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수지의 질문에 소년 기사는 잠깐 난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명령을 거부하면 다른 길은 없다. 영원한 공백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 소년 기사는 어떻게 이걸 좋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이 눈앞의 순진해 보이는 여자에게, 사령관이 믿는다는 유일한 존재에게. 소년 기사는 잠시 고민했다가 말했다.
“지금은 전시 상황입니다. 전시 상황에서 군인이 명을 어기면 그것은 가장 강력한 군법 위반으로 그 자리에서…….”
“죽인다는 거군요?”
수지가 멈칫하며 말을 받았다. 소년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부서질 것처럼 연약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는 군인입니다. 군인은 상부의 명을 떠받들어야 하고요. 이의를 품지 않아야 합니다. 오라면 가야 하고 가라면 떠나야 하는…….”
근데 렉스는 눈치껏 따르라고 했다. 상황에 따라서 자의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일도 있다며. 그를 보며 소년 기사는 당황하고 말았다. 누구보다 명령을 따라야 하는 사람이 아닌가. 왕실에게서 명받아 왕국의 군대를 지휘하는 인물이며 그 자체가 왕국의 무력을 상징하는 렉스다.
그런 존재가 어떻게 명에 상관없이 ‘알아서 살라’고 할 수 있는지. 소년 기사는 혼란스러워져 이 늪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더 들어야겠다며, 그를 기다린 것이다. 이렇게 제 마음을 가다듬은 소년 기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반드시 복종을 해야 합니다. 그게 군인으로서 당연한 도리니까요.”
“그럼 렉스가 안 가고 버티면, 다른 이들이 또 찾아온다는 건가요?”
“네, 세 번째에는 더 강한 기사들이 올 겁니다.”
“세 번째?”
두 번째가 아니라? 수지가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듣지 못한 소년 기사는 말을 이어 나갔다.
“저보다 더 단호하게 사령관님을 끌고 가려고 할 거고요. 사령관님이 대단하시다고 하더라도 그 전부를 혼자 상대하기는 쉽지 않으실 겁니다. 저런 몸을 하신 상태로는 더더욱요.”
소년 기사의 눈길이 잠시 렉스에게 머물렀다. 마나가 부족하다는 건 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본질은 마나로 이루어진 인간. 따라서 마나가 불충분하면 싸움에서 불리해지는 건 당연했다. 그의 위험하다는 경고에 수지의 얼굴은 자연스레 창백해졌다. 소년 기사가 덧붙였다.
“하지만 무작정 죽이려고 오는 건 아닙니다. 사령관님께선 저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중요한 분입니다. 왕국에 꼭 필요한 인재이시라 원래 계시던 곳으로 모셔 가려고 할 겁니다.”
“왕성이요?”
“네.”
정확히 말하면 실험실이었지만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알려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년 기사는 생각에 잠겨 있는 수지를 바라보았다.
“렉스가.”
그녀는 머뭇거렸다. 이 질문을 해도 될까.
“왜 이곳에 왔는지 알아요?”
소년 기사의 눈이 살짝 커졌다. 수지는 입술을 달싹였다가 말했다.
“그냥 이 늪에 온 것 같지 않아서요. 렉스에게 물어봐야 하겠지만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고, 또 다른 기사들이 올 수 있다니까…….”
수지는 잠든 렉스를 바라봤다. 기절해 잠든 것이 무력해 보였다.
“그 전에 그가 왜 왔는지 알아야 할 거 같아서요.”
수지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가 할 일을 자신이 대신 해내면 왕국에서 그를 찾아 기사들을 보내는 것을 멈추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바람 말이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사령관님께서는 이곳에 누군가를 죽이러 왔습니다.”
“네?”
수지의 목소리가 커졌다. 소년 기사는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반복했다.
“제가 알기론 왕국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 될 존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다.”
“…….”
수지는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변했다. 침묵한 수지를 보며 소년 기사는 자신의 이야기가 너무 무거웠나 잠깐 생각했다. 그는 뒤돌아서 멈춰 있는 수지를 바라보았다. 활동성이 좋은 옷을 입은 그녀. 틀림없이 이곳의 거주민일 것이다.
오래전 이 늪지로 도망쳐 마을을 일구었다는 망명자들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은 있었다. 그들은 왕국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왕국과는 전혀 다른 체재로 살아간다고 했다. 계급도 신분 차도 없다는 말에 그런 마을이 정말 존재할 수 있을지 들었을 당시 의아했었다.
신기한 이들이라고 생각한 것과 별개로 왕성에서는 그들을 향후 없애야 할 존재들로 규정했다. 왕의 권위에 도전해서 왕국의 영토에 기생해 사는 위험한 선동 분자들로 말이다. 소년 기사는 수지를 적의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어렴풋이 그녀 자체는 위험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판단했다.
‘그들 사이에서도 위협이 되는 존재들은 따로 있겠지.’
그녀는 그저 평범한 마을의 아가씨일 것이다. 소년 기사는 조용하고 침착한 수지를 살펴보며 그녀에 대한 확신을 굳혀 가고 있었다.
