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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56)화 (56/163)

56화

비는 계속 오고 있었다. 덕분에 안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발을 내딛기가 힘들었다. 물웅덩이가 크게 고여 있어서 가끔은 뛰다시피 해서 길을 가야 했는데, 그 또한 빗물로 흐려진 시야 탓인지 보폭을 정확하게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수지는 발목까지 젖은 발을 무겁게 들며 웅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온 다리에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그 때문일까. 수지는 금방 숨을 헐떡였다.

“괜찮나?”

렉스의 눈길이 언짢아 보였다. 수지는 숨이 빠져나오는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치는 상황에서 폐가 되고 싶지 않은데. 수지는 무너진 거처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렉스 혼자 도망치는 건 어때요?”

“뭐?”

렉스의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 무슨 이야기를 하냐는 듯이 험악해진 얼굴을 보면서 수지는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까 전 여기 어디 숨어 있고, 렉스는 멀리 도망치는 게…….”

수지는 담담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좀 더 현실적인 것 같아서요. 전 걸음도 느리고 체력도 나쁘니까.”

“…….”

어두워진 분위기에 수지는 서둘러 덧붙였다.

“나중에 돌아와서 절 데려가면 되잖아요.”

“널 데리고 가면 내가 금방 잡힐 거 같나?”

렉스는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수지가 그런 말을 해서 왠지 화가 났다는 어조였다.

“그리고 기사들이 숨은 널 발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괴물들까지 그런다는 건 아니야. 괴물들은 네가 어디 있든 이 늪에서 널 찾아내 잡아먹고 말 테니까.”

홀로는 극도로 위험하다는 것을 알 텐데,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수지가 힘들어해서 신경이 날카롭던 터였다. 좀 더 수지를 편하게 데리고 가자면 그녀를 안고 가는 게 빠르겠지만 몸이 좋지 않은 상태였고, 만약을 대비해서 조금의 힘이라도 모아 놔야 하는 상황이라 걷기를 택한 것인데 그녀가 저를 두고 가라고 말할 줄이야.

렉스는 미간을 강하게 구겼다.

“따라서 네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겠어.”

렉스는 수지의 팔을 끌어당겼다. 빨리 가자는 태도에 수지는 입술만 달싹였다가 어쩔 수 없이 그를 뒤따랐다.

‘……사실.’

자신이 지친 것보다 렉스가 힘들어 보여 그런 말을 했다. 말은 안 했어도 렉스의 얼굴빛이 좋지 않아 걱정이 된 것이다. 비를 맞고 온종일 돌아다녀도 팔팔했던 그가 저런 파리한 낯빛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몸이 안 좋다는 의미겠지. 수지는 좀 더 몸을 아끼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의 렉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따라야 했다.

다행인 것은 가는 길에 괴물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렉스 덕분인가 했지만 곧 다른 이유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덤불을 지나치는데 작은 동물들이 내장이 폭발한 것처럼 터진 채 죽어 있는 것이다. 그를 보며 왈칵 얼굴을 찡그린 수지에게 렉스가 설명했다.

“마나 폭발 때문이야.”

“네?”

“방금 전 우리를 덮쳤던 힘. 고의로 마나를 뭉쳐서 터트린 것인데 그에 휩쓸리면 약한 생명체는 이렇게 죽게 되지.”

“약한 생명체요……?”

저 같은 생명을 말하는 거예요? 수지는 차마 그렇게 물을 수 없었다. 두려움으로 떨리는 손을 모아 쥔 채로 렉스를 바라보았다.

렉스의 시선은 어느덧 저 앞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안력으로 안개가 몰려오는 것을 확인했다. 험악한 적란운이 달려오는 것 같은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으며 풍기는 기운도 요상할 만큼 강했다. 겉으로 보면 번개가 치는 것처럼 번쩍거리는 빛이 서려 있었고 이상한 그림자가 연신 요동쳤다.

‘괴물들이 가득하군.’

마나 폭발에 상응하는 괴물들이 포진해 있을 것이다. 렉스는 조용히 시선을 돌려 숨을 데를 찾았다. 엄폐물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위로 향했다.

“약한 생명체. 마나 폭발은 나 같은 존재를 목표로 한 게 아니야. 나 외의 것을 없애고자 힘을 던진 거지.”

수지는 멈칫했다. 사람 하나 찾겠다고 이 일대에 폭탄 같은 힘을 투척했다고? 하지만 만약에 사람이 있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던 걸까. 가까운 곳에 사는 원주민도 있고 더 멀리는 루지가 사는 마을도 있었는데……. 수지는 섬뜩한 생각이 드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물었다.

“레, 렉스. 여긴 왕국의 땅이 아니에요?”

이 괴상한 늪이 어디에 속한 거냐고 묻고 있었다. 렉스는 나무 꼭대기를 응시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수지의 눈은 낯선 세계의 이방인이 된 것마냥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여긴 왕국의 땅이 맞아. 처치 곤란이라고 생각하지만 엄연히 왕국의 영토에 속해 있지.”

“그런데도 폭발을 일으킨 거예요? 그러다가 애꿎은 사람들이 죽으면 어쩌려고……. 이곳에 사람들이 사는 걸 혹시 모르는 걸까요?”

