한 피부 표현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네가 고분고분하니 참 좋군.”

이제야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듯이 말하는 렉스였다. 수지는 좀 어이가 없었다. 이번 키스는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인 게 아니라 기습이라 어쩔 수 없이 따랐던 것이었는데. 그것과 별개로 렉스가 키스를 무지 잘하는 탓도 있었다. 한번 하면 도무지 중간에 멈출 수 없을 것처럼 열정적으로 해 대니까. 수지는 발그레해진 볼을 느끼면서 물었다.

“추격대는요?”

“처리해야겠지. 나를 끌고 갈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방해되는 모든 것을 없애려 할 테니까.”

“저를 말이죠?”

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누구인지 몰라도 보는 순간 없애려고 할 것이다. 렉스가 그녀 때문에 머무르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더더욱. 음산하게 눈을 빛내는 렉스를 보며 수지가 이어 물었다.

“그다음엔 어떻게 하려고요? 늪을 빠져나가 어디로 갈 거예요?”

“어디로 가고 싶은데?”

말만 하라는 듯이 렉스가 여유 있는 어조로 물었다. 그는 산뜻한 얼굴이 즐거워 보였다. 이대로 수지가 자신에게 겁을 먹고 떠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관대해진 남자는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지는 잠시 고민했다가 말했다.

“음. 일단 바다로 나가서 생각해도 돼요? 제 몸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거든요.”

“몸? 그게 무슨 말이야? 누구한테 네 몸을 보여 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대번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수지는 이 남자가 왜 이럴까 잠깐 생각했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몸이 좀 이상해서요. 여기로 온 후부터 머리도 길지 않고 눈썹도 안 자란다고나 할까요? 상처도 너무 빨리 낫고요. 꼭 몸의 시계가 멈춘 거 같아서 이유가 있나 싶어서요.”

“재생력 때문이 아니라?”

렉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수지는 고개를 저었다.

“재생력 때문이 아니에요. 그렇게 보이지만 아닐 거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건 회복력이 좋아진 게 아니라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에 가까워서요. 마치 여기 오기 전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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