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네?”
왠지 얼굴이 빨개지고 만 수지였다. 아니, 얼굴을 보고 있는데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건 무슨 경우일까. 수지는 곤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렉스는 아주 찬찬히 그녀의 이마에서부터 눈썹을 지나 코와 뺨, 인중과 입술을 살폈다. 그렇게 보지 않고선 수지란 사람을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
수지는 잠자코 있었다. 렉스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도 무언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미간을 잔뜩 구긴 사내는 이윽고 한 손으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꿈에서 네 목소리를 들었어.”
“…….”
“나를 부르는 네 목소리를. 다른 건 잊었어도 그것만은 기억에 남는군.”
아주 선명하게, 또렷하게. 렉스는 짙어진 눈길을 수지에게 보냈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아무 말도 못 하는 수지를 보며 렉스는 팔 하나를 뻗었다. 자연스레 수지의 목이 잡혔다. 렉스는 그 가느다란 목을 쓰다듬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굳은 수지의 자세가 풀렸다. 렉스는 자신에게 질문에 대한 답을 들으려는 게 아니다. 그저 저도 이해하지 못한 것을 너스레를 떨듯 중얼거렸을 뿐이다. 렉스가 안정을 찾아 간다는 생각에 곁눈질로 살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거리고 말았다.
“왜?”
렉스가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수지는 조금 망설였다가 말했다. 무엇이냐는 눈빛에 솔직하게 물었다.
“기사들이 이전에도 렉스를 찾아왔었나요?”
렉스는 멈칫했다.
“그래.”
“그들은 어떻게 됐죠?”
수지는 질문하고서 곧 후회했다. 짐작하고 있던 대답을 들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듣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괜히 마음만 더 심란해지고 말지. 따라서 수지는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고 했다. 렉스가 말했다.
“늪의 괴물에게 잡아먹혔지. 그들은 마나를 마구잡이로 난사해 주의를 끌었거든.”
“아.”
왠지 안도하고 만다. 렉스는 그런 수지를 보며 눈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치워 주었다.
“그게 아니었어도 내게 죽임을 당했을 거야.”
렉스는 커다랗게 커진 눈을 보며 침착하게 조용히 말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속이지 않겠어. 나는 무기고 사람을 죽이려고 만들어졌어. 그 어떤 존재들보다 존재 목적이 뚜렷하지. 전쟁에서 이기려고 연금술사들이 만들어 낸 것이니까.”
‘것’이라. 수지는 그 표현이 뼈아프다고 생각했다. 저를 인간이 아니라 ‘것’이라고 칭하는 행태라니. 얼마나 냉정하고 비정하게 자신을 바라보아야 그럴 수가 있을까. 수지는 가슴이 무거워져서 착잡한 기분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를 그렇게 만든 실험실의 사람들에게 순간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적으로 규정된 이들에겐 자비를 베풀지 않아. 수하들이라 할지라도 위협이 되면 처리하지. 그게 다일 뿐이야. 이건 내게 너무 당연한 거라.”
렉스는 잠시 말을 쉬었다. 가라앉은 수지의 눈빛이 어딘가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네게는 낯설어 보일 거야.”
렉스는 말을 골랐다.
“무서워 보일 수도 있고.”
렉스의 표정은 그 말을 하면서 굳어져 있었다. 그는 수지가 겁먹길 바라지 않았으나 자신이란 존재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을 쥔 것은 자신이었어도 그녀의 감정을 쥔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녀의 감정은 그녀의 것이었고, 따라서 렉스는 자신을 평가할 그녀의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수지는 한참이나 렉스를 응시하더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뭐든 해야 마음이 편하고요,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져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런 성향이 더 심해졌다는 건 아는데…….”
수지는 조금 더 선명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여기에 와서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계속 움직였고 할 일을 찾았어요. 무기력하게 그냥 있으면 안 된다고 느껴서 나름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그게 이상해 보였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렇게 보이지 않았어.”
렉스가 말했다. 꽤 단호한 대답이라서 수지는 좋아서 웃었다.
“그랬다면 다행이에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렉스. 각자 살아온 대로 이 늪지에서도 살게 된다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그럴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요. 단지 렉스만큼은.”
수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제 느낌을 온전하게 표현하려고 애썼다.
“당신만큼은.”
수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과 그 안의 감정을 응시하자 절로 말이 튀어나왔다.
“제 마음대로 됐으면 좋겠어요.”
“뭐?”
렉스의 놀란 듯이 대꾸했다. 말한 수지도 놀랐는지 눈이 커져 있었다. 마음에 있는 걸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했는데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수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둘의 황당하고 굳은 시선 교환이 이어질 때였다. 구석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워 있다가 둘의 이야기에 잠이 깨고 만 미카엘이었다. 그는 심각한 분위기에 차마 나서지 못하고 진지하게 듣다가 수지의 말에 웃음을 터트린 것이다.
“풉, 푸크크…….”
“…….”
