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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44)화 (44/163)

44화

“갔나…….”

수지는 어질거리는 머리를 느꼈다. 이상한 현기증이 일었지만 일단 무사하다. 수지는 덮었던 옷을 힘없이 내리며 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에 온통 나뭇잎을 붙인 상태였다. 꼭 나뭇잎의 왕자처럼 잠들어서. 수지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수지는 몸 전체로 내려앉는 안도감을 느꼈다. 자꾸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그를 살폈다. 반듯한 얼굴. 창백해진 낯빛과 감긴 눈을 제외하면 멀쩡해 보인다. 수지는 숨죽인 목소리로 물었다.

“렉스 안 다친 거 맞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대답할 리 없는데 그래도 안전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 렉스의 눈꺼풀이 들려 올라갔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까만 동공이 들어차고 이지가 번쩍거리자 수지는 저도 모르게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수지?”

낮은 목소리. 건조하고 메마른 음성이 무척이나 반갑다. 수지는 입을 벌린 채로 다소 멍하게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놀랄 일은 또 남아 있었다.

“왜 진흙이 얼굴에 묻어 있지? 안색도 좋지 않군.”

그게 불만이란 듯이 렉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와, 렉스.”

그러나 수지는 무척 놀라서 다른 말을 해야 했다.

“말이 통하잖아요? 어, 어떻게 된 거예요? 기절해 있는 동안 한글을 배운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란 걸 알면서도 수지는 그렇게 물어야 했다. 그만큼 신기했다.

“한글? 그렇게 들리나 보지? 나는 대륙의 공통어로 말하고 있어. 네가 말하는 것도 다 공통어로 들려.”

“정말요? 전 우리나라 말로 하고 있는데. 신기하네요.”

수지는 활짝 웃었다. 기쁘다는 듯이 입가를 올렸지만 미소에는 어딘가 힘이 없었다. 이상하다고 느낄 무렵 수지가 졸린 듯이 눈을 느리게 끔벅였다.

“이게 다 렉스 덕분이죠? 아까 제 머리에 뿌린 거요. 그게 그러는 거예요?”

“마법의 가루로 통역을 가능케 한 거야.”

“마법의 가루? 와. 마법도 있어요? 역시……. 대단한 세계에요…….”

수지의 목소리가 늘어진다. 그리고 순간 수지의 고개가 렉스의 목으로 떨구어졌다. 그는 멈칫했다. 다행히 가느다란 숨결이 목가에 느껴진다. 따뜻하고 고르게, 그녀가 기절했다는 것을 알리는 나직한 숨결이.

“도대체 내가 잠든 사이 뭘 한 거지?”

렉스는 고되다는 듯이 잠들어 버린 수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점점 멀어지는 희미한 날개 소리를 얼핏 들은 것도 같다. 렉스는 자신의 가슴 위로 쓰러진 수지를 보며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고, 수고하셨네.’

늪지의 고인 물을 없앴다. 삽을 들고 물길을 새로 내자 까맣게 썩은 물이 시원하게 흘러갔다. 질척한 늪지의 바닥이 드러난 것을 보며 민원을 냈던 주민은 시원스럽게 웃었다. 그녀는 삽을 든 채로 엉망이 된 바지를 입고 있는 수지를 바라보았다.

‘옷을 버려서 어떡하나. 예쁜 바지가 엉망이 됐어.’

이 정도야 아무렇지 않아요. 수지는 씩씩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일단 민원을 해결한 게 기뻤다. 문제는 이 늪을 뭐로 채울 것 인가, 였다. 그대로 두면 사람이 다치거나 또 시커먼 물이 고일 수 있으니까. 면장님께 말해 내년 매립 공사 일정에 넣어야 할까 생각하는데 어디선가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늪이었던 곳을 보자 뛰어오르는 파충류, 그리고 솟아오르는 벌레들이 있다. 수지는 난감해졌다. 주민이 빙그레 웃었다.

‘이 늪지엔 옛날부터 많은 것들이 모였지. 온갖 것들이 득실거리며 살기 좋거든. 잡아먹혀도 잡아먹어도 서로를 개의치 않고 말이야. 이런 게 당연한 모습 아니겠어?’

수지는 왠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민원이 해결된 주민은 기분 좋게 몸을 돌려 뒷짐을 진 채 사라졌다. 수지는 늪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온갖 것들이 득실거리며 사는 늪. 왠지 콘크리트로 무자비하게 메워 버리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럼 생태 구역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을 때, 누군가의 손길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수지는 잠에서 헤어 나오려는 것처럼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시야를 확보하려 눈을 깜박이자 렉스가 보인다. 어쩐지 뻣뻣해진 그는 선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뜻이지? 생태 구역이라니?”

뺨을 어루만지며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터트리는 렉스였다. 수지의 입에서 나온 말이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불안하다. 저번에 그 ‘래연이’처럼. 심각해진 렉스를 보면서 수지는 말을 더듬었다.

“아, 아뇨. 그게 꿈에서, 어떤 민원인이…….”

“?”

“그게 그러니까 온갖 것들이 득실거리는 늪이 있었는데…….”

렉스가 여전히 못 알아듣겠다는 듯이 턱을 갸웃거렸다. 멀쩡한 사내. 수지는 그의 동공을 들여다보고 멀쩡한 피부를 확인했다. 아까 느꼈던 안도감이 다시 고개를 쳐든다. 수지는 그대로 상체를 일으켜 그를 껴안고 말았다.

