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너. 날 좋아한다고 말했어.”
“아.”
그 모습까지 좋아하기는 좀 힘든데. 수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날 좋아한다고. 좋아해서 구한다고.”
“…….”
이 남자가 왜 이러지. 수지는 어딘가 이상해진 렉스를 보며 눈을 좌우로 굴렸다. 곧 힘에 겨운지 렉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괜찮아요?”
수지는 다급히 물었다. 힘이 없는 그러나 분명한 어조의 대답이 빠져나왔다.
“……괜찮아. 네가 날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인가요. ‘좋아해’가 모든 걸 괜찮게 하는 마법의 단어도 아니고 말이다. 따라서 수지는 그가 머리를 다쳤나 하고 쳐다보았지만 렉스는 개의치 않아 하며 점액질이 흘러내리는 머리를 뒤로 넘길 뿐이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 가려 있던 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수지는 그 눈을 마주하고 숨을 삼켰다. 사내는 웃고 있었다. 눈가를 살짝 일그러뜨리며.
“레, 렉스?”
“신기하게도 네 고백을 들으니까 힘이 나.”
“네?”
“이렇게 기뻤던 적이 없을 정도로 말이야.”
“…….”
수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아해라는 말에 그가 이토록 큰 충격을 받을지 몰랐다. 이렇게 크게 만족해서 눈가를 찡그리며 웃을지도.
“그러니까 일어나면 이에 상응할 섹스를 하자.”
네? 수지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묻고 말았다. 그러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내가 허리를 구부리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만 것이다. 짙은 안개 속에서,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괴물의 점액질 위에서, 기쁘다며 뻗어 버린 사내를 보면서 수지는 허망하게 입술만 물어야 했다.
그를 어떻게 거처로 옮겨야 할까. 그의 산 만한 덩치를 보자 수지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이 수지는 렉스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에 걸친 채로 그를 이동시켰다. 그의 다리가 질질 끌리는 바람에 중간에 그의 신발이 벗겨지자 그것도 주워서 다시 신기며, 렉스를 어떻게든 안전한 장소로 옮기려고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렉스가 괴물을 물리친 뒤, 안개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야가 잘 보였고 수지는 모처럼 거처를 향해서 정확한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무거워.’
렉스처럼 커다란 장정을 수지 같은 작은 여자가 끌고 가기엔 사실 고난이 많았다. 더군다나 이곳은 늪이었고 군데군데 뛰어넘어야 할 물웅덩이가 있는 장소였다. 따라서 수지는 렉스를 중간중간 커다란 나무뿌리 위에 올려놓으며 숨을 골라야 했다. 거처는 가까운데 걷는 속도가 나무늘보만큼 느려서 오늘 중으로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수지는 커다란 숨소리를 내며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까 렉스가 활약한 덕분인지 인근의 괴물들이 사라진 것 같았다. 렉스가 뿜어낸 힘에 두려움을 느낀 거겠지? 수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땀으로 비척거리는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어?’
그때 저편 나무에서 무언가 내려왔다. 발이 수십 개가 달린 지네였다. 수지는 굳어서 서둘러 냄비를 앞에 세웠다. 뒤를 힐끔 보았지만 렉스는 여전히 의식 불명이었다. 수지는 지네가 배의 노처럼 다리를 움직여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냄비 손잡이를 꽉 쥐었다.
휙.
그때, 누군가 다가오더니 지네의 꼬리를 끌어당겼다. 지네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꼬리를 붙잡은 인영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인영은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지네의 얼굴 부분을 손으로 꽉 누르더니 이내 푹-! 하며 악력으로 터트려 버렸다.
“이크.”
그 탓에 지네의 체액이 손에 묻자 난처한 듯 미소 짓는 인영이었다. 곧 인영은 수지를 향해 발랄하게 물었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누, 누구.”
수지는 경계하며 냄비를 앞으로 내밀었다. 인영, 그러니까 소년 기사 미카엘은 그 모습이 재밌다고 생각했다. 이 늪지에서 냄비로 자신을 상대하려 하다니. 소년 기사 미카엘은 한 손을 가슴 위에 올리면서 기사다운 목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특별기사단의 단원 미카엘이라고 합니다.”
“왕국의 기사요?”
수지는 더욱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네. 사령관님처럼 왕정 소속이지요.”
“그, 그를 잡으려고 온 거예요?”
눈을 굴리며 잔뜩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하는 수지에게 미카엘은 조심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어떤 연유로 사령관을 옮기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쁜 의도는 아닌 것 같았기에 미카엘은 상냥한 어조로 답했다.
“아닙니다. 지금은 확실히 도와드리려는 것뿐입니다.”
“지금은? 다른 땐 아니었어요?”
“네. 처음엔 사령관님을 모시려고 왔었죠. 억지로 술수를 써서 데려가려다가 죽을 뻔했지만요.”
아무렇게 않게 싱긋 웃으며 이야기하는 소년이었다. 수지는 그의 단정하고 말쑥한 얼굴을 보면서 오히려 더 불안해지고 말았다. 뭐랄까. 꾸며진 태도까진 아니어도 기계적인 미소가 인간적이지 않다고 할까? 렉스와 어딘가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했기 때문에 수지는 경계를 풀지 않으며 물었다.
