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길 만드느라 몸이 엉망이 될 때까지 힘써 줘서 고마워요.”
렉스가 알아들었다면 힘이 별로 안 들었을 거라 했을 것이다. 어찌 됐든 상냥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어 오는 수지에게 렉스 또한 가슴이 미묘하게 흔들거리는 걸 느꼈다. 수지는 늪지의 습기를 몰아 다니는 바람을 맞으며 나긋나긋한 자태로 렉스를 바라보았다.
“씻으러 갈까요?”
함께.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옮기면서 나직하게 덧붙이는 수지는 아름다웠다. 이상하게도 그녀라는 존재가 있으면 이 늪지 또한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험악하고 투쟁해야 할 곳이 아니라 살아가고 품어야 할 곳으로 다가온다. 그 변화를, 렉스는 멈춘 심장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느끼고 있었다.
왠지 모를 습습해진 가슴을 느끼면서 렉스는 냄비를 드는 수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점심은 알 요리를 할게요.”
거처를 나서서 수지는 먼저 갈대숲으로 향했다. 몸을 웅크린 채 갈대에서 새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렉스가 일부러 소란을 일으켜 당당하게 알을 거둔 것과 달리 수지는 참을성 있게 기다려 새가 사라진 둥지에서 알을 가져왔다.
처음에는 알을 가져가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이 머리 두 개 달린 새가 모든 알을 품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마음을 놓았다. 그들은 가장 큰 알만 품었다. 가장 큰 개체만을 아꼈다. 그게 종족 보존의 법칙이란 듯이.
“두 개면 넉넉하겠죠?”
수지는 미소 지으며 알을 잎사귀 주머니에 넣었다. 알을 들고 다니는 걸 몇 번 보더니 렉스가 만들어 준 것이다. 질긴 잎사귀를 엮어 만든 주머니는 어깨를 가로질러 멜 수 있었다. 수지는 그곳에 알을 챙겨 두고 다시 렉스를 따랐다. 렉스는 그들을 샘으로 안내했고, 주변이 안전한지도 확인했다.
수지는 냄비 가득히 물을 챙기며 덤불을 둘러보는 렉스를 살폈다. 그는 몸을 씻기보다 주위를 경계하는 것을 먼저 했다. 안전한지 확인하는 행동이 버릇처럼 나왔다. 군인으로서 늘 머무는 지역을 정찰하던 습관이 몸에 밴 것이지만 잘 모르는 수지는 그가 참 신중하고 꼼꼼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버릇 덕분에 이 늪지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거라고.
‘나도 좀 그를 배워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맑은 샘의 표면을 보던 수지는 반대편에 황금빛으로 어릿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
동물도 식물도 아니다. 곤충이다. 나비처럼 크고 너울거리는 날개를 가진 벌레. 살랑거리며 나는 모양이 우아하고 기품 있어서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던 것 같다. 왠지 시선을 앗아 간다고 느낄 때, 렉스가 다가와 그 나비 벌레를 손가락으로 툭 튕겨 버렸다. 그러자 벌레가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지며 커다란 두더지 같은 것이 땅에서 솟아 나왔다.
수지는 눈을 크게 떴다. 두더지는 사람만 했다. 샘의 맞은편에서 소용돌이 같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렉스는 두더지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가끔 살기에 반응하는 괴물이 있다. 두더지도 눈이 없는 대신 그런 감이 발달했는지 금세 입을 다물며 꾸물꾸물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수지는 놀란 입을 다물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얼굴엔 당황과 놀람, 그리고 아쉬움이 있었다. 두더지 괴물의 등장이 생경하면서도 한편으론 나비로 유혹해 잡아먹는 모습에 어딘가 아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뭐랄까. 여기선 순수하게 즐길 수 없다고 해야 하나.’
이 늪지는 겉보기에 안전하다고 실제로도 안전하진 않았다. 그래서 나비 하나를 보더라도 감탄하지 말고 긴장해야 했다. 수지가 약간 우울해져 한숨을 내쉬자 렉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처리한 거 같은데 왜 실망스러운 얼굴일까. 수지의 시선이 나비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다는 것을 보던 렉스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서둘러 몸을 씻고 수지에게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수지는 집으로 빨리 돌아가려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렉스는 왔던 길과 다른 길을 택했다. 암석들이 비석처럼 비쭉하게 돋아난 길이었다. 생전 처음 걷는 길에 수지는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를 바짝 뒤쫓았다.
‘어딜 가려는 거지?’
얼마나 걸었을까. 울퉁불퉁한 돌에 발목이 아플 때였다. 갑자기 멈춰 선 렉스 때문에 그의 등에 살짝 코를 박은 수지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카리반.”
“네?”
수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앞에 동글동글 나사 모양으로 생긴 기이한 잎사귀가 가득 보였다. 그 특이한 잎들은 까만 거목에 주렁주렁 조명처럼 매달려 있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잎사귀와 달리 어두침침한 거목은 마치 지금이 밤인 것 같은 분위기를 주었다.