“푸하하하-”
시원한 웃음소리에 어색했던 공기가 확 날아가고 말았다. 수지는 아, 그가 있었지 하면서 뒤늦게 무안해졌고, 렉스는 ‘저 새끼 뭐야.’라면서 살기를 피웠다. 렉스가 일어나서 다가오려 하자 소년 기사는 어, 어? 하며 당황해서 뒤로 물러났다.
“지, 진정하세요, 사령관님!”
“널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를 대 봐.”
그러자 미카엘은 수지를 가리켰다. 렉스는 그 탓에 수지를 쳐다보았고 수지는 멈칫해 있다가 미카엘을 바라보고 곤란하다는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도와줬는데, 무작정 죽이면 안 될 거 같아요.”
“보세요, 들으셨죠?”
“…….”
렉스가 노려보자 미카엘은 얼른 입을 다물며 차렷 자세를 했다. 이 이상으로 사령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싶어 눈치껏 입을 다문 것이다.
렉스는 불만이 많아 보였으나 일단 수지가 반대했으므로 다시 침대에 앉았다. 하지만 그의 기세는 여전히 살아 있었으며 미카엘이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죽이겠다는 냉기가 풀풀 풍겼다. 때문에 살기를 읽은 미카엘의 표정이 뻣뻣해질 수밖에 없었다.
수지가 끼어들었다.
“출출하니 뭐라도 먹어야 할 거 같아요.”
“제가 먹을 만한 걸 잡아 오겠습니다.”
미카엘이 웃으며 말했다. 그가 그렇게 서둘러 나가 버리자 방 안의 공기는 왠지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수지는 서늘한 렉스의 표정을 살폈다가 불을 피우겠다며 불자리 근처에 앉았다. 비 때문인지 실내 공기가 더 서늘하게 느껴져 몸이 오싹거렸던 것이다. 수지가 나뭇가지를 모으기 시작하자 렉스가 뒤에서 더 굵은 장작들을 옮겨 왔다. 그는 자연스레 수지 손에 있는 불쏘시개를 가져가 나무를 뒤척거리며 불꽃을 키우기 시작했다.
불꽃은 작게 타올랐다.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무를 모두 잡아먹을 때까지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아까 한 말.”
“네?”
렉스가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잠잠했지만 작은 불꽃처럼 고요한 타오름이 있었다.
“내가 네 마음대로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 진심인가?”
“그게…….”
수지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원래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이 두려운 존재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 준다면 무서울 게 없다’였다. 그게 왜 저런 식으로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마음 한구석에서 무자비한 그가 마구잡이로 행동하는 것처럼 무서운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반영됐는지도 모른다. 지난번 마을을 향해 무기화된 팔을 들이밀었을 때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런 건가.’
수지는 달라붙어 있는 입술을 왠지 힘겹게 떼었다.
“렉스가 맘대로 하면 말릴 수 없을 거 같아서요.”
“…….”
“레, 렉스에게 명령을 내리고 싶다는 건 아니고요, 전 그냥 제 이야기를 잘 들어 줬으면 해서…….”
수지의 변명 같은 긴 어물거림에 렉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곧 거칠게 머리를 뒤로 넘겼다. 어쩐지 곤란하면서도 황당하다는 느낌이 물씬 풍겨 오는지라 수지는 그를 잠시 의아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넌 참 성가셔.”
“……!”
“좀처럼 가만있지 않으려고 하고 무언가를 하려 하니까. 계속 집중해서 쳐다보게 만들지.”
수지는 그가 지금 내가 싫다고 말하는 건가 놀라서 숨을 죽였다. 긴장한 수지를 보면서 렉스는 한 팔을 뻗었다. 그리고 원래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듯이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꽉 쥐었다. 그렇게 수지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고서야 렉스는 고백했다.
“근데 문제는 그게 싫지 않다는 거야. 너를 향해서 반응하는 내 몸처럼, 나도, 내 눈도 너를 무의식적으로 계속 좇는다는 거지, 네가 마냥 좋다는 듯이.”
“……아.”
“그래, 이상한 일이지? 나는 원래 무기라서 이런 일에는 흥미가 없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내가 원래의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 이 늪지를 나가고 싶지 않은 것도 그래. 기사들이 몰려와도 녀석들을 모두 매장해서라도 이곳에 남고 싶어진다고.”
과격하면서도 직설적인 고백이었다. 수지는 웃어야 할지 놀라야 할지 난감해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에게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몸과 마음이 끌린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로.
‘하지만 나라고 알까? 그는 어쩌면…….’
아직 수지라는 여인에게 완전히 끌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 착잡했고 마음이 가라앉았다. 렉스는 수지가 실망하는 것을 가만두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렉스의 강렬한 검은 눈이 그녀를 꿰뚫었다.
“네가 명령하는 것도 괜찮다는 거야.”
입술이 부딪쳐 올 거라고 생각했다. 렉스의 눈빛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입술을 맞대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열고 방긋 웃으며 들어왔다.
“잡아 왔습니다. 아주 튼실한 녀석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