“도와준다는 걸 어떻게 믿죠?”
“제가 당신을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죽였을 겁니다.”
소년은 그 증거라는 듯이 자신의 팔을 빨갛게 달구었다. 그 벌건 피부에 수지는 흠칫했다. 그렇다면 저 사람도 실험실에서 만들어졌다는 건가? 수지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다, 당신도 만들어진 거예요?”
“아,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 이야기가 훨씬 수월하겠습니다. 맞아요. 저도 사령관님처럼 연금술로 개량된 인간입니다. 물론 사령관님처럼 강력한 건 아니고요. 간신히 팔에만 마나가 들어가 있죠.”
소년은 오른팔과 왼팔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싱글싱글 웃는데 사교성이 좋은 건지 아니면 뻔뻔한 건지 모르겠다. 수지는 마나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렉스를 쳐다보았다.
“그가 왜 기절한 건지 알아요?”
“음, 잘은 모르지만 풍기는 마나가 좀 불안정하군요. 방금 전 마나를 사용하셨죠? 평소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이 늪은 이상해서요. 마나를 쓰면 쓸수록 몸 안의 마나가 불안정해진다고 해야 할까요? 마나를 좋아하지 않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마나로 구성된 저희도 싫어하는 것 같고요.”
수지는 그 말에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렉스를 바라보았다. 소년이 얼른 덧붙였다.
“하지만 목숨이 위험한 정도는 아닙니다. 위험했으면 이렇게 끌고 다닐 수 없을 만큼 몸이 굳었을 테니까요. 마나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잘 쉬면 일어나실 겁니다.”
“마나가 부족하다고요?”
“그러니까.”
수지의 질문에 잠시 소년이 머뭇거렸다. 자세한 걸 그녀에게 설명해도 될까. 망설였지만 왠지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동자를 보자 확신이 들었다.
“네. 저희는 마나로 몸이 구성되어 있어서요. 마나를 쓰는 양만큼 다시 마나를 채워야 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입니다.”
“하지만 렉스, 여기 와서 마나를 쓴 적은 있어도 채운 적은 없는데….”
소년 기사는 멈칫했다. 그 말은 그녀는 여기서 사령관과 함께 지냈다는 건가? 그러고 보면 부르는 호칭도 정겹기 그지없다. 렉스라니. 사령관을 이름으로 부르는 자는 왕성에서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하며 소년 기사는 한 발짝 수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살펴봐도 될까요?”
“네?”
“연금술사는 아니지만 사령관님과 같은 몸의 구성이라서요. 가까이서 살펴보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수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의도를 읽을 수 없는 눈. 정제된 분위기는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게 한다. 수지는 딱딱하게 외쳤다.
“조, 좋아요! 하지만 이상한 짓을 하면 바로 공격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미카엘은 싱긋 웃으면서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수지는 몸을 살짝 비켰지만 냄비는 내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의 뒤통수를 바로 가격하리라 결심하면서 지켜보자 소년 기사가 렉스의 가슴 위로 손을 올리려 했다.
“뭐 하려고요?”
“사령관님께서는 마나가 심장 주변에 가장 많다고 알려져 계십니다. 그래서 가슴 주변을 느껴 보려고요.”
“위험한 건 아니죠?”
“네. 그저 느끼기만 하는 겁니다.”
수지는 그래도 혹시나 몰라서 그의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사내의 손이라고 하기엔 조금 작은, 소년의 손이 렉스의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 그가 갑자기 눈을 뜨는 게 아닌가. 렉스는 어느새 소년의 손을 움켜서 부러뜨릴 것처럼 옥죄고 있었다.
“큿! 사, 사령관님!”
렉스는 반쯤 뜬 무정한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저, 전 미카엘…….”
“넌 좋아하지 않아.”
“그, 그게 무슨…… 사, 사령관님!”
뼈를 으스러뜨릴 것 같자 얼른 수지가 끼어들었다.
“렉스!”
그녀는 온기 가득한 손으로 렉스의 손등을 감쌌다. 그러자 소년 기사를 옥죈 힘을 풀어 버리는 렉스였다. 그의 눈길은 수지에게 향했고 곧 눈매가 조금 온화하게 느슨해졌다.
“……수지.”
목소리도 어딘가 부드럽다. 미카엘은 분명하게 느꼈다.
“그래요, 렉스. 깨어난 거예요? 갑자기 기절해서 놀랐어요. 마침 이분이 나타나 렉스의 상태를 확인하겠다고…….”
렉스는 소리 없이 눈만 소년 기사에게 굴렸다. 그러나 그 응시는 시간이 아주 짧았고 냉담했다. 자신을 보던 것과는 전혀 딴판의 눈초리라서 수지는 어딘가 민망해졌다.
“괘, 괜찮은 거죠?”
“저 녀석은 군인이야. 아군이지만 적이기도 하지.”
“네?”
그게 무슨 모순된 말이냐고 되묻는 수지에게 렉스는 다시 혼미해진 의식 때문에 더욱 감긴 눈으로 말했다.
“믿을 건 없어.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렉스는 수지를 바라보았다. 아군도 적도 아닌 여자. 늪에서 유일하게 살리고픈 여자. 그리고 저를 좋아한다고 하는 여자. 렉스는 살짝 미소 지었다.
“너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