수지의 의문은 합리적이었다. 보통 자국의 영토에서 사람 하나 찾겠다고 마나 폭발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왕국의 영토여도 버려진 땅, 왕국에서도 통치하기 곤란해하는 늪의 섬이다. 따라서 렉스는 거침없이 말했다.

“알고 있지만 신경 쓰지 않아. 오히려 이 기회에 다 죽여 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물론 표면적으론 이 늪은 보호할 가치가 있어. 남부의 국가들이 함부로 왕국을 침범할 수 없게 하는 해자 노릇을 하거든. 그것 때문에 고위층도 함부로 이곳을 밀어 버리지 않는 거야.”

말을 마친 렉스가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수지의 허리를 낚아챘다. 갑작스럽게 그의 품에 끌어당겨진 수지는 입을 벌렸다. 하지만 렉스가 조용히 하란 듯이 입가에 손을 올리며 그녀를 안은 채로 나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늪의 나무는 굵고 우람했다. 우듬지가 하늘을 찌를 것처럼 치솟은 채 좌우로 넓게 나뭇가지를 뻗어 냈다. 그래서 올라가기가 수월치 않아 보였는데 렉스는 계속 가지에 몸을 긁히면서도 나아가는 게 아닌가. 수지는 그의 목을 꽉 붙든 채로 숨을 죽였다. 곧 그가 튼튼한 나뭇가지에 정착하자 조금 몸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

‘피가 났네…….’

반듯한 얼굴에 난 생채기를 보며 저도 모르게 손을 뻗자 렉스가 그 손을 꼭 잡은 채로 수지를 제 몸에 바짝 끌어당겼다. 수지의 얼굴이 발긋해졌으나 렉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죽인 채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봐 봐.”

렉스의 시선은 몰아치는 안개를 향해 있었다.

“마나 폭발을 일으킨 대가가 따랐으니까.”

그가 가리킨 곳에는 안개가 마치 발이 달린 것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확 지표를 덮는 모습에 수지는 아- 하면서 입을 벌렸다. 지표를 거칠게 덮은 먹구름은 무서운 속도로 나무 위쪽까지 올라왔고 간신히 수지가 머문 곳 아래에서 멈췄다.

수지는 숨을 들이켠 채로 번갯불이 번쩍거리는 안개를 내려다봤다. 이상한 형체가 보이는 가운데 먹구름 속에서 그르르- 하는 짐승의 울음이 들렸다. 섬뜩한 소리였다.

“왕국의 인간들이 그동안 왜 늪에 오지 않았던 건지 다시금 깨달을 시간이 온 거지.”

그렇게 말하는 렉스의 입가에는 옅은 조소가 머물러 있었다. 왕국은 늘 이 늪을 얕잡아 봤었다. 없앨 수 있지만 시간 낭비, 자원 낭비라서 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경험한 바, 이 늪은 없애고 싶다고 해서 없앨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생태를 두고서 언제든지 없앨 수 있다고 자신하는 고위 관계자들이 우스워 보일 뿐이었다.

안락하고 편안한 자리에 앉아서 뭐든 할 수 있다고 입을 놀리는 꼴이란. 렉스는 비소를 삼키면서 그 건방을 떨던 작자들을 떠올렸다. 저 안개를 마주하고서는 어떤 얼굴일지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응?’

근데 수지가 렉스의 등을 붙들어 오는 게 아닌가. 표정이 굳어 있는 그녀는 살짝 떨면서 렉스를 바라보았다. 렉스는 멈칫했다. 공포에 사로잡힌 수지가 느껴졌다. 이 사태를 느긋이 관망하는 자신과 달리 그녀는 저 안개가 본능적인 두려움을 초래한다는 듯이 겁을 내고 있었다.

“괜찮아.”

렉스는 저도 모르게 위로했다.

“우리에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왠지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지는 그 말에 그를 빤히 보았다. ‘우리’라는 단어가 참 좋다고 생각하면서 두려움을 조금 덜어 냈다.

“저 일이 끝나면.”

수지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는 것을 보며 렉스는 본심을 토해 냈다.

“둘만 있을 곳을 찾자.”

렉스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온화해져 와 닿았다. 수지는 그가 눈가를 휘었다고 생각했다.

“둘이서 안심하고 머무를 수 있는…….”

고요한 듯 낮은 목소리가 왜 이렇게 감미로운 건지 모르겠다. 상황이 급박함에도 렉스의 부드럽고 관능적인 어조가 수지의 가슴을 동요시켰고,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들었다. 마치 이 세상에 렉스와 자신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수지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면서 렉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숨결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상응할 뭔가를 하기로 하지 않았나?”

렉스의 중얼거림이 눅진하게 그녀의 귓가에 달라붙었을 때였다. 저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윽고 빛의 번쩍거림도 이어졌다. 수지의 고개가 움직였고 렉스의 시선도 돌아갔다. 안개가 막 닿은 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것처럼 빛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렉스는 아래쪽의 안개가 옅어지는 것을 보면서 수지에게 말했다.

“가자.”

저들과는 상관없는 곳으로. 수지는 렉스의 단호한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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