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뭐? 흑, 구해 줬다고?”
그제야 놀란 것처럼 렉스를 바라보는 루지였다.
“다, 당신이 우리 파루를 구했어요? 정말이에요?”
재차 묻는 그녀에게 렉스는 대답할 마음이 없었다. 렉스의 입장에선 소란을 피운 괴물을 처리하다 보니 전사를 구했고, 전사를 구하고 보니 다른 인간들의 기척도 느껴 그들에게 어깨에 멘 이것이 시체든 뭐든 데려다줄까 했던 것이다.
물론 그냥 죽게 내버려 두는 게 가장 편한 일이었겠지만 수지가 마을 사람들을 살려 주길 바랐던 기억이 그의 발길을 붙잡았고 결국 괴물에게 끌려가는 전사를 내버려 두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얼른 던져 주고 돌아가려고 했더니.’
수지가 나와 있을 줄이야. 렉스는 이 귀찮고 소란스러운 침입자들이 어서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루지는 그럴 생각이 없는지 수지의 괜찮냐는 눈빛에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흑, 늪 중심부엔 이상한 괴물이 더 많다고 했지만 이렇게 강하고 출몰이 잦을 줄은 몰랐어요. 어찌나 처음 보는 것들이 무섭게 달려드는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당할 뻔했어요! 아마 파루와 바밀이 없었다면 전 강에서 내려선 순간 죽었을 거예요! 갈대숲에 머리가 둘 달린 포악한 새가 숨어 있는 거 알아요? 물고기도 절 잡아먹으려고 튀어 오르고요. 정말 발 딛는 순간부터 방심할 수가 없더라고요! 신발을 이상한 구더기가 훔쳐 가질 않나, 머리를 나무줄기가 뜯으려 하질 않나.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는 거예요?”
훌쩍거리며 그녀는 서럽게 이야기해 댔다. 시끄럽고 요란하고. 렉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주변을 살폈다. 이대로 있으면 괴물들이 더 몰려올 것이란 건 자명했다. 주위를 신중하게 살피는 시선에서 렉스의 마음을 읽은 수지가 루지의 손을 잡으며 거처로 가자는 듯이 숲 너머를 가리켰다.
“어디 가요? 집이요? 근처에 집이 있어요?”
루지가 재차 물었다. 대답할 수 없는 수지가 렉스를 쳐다보자 마지 못해 렉스의 입이 열렸다.
“머무는 데가 있다.”
“그래요? 잘됐네요! 얼른 안내해요!”
“누가 데려간다고 했지?”
렉스는 웃기지 말란 듯이 대꾸했다. 거처는 수지와 자신의 은신처였다. 다른 인간들을 들이고 싶은 맘 따윈 없다. 따라서 냉정하게 노려보자 루지가 깜짝 놀랐는지 딸꾹질을 했다. 수지는 얼른 렉스를 쳐다보았다.
“다쳤잖아요. 우리가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수지는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해 달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진다. 다른 자가 그랬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수지는 다르다. 수지는 유일하게 눈과 귀를 기울이고 싶은 인간이었다.
따라서 렉스는 한숨을 짧게 내쉬며 파루를 어깨에 들쳐 멨다. 땅에 박혀 있는 바밀이라는 자도 꺼내서 팔로 부축했다. 그렇게 두 장정을 짊어진 채 앞서는 그를 보면서 루지는 내심 크게 놀라고 말았다. 역시 보통 인간이 아니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가는 것을 말린 이유가 있음을 깨달으며 루지는 땅에 떨어진 자신의 가방을 주워서 수지를 뒤따랐다.
“와.”
거처 근방에 도착하자 루지는 탄성부터 터트렸다. 천연 안개의 지형이었다. 질척거리는 땅 위로 자욱한 안개가 늪을 뒤덮었다. 방향을 알 수도 없고, 시야를 분간할 수도 없어서 오로지 감으로만 걸어가야 하는 곳. 루지는 이런 곳에서 사는 수지와 렉스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살폈다.
“여기예요.”
수지가 제법 익숙하게 덤불에 가려져 있는 길로 안내한다. 딱딱한 나무가 박혀 있는 길은 질척이는 땅과 달리 안정감 있게 밟혔다. 길을 지나자 나뭇잎과 줄기로 얽힌 임시 거처가 보인다. 허술해 보였으나 틈 없이 막혀 있는 벽이나 손질된 문은 관리가 잘 된 것처럼 보였다. 루지는 큰 눈으로 거처를 크게 훑고는 수지가 열어주는 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따뜻하다…….”
집에는 온기가 머물러 있었다. 습하지만 불을 때는 공간답게 바깥과 다른 편안함이 있다. 루지는 여기저기 눈을 굴려서 방을 관찰하다가 나무 침대를 발견했다. 두 사람이 딱 붙어서 자야 할 크기의 공간. 물끄러미 보고 있자 렉스가 일부러 소리 나게 파루와 바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조심해요!”
루지의 타박에 렉스가 그녀를 싸늘하게 응시했다.
“읏.”
지난번에 그에게 공격을 당한 기억 때문일까. 그를 쳐다보면 무섬증이 확 올라온다. 루지는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파루와 바밀을 살폈다.
