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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48)화 (48/163)

48화

후욱-!

그때 자연 바람이라고 할 수 없는 인공적인 바람이 위에서 불어왔다. 그 탓에 무게 있는 덤불이 휙 날아가며 구덩이 위쪽이 완전히 개방되었다. 수지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눈을 크게 떴다. 곧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대형견. 방금 전 싸운 탓인지 군데군데 피가 맺혀 있는 짐승은 사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컸고 근육질이었다.

“!”

수지가 흠칫 놀랐을 때, 개가 입을 벌렸다. 그 안에서 무언가 빛이 뭉쳐지고 있었다. 그게 마나라는 것은 수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거기서 풍겨 오는 기운이 끔찍해 얼어붙은 듯이 있었을 뿐이다.

팟.

그때 누군가 개를 뒤에서 잡아당겼다. 개는 낑낑 소리를 내며 발버둥 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수지는 숨도 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을 때, 누군가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

수지는 그게 두꺼비라는 것을 알고 움찔했다. 두꺼비는 커다랗고 괴상한 눈깔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안을 살폈다. 수지가 움직이지 않자 구덩이에 별거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머리를 뒤로 빼는 두꺼비였다. 수지는 그의 입에 묻어 있는 하얀 털을 보면서 막연하게 대형견이 당했구나 생각했다.

“윽.”

수지는 흙에 손을 박아 넣으며 구덩이를 올라왔다. 덤불이 사라진 이상 더는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해서였다. 위로 올라온 수지는 안개를 뚫고 보이는 처참한 광경에 인상을 썼다. 작은 두꺼비가 이빨에 찢긴 듯이 죽어 있었고 그 주변으론 대형견의 털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었다. 아마 서로 싸우다가 개가 두꺼비를 물어 죽인 것 같았다.

조금 더 고개를 들자 끔찍하게 목이 잘린 대형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수지는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대형견의 머리를 물고 사라진 두꺼비의 흔적이 있었다. 녀석은 동족을 죽인 대형견을 처참하게 응징하고 유유히 점액질을 흘리며 숲으로 사라진 것이다.

‘운이 좋았네.’

수지는 안도했다. 두꺼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대형견에게 물렸을 것이다. 참으로 타이밍이 기막히다고 생각했지만, 수지가 인지 못 한 게 있었다. 바로 이 늪의 특성. 마나를 뿌리며 수지를 찾고 있던 대형견에게 그 화기에 맞는 강한 괴물을 보낸 늪의 고약한 성질 말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었지만 그걸 모르는 수지는 이 좋은 운세를 틈타 렉스를 찾아가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까.

안개 가득한 사방에서 막막함을 느낀 수지는 하늘 어딘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상한 물체들이 불에 탄 채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찌그러진 풍선 같기도 하고 조각난 배 같기도 한 그것은 자욱한 안개를 일시적으로 없애면서 숲으로 무섭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저기야.’

왠지 모르지만, 수지는 확신이 들었다. 저곳에 렉스가 있을 거라고.

냄비를 든 채, 그녀는 용감하게 걸음을 옮겼다. 한편, 렉스는 수지의 추리대로 그 하늘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나로 부서진 기구가 땅으로 무섭게 처박힐 때마다 조바심이 들 법도 한데 그는 미동도 없었다. 그저 둔해진 손의 감각을 감지할 뿐이었다.

‘마나를 쓴 탓인가.’

손끝이 둔감해졌다. 마나의 보충이 필요하다는 신호. 평소라면 이쯤에서 왕국의 실험실을 찾았겠지만 여기는 늪이었고 렉스에겐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년 기사를 죽일 생각으로 발을 들었다. 그런데 엎어져 있는 소년 기사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이게 미쳤나. 렉스는 멈칫했다.

“사령관님.”

소년은 진흙이 묻은 얼굴을 들었다. 말을 할 때마다 고통이 역력한지 눈가가 일그러졌다.

“로리엔 님께선 사령관님께서 반항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격이 보통이 아니시라고요.”

“…….”

“저는 설마요. 사령관님께서 명을 어기시겠습니까, 라고 반응했지만 로리엔 님께서는 그저 웃으시더라고요. 당신의 말이 맞을 것처럼. 정말 대단해요. 그분은 렉스 님을 아주 잘 알고 계세요. 전 정말로 예상 못 했거든요. 저희 셋 다 죽이고 기구까지 파괴하실지.”

“…….”

“아무튼, 이런 경우가 생기면 전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웃는 얼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소년 기사였다. 마치 저는 웃으려고 태어났다는 듯이 미소를 품은 얼굴이 어딘가 인간적이지 않고 기괴했다. 하지만 렉스는 그런 기괴함이 익숙한 것처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렉스. 이번에 돌아오지 않으면 기사단 전체를 보낼 거예요. 당신을 찾을 때까지 늪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고요.”

“…….”