“!”

렉스가 놀랐는지 몸을 굳혔다. 갑작스럽게 포옹을 할 줄은 몰랐다. 물론 좋았기에 수지를 떨쳐 내거나 밀어내지 않았다. 그녀의 주는 온기와 밀도를 즐기듯이 가만히 서 있자 걱정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목소리로 수지가 말해 왔다.

“렉스, 다행이에요.”

“…….”

“깨어나서.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가슴을 이상하게 흔든다. 죽은 심장을 자극한다. 렉스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적도 아군도 아닌 이상한 존재. 수지는, 운명의 적수라고 연금술사들이 떠들었던 그녀는, 무엇이기에 이렇게 자신을 뒤흔들 수 있을까. 렉스는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에 사로잡혔음을 깨달았다.

수지는 그런 혼란스러운 렉스를 모르는 것처럼 아주 편안하게 말하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다 기절해 버려서 깜짝 놀랐어요. 많이 아파 보였거든요.”

수지는 눈가를 찡그리며 얄궂게 덧붙였다.

“앞으론 마법의 가루가 있으면 좀 남겨 둬요. 한 번에 다 쓰지 말고.”

렉스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깨어나서 주변을 둘러보고는 그녀가 무엇을 한 건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죽어 있는 살인 벌레와 몸에 붙어 있는 진흙 잎사귀. 그 옆에 커다랗게 굳은 흙덩어리 옷도 있었다.

수지의 부어 있는 무릎을 보면서 렉스는 그녀가 살인 모기를 상대로 최선을 다했음을 알아차렸다. 다친 상태로도 저를 구하고자 애썼음을. 그리고 그건 이상하게 불편하면서도 벅찬 느낌이었다. 어떤 용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 자체로 귀하다며 살리려고 한 게 아닌가. 렉스는 자신이라는 무기를 무용하게 해 버리는, 수지의 관점에 대해서 재고해야 했다.

이대로 수지와 함께여도 괜찮을까? 자신을 인간으로 봐 주는 그녀와 정녕 있어도 된단 말인가?

수지만 생각하면 렉스의 갈비뼈 안쪽이 욱신거린다. 심장이 있는 곳. 그곳에는 멈춘 심장을 대신해 돌고 있는 마나가 있었다. 수지는 그 마나를 뚫고 틈입해 심장을 자극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렉스는 그렇게 수지를 인식했다. 참으로 곤란하고도 난감한 존재라고…….

“렉스, 어디 아파요?”

렉스는 대답 대신 수지의 목을 감쌌다. 단단한 힘이 목을 움켜쥐자 수지의 얼굴이 마법처럼 붉어졌다.

“어, 음. 안 아프다면 다행인데.”

“머리는 괜찮나?”

도리어 질문해 오는 렉스에게 수지는 뒤통수를 만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금방 나았네요. 심하지 않았었나 봐요.”

시간이 멈춘 몸은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수지의 편안한 어조에 렉스는 음험하게 말했다.

“다행이군.”

다시 가까워지는 얼굴.

“뭘 하려고…….”

어물거리는 말투를 들으며 렉스는 미소 지었다. 곤란하고 난감한 존재에게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당장은 육체적으로 겹쳐져 서로의 안위를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렉스는 짓궂게 말했다.

“알잖아. 내가 뭘 할 건지.”

렉스는 소중한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쳐 넣기 시작했다.

“음…….”

때론 말보다 몸이 상대에게 하고픈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달한다.

렉스는 수지가 무사한 걸 보고 싶었다는 듯이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내렸다. 얼굴에서 뿜어내는 숨결이 그녀의 가슴께에 머물렀다 배꼽으로 이동했다. 섬세하게 꼼꼼하게 몸을 핥아 내려가는 그에 수지는 점차 달궈지는 육체를 느꼈다. 마침내 그의 낮은 숨결이 은밀한 두 다리 사이에 닿자 목까지 얼굴이 빨개졌다.

“깨,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수지는 무너지려는 이성을 간신히 붙든 채 그의 맨 어깨를 밀어냈다. 가슴을 애무당한 터라 두 눈은 상당히 쾌락으로 물들어 있었다. 살짝 부풀어 통증을 호소하는 유두가 아릿하다고 느끼면서 수지는 흐릿한 눈을 깜박였다.

“조, 좀 쉬고 나중에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중에?”

렉스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지금 순간에 너무 잔인한 제안 아닌가? 그런 건 시작하기 전에 말해야지.”

“틈을 주지 않았잖아요.”

수지의 억울하다는 대꾸에 렉스는 미소를 머금었다. 축축한 혀를 내밀었다. 물기 어린 멍울을 동그라미를 그리며 핥자 수지의 입에서 달콤한 신음이 빠져나왔다. 쾌락에 움츠러드는 몸을 따라서 이 촉촉하고 말랑한 것이 어찌나 야하게 흔들리는지. 렉스는 혀를 길게 빼 사랑스럽다는 듯 멍울을 빨았다.

“으, 흣.”

신음은 흐느낌으로 변해서 렉스의 귀를 간지럽혔다. 이렇게 수지의 건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렉스는 조여드는 두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채로 타액으로 흠뻑 젖은 음순을 정성스럽게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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