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중요한 일과 귀한 시간이라. 전쟁을 말하고 있었다. 렉스가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고 상처 입히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고. 렉스가 진실을 간파하는 동안 소년은 측은한 얼굴로 간곡하게 말했다.
“부디 사령관님. 이대로 바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왕성의 높은 분들께서도 찾고 계십니다. 지연 없이 서둘러 가셔야…….”
“아직 할 일을 끝내지 못했어.”
“그건 저희가 맡겠습니다.”
“너희가? 이 일이 어떤 일인 줄 알고.”
렉스는 냉담한 쏘아붙임에 소년은 멈칫했다가 대답했다.
“우리 왕국에 위협이 되는 존재를 말살하는 일이라고…….”
“연금술사답군.”
렉스가 비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들은 늘 모호하게 말하지. 정작 왜 위협이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말이야.”
소년 기사는 입을 다물었다. 렉스의 말대로 로리엔은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군인이란 왜? 라는 질문을 던지는 자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할 것인지만을 생각하는 자였다.
따라서 소년 기사는 자신이 사령관에게 무언가 말실수를 한 것인가 돌아보고 있었다. 제가 보기엔 사령관은 지금 기분이 무척 안 좋은 상태였다. 일반적이라면 이런 외딴곳에서의 추가 임무를 귀찮아할 것이다. 수하가 나타나면 좋구나 하면서 임무를 얼른 넘길 것 같은데. 오히려 왜 왔냐는 듯이 짜증을 내는 그를 보며 혼란스러워진 소년 기사였다.
렉스는 당황하는 그에게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내가 말해 주지. 그 위협은 나와 관련된 거야. 내 목숨을 위협할 존재가 여기 있다고. 따라서 이 임무는 나밖에 해결할 수 없어.”
“사령관님.”
“너라면 이런 일을 남의 손에 맡기겠나?”
“하지만 로리엔 님께선,”
“로리엔, 로리엔. 그녀는 지금 여기 없어. 둘러봐. 여기 있는 건 나야. 특별사령관.”
“…….”
“그런데 내 명을 거역하겠나?”
렉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소년 기사는 죽음을 느꼈다. 온몸의 감각이 그가 섬뜩한 존재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본능은 현재 가진 모든 마나를 눈앞의 사령관에게 쏟아부어 공격하라고 외쳤지만 소년 기사는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계급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임무는 사령관을 모시고 오란 것이지 다치게 하란 게 아니었으니까.
따라서 본능과 자기 보호로 마나가 일렁이는 오른팔을 다른 손으로 움켜잡은 채 억지로 입가를 올렸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령관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좋아.”
렉스는 본능과 이성의 힘겨운 싸움을 하는 소년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실험의 부작용이랄까? 마나의 육체를 갖게 되면 오감과 본능이 발달해 위협에 더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연금술사들은 그걸 보며 전쟁에 걸맞은 위험 대비 능력이 발현된 거라 했지만 그가 보기엔 참을성이 없어져 즉흥적이게 된 것에 불과했다. 렉스는 제 능력을 죽이느라 힘겨워하는 소년을 보면서 조소를 잃지 않았다.
“그럼 이견 없이 셋 다 이대로 돌아가면 되겠군.”
얼른 왕성으로 꺼지란 소리에 소년 기사의 눈빛이 살짝 짙어졌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시 침묵한 소년 기사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내렸을 때였다. 그게 신호였는지 두 기사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렉스에게 발사했다. 동시에 소년 기사는 렉스의 턱으로 마나로 가열된 손을 뻗었다. 합동 공격을 통해 그를 잠깐이나 제압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렉스는 보통의 기사가 아니다. 그는 특화된 인간이었고 그런 인간들 중에서도 혁신이라고 불릴 만한 완벽함의 집합체였다.
렉스는 자신의 턱을 때리려는 손을 되잡아 그대로 밖으로 쳐 버린 채 소년의 목을 움켜쥐었고 기사들이 쏜 유리병은 팔을 따라 일어난 바람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남아 있던 가지는 그들의 목을 향해 던져 버렸다.
모든 것은 찰나에 이루어졌고 찰나에 끝났다.
“으, 으윽-!”
소년은 목 위가 붉어져 발버둥 쳤다. 핏줄이 굵게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보였다. 렉스는 감흥 없는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유리병을 응시했다. 유리병이 깨진 곳에서 미끈한 녹색 액이 빠져나왔다. 독특한 풀 냄새가 풍겨 왔다.
“마나 억제제.”
무게당 금화 주머니를 받는 고가의 마법 약이다. 렉스는 약의 효능을 중얼거렸다.
“마나를 일시적으로 무력하게 만들지. 길진 않아. 기껏해야 3분, 5분 정도? 그래도 충분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시간이지. 제압해 기구에 억지로 끌고 갈 만한 시간.”
“크, 끄윽-!”