타닥, 타닥, 불꽃이 습기와 나무를 잡아먹는 가운데 수지의 머릿속은 안개 속을 헤치며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러니까 렉스와의 첫 만남. 어둡고 습한 동굴에서 뱀의 공격을 앞두었던 때로 말이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렉스가 나타나서 뱀을 무찔렀다. 그녀를 구해 준 것이다. 이내 수지는 그를 처음 본 순간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날 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눈빛이, 그러니까 건조하고 비정한 눈빛이 자신을 무심하게 찔러 왔다. 칼보다도 더 날카롭고 비수보다도 더 차갑게. 따라서 수지는 그 자리에서 죽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날 죽이지 않았어.’
수지는 제 판단이 틀렸나 하며 그 뒤론 그 부분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 기사가 던진 말에 그 당시의 어두웠던 첫인상이 기억나 버렸다. 수지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초조함에 머리가 흐려지는 걸 느꼈다. 그의 진로에 방해가 되던 것도 아니었으니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그녀 앞에 그런 얼굴로 나타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원래 날 죽이려고 한 거라면 어째서 안 죽였지?’
굳이 죽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기만 했어도 자신은 죽었을 것이다. 이 늪지에서 연약하다면 연약하다고 할 수 있는 그녀는, 렉스 없이는 홀로 생존할 수 없는 실력이었다. 상처가 회복되는 몸을 지녔더라도 워낙 강력한 괴물이 많아서 회복력도 발휘할 수 없이 몸이 찢겨 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죽이는 이유였다.
‘왕국에 가장 위협이 돼서 죽인다고? 이 내가?’
수지는 허탈하게 웃음을 삼켰다. 자신은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아니, 이런 이상한 늪에 떨어진 이방인이니 괴상한 존재라고는 할 수 있겠다.
수지는 납득이 되지 않은 채 머리를 흔들었다. 렉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은 어둡기만 했다. 수지는 그가 깨어나면 허심탄회하게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하며 그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땀이나 흙이 묻은 피부를 천으로 마저 닦아 주었다. 그 행동이 어떻게 보였는지 소년 기사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사령관님께 반한 여자인가.’
여자의 태도를 보면 확실해 보였다. 그녀는 기절한 사령관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 했고 위험해 보이는 자신을 멀리했다. 도움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긴장한 눈초리로 자신을 살폈으며 거처에 돌아와서도 사령관이 어떻게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돌봤다. 그 모든 행동이 한 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그를 아끼고 있다고.
‘하긴. 사령관님이 그럴 만큼 매력적이긴 하시지.’
소년 기사는 논리적으로 생각했다. 사령관은 아주 괜찮은 남자였다. 외모나 체격, 실력이 압도적으로 우수했다.
왕성에서 그를 무도회에 자주 내놓는 이유가 고위 귀족들의 눈요기를 위해서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원래는 사령관인 그를 두려워하는 고위 귀족들이 딴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의도였으나 훌륭한 외양 덕분에 오히려 더 많은 무도회에 초대받고 다니는 렉스였다.
따라서 소년 기사는 그런 그를 살뜰하게 살피는 수지가 애처롭다고 생각했다. 이런 늪지에 사는 아가씨에게 렉스라는 신문명의 남자가 어떠했을지. 감히 상상이 간다며 소년 기사는 묘한 눈으로 수지를 훑고는 고개를 돌렸다.
시간은 고요하게 흘러갔다. 빗소리도 점차 잦아들어 자장가처럼 순해졌다. 지붕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에 수지도 어느 순간 깜박 잠이 들었을 때였다.
렉스는 이상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는 어둡고 축축한 늪에 몸이 반 이상 빠진 상태에서 헤어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쓰고 발악을 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를 잡아먹을 괴물의 소리가 더 가까워졌고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렉스는 살겠다며 정신없이 두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진흙을 움켜쥐어도 손가락 사이로 허망하게 빠져나가기만 한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렉스는 당도한 괴물을 보며 신음을 삼켰다. 빨간 입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죽음을 떠올렸다. 아무도 구해 줄 수 없는 죽음을.
“렉스?”
그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온기를 지닌 채 밖으로 인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렉스가 눈을 깜박이자 검은 눈이 보였고, 이어서 안도하는 표정이 보였다.
“괜찮아요? 렉스?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내서-.”
그녀는 많이 놀란 얼굴이었다.
“그래서 깨웠어요. 피곤한 것 같았는데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서. 괜찮은 거죠?”
수지는 걱정된다는 눈으로 재차 물었다. 렉스는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익숙한 눈동자, 발그레한 뺨, 생기가 있는 입술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렉스는 대답했다.
“괜찮아.”
“휴. 다행이다.”
수지는 진심으로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수지를 보면서 렉스가 물었다.
“그렇게 잠들었나?”
수지의 한 손에는 천이 들려 있었다. 상체는 침대에 살짝 엎드린 상태로. 렉스는 그녀 옆에 천을 담갔던 물까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는 자신을 간호하다가 잠든 모양이었다.
“아, 빗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졸려서…….”
수지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었다. 조금 피로하긴 했지만 그래도 렉스가 깨어난 게 어디인가. 걱정했던 터라서 그의 깨어남이 더욱 반가운 수지였다.
“배고파요? 먹을 걸 좀 가져올까요?”
“아니.”
“그럼 물을 좀 마실래요? 목마를 거 같은데.”
수지는 괜히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뭐라도 해 주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더 당황한 것도 있었다. 그런 수지를 보며 렉스가 가만히 말했다.
“너를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