상처는 다행히도 깊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수지가 주는 물로 그들의 목을 축여 주고는 상처를 닦아 주었다. 그리곤 벌레 으깬 것을 가져와 상처 부위에 덧발랐다. 아픈지 파루와 바밀이 잠시 신음을 냈다. 하지만 곧 찡그린 얼굴이 평온해졌고, 루지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괜찮겠죠?”
주저앉은 루지를 보면서 수지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루지는 수지를 바라보았다. 따뜻하고 걱정이 깃든 시선. 남자와 달리 온정이 깊은 눈동자다. 안쓰러워하는 얼굴을 보며 루지는 일부러 밝게 말했다.
“걱정해 주는 거죠? 안심해요! 파루랑 바밀이 얼마나 강한데요! 겨우 이런 괴물들에 죽을 사람들이 아니라고요!”
크게 떠든 루지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걸까. 파루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잘 흘러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겨, 겨우 이런 괴물들이 아닙니다…….”
“파루, 괜히 힘주어 말하지 마. 상처가 도져.”
“여기 괴물들을 상대로 오래 버텨 낼 수 없으니 서, 서둘러 돌아가야…….”
파루가 곧 콜록거렸다. 배를 움켜쥔 채 고통이 침투한 듯한 기침을 뱉어 냈다. 루지의 표정은 금세 안 좋아졌다. 그녀는 마을의 강한 전사가 이토록 아파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우리 바로 돌아가자.”
루지는 울 것 같은 눈가를 손으로 비비면서 가지고 온 가방을 수지에게 내밀었다.
“네?”
수지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루지는 열어 보란 듯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렉스가 주시하는 가운데 가방을 열자 그 안에서 여러 벌의 옷이 나왔다. 루지가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한 활동성이 좋은 것들이었다. 수지가 놀라서 하나씩 옷을 꺼내 보다가 바닥에 깔린 옥패를 발견했다. 꺼내 들고 루지를 바라보자 그녀의 입가에 처연한 미소가 맺혔다.
“이걸 다시 돌려주었다고 들었어요. 나도 참. 그날 왜 기절해 버려서 일을 크게 키운 걸까요. 괜한 오해를 받게 해서 미안해요. 누군가에게 목숨을 위협받은 건 처음이라서 저도 모르게 몸이 과잉 반응한 모양이에요.”
루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잠깐 렉스를 노려보았다. 원인 제공자를 노려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신경도 쓰지 않을 자였지만 루지는 그러한 행동에서 조금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오해가 커져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 사과도 할 겸, 물건도 줄 겸, 그리고 나가는 것에 대한 꿈도 꿔 볼 겸 이 늪지 중심부로 향한 것이다.
그러나 아파하는 파루와 바밀을 보자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잘못된 선택이었나 후회가 된다.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경고했던 장소였다. 강 중류, 그러니까 습지의 음기가 집약된 중심부는 마을이 있는 강 상류와는 달리 고약한 생물들이 득실거려 실수로라도 그곳에 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한사코 수지에게 사과해야겠다는 딸을 보면서 결국 마을의 대표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외출을 허락하는 대신 세 가지를 약속하게 했다.
항상 파루와 바밀 곁에 붙어 있을 것. 목적을 이루면 바로 돌아올 것. 그리고 렉스라는 인간을 괴물만큼 조심할 것. 루지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마지막 조건을 의아해했다. 렉스라는 인간을 괴물 대하듯 조심하라니. 그래 봤자 인간 아니겠냐고 생각했던 루지였다. 루지는 경계하는 렉스를 힐끔 쳐다보고는 수지에게 말했다.
“이건 사과의 의미이기도 하고 친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잘 맞았으면 좋겠어요.”
“고마워요. 문으로 만든 옷도 참 좋았는데 그건 너무 아름다워서…….”
문이라는 단어에 루지의 고개가 벽을 향했다. 벽에는 반짝이는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그날 이후 한 번도 입지 않은 것인지 새것처럼 깨끗했다. 수지는 그녀의 시선에 서둘러 변명했다.
“함부로 입으면 안 될 거 같아서요. 특별한 날에 입어야 할 거 같아서 저기 걸어 두었어요.”
수지는 싫어서 그런 게 아님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래서 목소리에 열을 내며 여러 번 설명하자 루지의 시선이 오롯하게 그녀에게 향한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드레스를 가리키며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려는 수지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루지는 활짝 미소 지었다.
“알겠어요. 부담 갖지 말고 입고 싶을 때 입어요. 소중하게 보관하는 거 알았으니까.”
제일 깨끗한 벽에 단정하게 걸려 있는 문의 드레스를 보며 루지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루의 상태를 보아서라도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다.
루지는 가겠다며 파루와 바밀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볼일이 끝났음을 알자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수지는 깜짝 놀라며 머물라는 듯이 손을 저었으나 파루가 극명하게 반대해 왔다. 그는 통증으로 쑤시는 배를 움켜쥔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가야 합니다, 마을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직하게 그 말을 내뱉는 모습이 바보스러울 정도라고 루지는 가만히 생각했다. 루지 역시 이곳에서 하루 쉬며 몸 상태를 회복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파루가 원치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루지는 몸을 일으켰다. 가녀린 여자 하나가 장정 둘을 부축하려는 움직임에 수지는 얼른 가서 어깨 하나를 빌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를 막는 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