소년 기사는 괴롭다는 듯이 목을 잡은 손을 쳤다. 그의 얼굴은 빨개진 걸 넘어서 퍼렇게, 검게 변해 가고 있었다.
“그래, 로리엔이 내가 오지 않으면 강제로 데려오라고 했나?”
“끄, 끅……렇, 윽!”
“뭐라고? 안 들려.”
뻔뻔한 렉스의 대꾸에 소년 기사는 죽을 것 같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폐부가 쪼그라들어 찢길 것만 같던 그때, 렉스가 손에 힘을 풀었다.
“아-!”
소년 기사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눈앞이 흔들거렸다. 목에 여전히 커다란 돌멩이가 얹힌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숨은 쉬어진다. 소년 기사는 힘겹게 상체를 들어 눈을 굴렸다. 그러자 옆에 쓰러져 있는 두 기사가 보였다. 같이 온 기사들은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다. 투구 아래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목에 꽂힌 작은 나뭇가지. 저런 것에 당해 죽을 수도 있구나, 소년 기사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주위 사물을 무기처럼 사용하는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이봐.”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네. 렉스는 제법 살갑게 덧붙였다.
“로리엔이 어떤 지시를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명령이란 게 늘 따라야 하는 것만은 아니야. 가끔은 눈치껏 행동해야 할 때도 있지. 지금처럼.”
“끄, 끗.”
소년 기사가 억울하다는 듯이 신음을 냈다.
“알아. 너도 다른 수가 없었겠지. 하지만 솔직히 곤란할 지경이거든. 로리엔이 자꾸 나를 애완동물 취급해 기사들을 보내는 게 말이야. 멀리 내놓으면 집 나갈 개새끼처럼 챙기는 게 얼마나 성가실지 생각해 봐.”
처절하고 힘겨운 눈빛이 렉스에게 향했다. 소년은 살려 달라는 듯이 렉스를 쳐다봤다. 미소가 사라진 소년과 달리 렉스는 누가 봐도 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근데 로리엔이 하나 착각한 게 있어. 난 그냥 개새끼가 아니거든.”
전혀 웃고 있지 않는 눈으로.
“아주 막강한 개새끼지.”
어둠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짙은 마나의 파장이 회오리치며 일어나는 것에 소년 기사는 처음으로 절망했다. 아까 본능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크게 후회하며.
렉스가 쏘아 올린 마나가 공중의 기구를 반으로 두 동강 냈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 구덩이 아래 숨어 있던 수지는 펑- 하는 폭발음을 들었다. 희미했지만 분명히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렉스?’
왜 그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수지는 초조해져서 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볼 수 있는 거라곤 렉스가 밀어 놓은 덤불뿐이었다. 회백색 덤불은 가시가 박혀 있어서 맨손으로 만지기도 부담스러웠다. 짐승이나 벌레의 침입을 막으려고 그런 거겠지만 반대로 수지가 어디로 가지 못하도록 막는 도구도 됐다. 수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상황인지 자세히 듣지 못한 채 이곳에 갇혔다. 렉스는 자신을 찾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수지 역시 찾아낼 것처럼 말했다. 그 말은 렉스를 찾는 이들이 그들에게 적대적이란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자신까지 이런 곳에 숨겨야 하는 걸 보면 만만찮은 자들임에 틀림없었다.
‘그 혼자서 괜찮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지금 상황에선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수지는 찬기가 꾸물꾸물 흘러나오는 구덩이를 둘러보며 한쪽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위를 힐끔거렸다. 혹시라도 뱀이 떨어지는 건 아닐지. 과거 기억의 두려움에서 위를 쳐다보았으나 다행히 입구를 막은 덤불은 건재했다. 수지는 안도한 채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몇 분이 흘렀을까. 컹컹 소리를 들었다.
“강아지?”
하지만 강아지라고 하기엔 들려오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곧 우렁차게 짖는 소리에 수지의 어깨가 굳어졌을 때, 무언가 싸우는 소리가 났다. 캉캉 날카로운 소리가 덤불을 뚫고 사정없이 들려왔다. 짐승들끼리 물어뜯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이윽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수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싸움의 여파인지 덤불이 살짝 밀려나 있었다. 그리고 그 틈으로 무언가 뚝뚝 아래로 흐르기 시작했다.
“!”
그게 체액이라는 건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점성이 높은 액체가 느릿느릿 떨어지는 것에 놀란 수지는 비명이 새어 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수지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더듬거렸다. 냄비가 잡혔다. 두 손으로 꽉 쥔 채 위를 보자 덤불이 밀려난 틈으로 무언가 쑥 들어왔다.
‘코?’
길쭉한 짐승의 코였다. 수지는 호흡을 멈췄다.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 했다. 냄비를 쥔 채 벽의 흙이 자신의 냄새를 가려 주기를 바랐다. 얼마나 킁킁댔을까. 이윽고 코가 물러났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엇인지 몰라도 짐승이라면 일단 피하는 게 안전했다. 수지는 땅에 떨어진 가방을 집어 올리면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