“내가 헛말 안 하는 거 잘 알지요?”

소년은 전달을 끝냈는지 다시금 활짝 미소 지어 보였다.

“이상입니다.”

렉스는 그를 바라보았다. 렉스의 표정은 여전했다. 이런 메시지에도 까딱 않는 것처럼. 역시 완전무결한 마나의 인간답다고 생각하며 소년 기사는 입가를 올렸다. 그가 자신을 죽이리란 건 잘 알고 있었다. 안개가 짙어지는구나. 소년은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 * *

“연락이 왔나요?”

로리엔은 실험실로 들어서며 한 편에 서 있는 연금술사에게 물었다. 그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에게서도 연락이 없단 말이죠.”

작게 중얼거린 로리엔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워져 있었다. 벌써 늪으로 보낸 기사가 5명이다. 그러나 연락을 해 온 기사는 한 명도 없다는 것에 초조함을 느끼면서 로리엔은 다시 물었다.

“기구에서는요? 기구 운전자에게도 따로 마법의 가루를 지급한 걸로 아는데요?”

“맞습니다. 혹시나 위험한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주었는데 역시 연락이 없었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연락을 해 보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고요.”

“그거 이상하군요…….”

로리엔은 보기 싫게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늪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로리엔은 렉스를 떠올렸다.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늪은 위험하다고 그랬는데. 로리엔은 늪의 악명에 대해서 떠올려 보고는 보고서를 뒤적였다.

“마나 수식으로 알아낸 렉스의 위치는 늪의 중심부였잖아요. 기구가 그곳에 정확하게 도착한 게 맞나요?”

“네, 도착했을 때 연락이 왔었습니다. 기사들과 사냥견을 무사히 늪 아래로 내려보냈다고요. 그리고 사령관이 타면 다시 연락한다고 했는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로리엔은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좋아요, 그럼 특별기사단 전체를 불러 모아요.”

“전부, 모두를 말입니까?”

수하가 놀란 것처럼 다시 한번 물었다. 로리엔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다른 임무로 나간 자도 무조건 불러…….”

“로리엔 님.”

그때 연금술사 한 명이 다가왔다. 그는 다급하게 말했다.

“식별 번호 130013 기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일삼공공…… 미카엘 말이군요?”

로리엔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재빠르게 회색 물이 가득한 그릇 앞에 섰다. 렉스가 들고 있던 회색 가루가 녹아 있는 그릇이었다. 로리엔은 절로 파동이 번지는 수면을 보며 반갑게 외쳤다.

“미카엘! 렉스를 찾았나요?”

[로, 로리엔 님.]

목소리는 어디 먼 데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했다. 로리엔은 미카엘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통신상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재차 물었다.

“그래요, 미카엘, 나예요. 사령관은 찾았어요?”

[그게…….]

목소리가 어딘가 난감해 보였다.

[찾긴 찾았는데…….]

“그런데요?”

[더 늪에 머물다가 간다고 하셨습니다.]

로리엔이 멈칫했다.

“더 머물다니 그게 무슨 의미죠? 렉스가 그런 말을 한 거예요? 일을 끝낸 게 아니란 뜻인가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만 말씀하시고, 그리고…….]

“잘 안 들려요, 미카엘! 크게 말해요!”

[……자신이 알아서 돌아갈 테니…….]

“뭐, 뭐라고요?”

[……같잖은 기사들 좀 작작 보내라고…….]

“미카엘!”

[……죽이는 것도 귀찮…….]

그리고 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로리엔은 물을 보며 외쳤다.

“렉스가 말한 거예요? 미카엘, 다른 말은 안 했어요? 답해 줘요, 미카엘!”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로리엔은 멈춘 수면을 보며 굳어 있었다. 잠시 후, 로리엔은 연금술사들에게 통신을 연결하라고 외쳤다. 하지만 아무리 마법의 가루를 뿌리고 흔들어도 물은 더는 흔들림이 없었다.

“됐습니까?”

소년 기사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사령관 렉스가 서 있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말을 전한 게 맞는지, 소년 기사는 그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래.”

그가 인정했다. 소년 기사는 다행이라고 소리 없이 중얼거리며 쏟아진 물병을 보았다. 통신이 더 가능하지 않도록 일부러 물을 쏟았다. 진흙이 꾸역꾸역 물을 빨아들였다. 물이 다 없어지기 전에 렉스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어딜 가십니까.”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렉스가 돌아보았다. 소년 기사는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그가 자신을 살려 준 채 이대로 갈 줄 몰랐다. 그래서 다소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무심한 눈빛이 쏘아진다.

“명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나?”

“그, 그게.”

소년 기사는 멋쩍게 말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요.”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아남은 경우 말이다. 소년 기사는 아픈 목을 부여잡은 채 말했다.

“이대로 제가 왕국에 돌아가면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죽여 달라는 건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저를 살려 주셨는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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