수지는 검은 거목 틈바구니에서 반짝반짝 빛나며 흔들리는 은빛 잎사귀를 바라보았다. 마치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보고 있는 것처럼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생경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을 눈동자에 하나씩 담고 있으려니 렉스가 잎사귀 하나를 흔들었고 곧 잎사귀가 종소리를 내며 나무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수지는 아이처럼 탄성을 터트렸다. 신비로운 나무는 신비로운 소리를 냈다. 듣고 있노라면 가슴속이 청아해지는 것 같은 풍경 소리를. 수지는 맑게 번져 가는 소리에 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잎사귀의 빛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정말 멋져요, 렉스.”
그 조용한 감상에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이 묻어 있었다. 렉스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맘에 들어 하리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기뻐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데려올 걸 그랬다. 렉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수지를 지켜보았다.
수지는 사뿐사뿐 흔들리는 잎사귀 사이를 거닐었다. 혹여라도 울고 있는 잎사귀가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걷는 모습이 마치 늪을 아끼는 요정 같았다.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이라고 생각하면서 렉스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카리반. 눈부시도록 이색적인 광경을 가리켜 그렇게 말했지 않았던가. 왕국에선 이색적인 풍경을 만나면 자연스레 그 단어를 뱉게 되어 있었다. 렉스도 학습된 대로 그 말을 따라 했지만 지금처럼 그 단어의 의미를 뼈저리게 느낀 건 처음이었다.
수지는 확실히 달랐다. 사람들과는 다른 파장을 뿜어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풍경도 그녀가 있으면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색깔이 입혀진 것처럼 생동감을 발했다. 신비롭고 기괴하게 느껴지도록, 완벽한 생태계로 말이다. 따라서 렉스는 세상을 무채색으로만 보던 자신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고 있는 수지라는 여자에게 호기심을 더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살아 있어 살려 준 것인데.’
이제는 무엇을 더 보여 줄지 어느덧 기대하고 만다. 렉스는 잎사귀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수지를 보면서 한동안 우두커니 움직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 수지는 기분 좋게 달걀 요리를 해서 렉스와 나눠 먹었다. 특별하면서도 예쁜 광경을 보고 온 탓일까. 왠지 수지의 얼굴은 내내 상기되어 있는 것처럼 발그레했고, 그것은 렉스의 음심을 자극했다. 수지라는 여인이 지닌 생기 있는 눈빛과 분홍빛 뺨, 붉은 입술이 의무적인 삶을 살아온 렉스를 뒤흔든다.
렉스는 어느덧 푸른 열매를 가공하는 것을 멈추고 수지를 끌어당겨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
‘어, 어?’
한편 수지는 갑자기 뜨거워져 자신을 내리누른 렉스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뭐 때문에 그는 이렇게 금세 달아오른 걸까.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오전의 다정한 행동들. 자신이 좀 더 살기 편하도록 집을 꾸미고 주위를 경계하고 풍경을 구경시켜 주는 행위들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게 아닐까. 말 그대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고. 따라서 수지는 햇빛이 존재하는 낮에 이런 행위를 한다는 게 부끄러우면서도 거부하지 않은 채로 그를 보고 있었다.
“참을 수가 없어, 수지.”
무슨 말을 저렇게 강한 눈빛으로 하는 걸까. 수지는 가슴이 쿵쿵 뛰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에 질식될 것만 같았다.
그의 건조하고 삭막한 눈가에도 변화가 느껴진다. 살짝 느슨해진 눈꼬리며 이상한 열기가 있는 동공이며. 그는 자신에게 분명히 반응하고 있었다. 그게 감정의 잉태라는 것을 뚜렷하게 알지 못한 채, 수지는 왠지 마음이 부산스러워져 그를 바라보았다. 렉스는 한 자 한 자 그녀의 눈동자에 말이 박히도록 낮게 중얼거렸다.
“너를 보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군. 이토록 뜨거운 열기가 마나가 아니란 게 의아할 정도야.”
렉스는 그녀의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뜨거운 피부의 홧홧함을 느끼고 맥동하는 핏줄의 흐름도 느낀다. 이것들이 그녀가 눈앞에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 준다. 렉스는 진심으로 기꺼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까 거칠게 탐하더라도 용서해 줘.”
선제적 사과는 보통 비겁한 자들이 하는 것이다. 알면서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렉스는 그녀의 입술을 물어뜯듯이 키스했다.
“아, 아……!”
렉스의 몸은 불덩어리 같았다. 하나의 용광로 같은 심지가 그의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수지는 그 불길을 품었다. 커다란 심지가 자신을 몸을 가르고 들어와 안을 깊숙이 찌르는 것에 큰 소리로 반응했다.
습한 탄성을 내질렀고 눈가에 물기를 머금었다. 늪지의 습도는 그 질척이는 정도를 극렬하게 만들었다. 수지의 몸은 곧 눅눅한 체액으로 가득해졌다. 땀이 몸의 곡선을 타고 흐르는 가운데 수지는 자신의 허벅지를 뻐근하게 만드는 그의 체중을 느끼며 아득하게 눈을 감았다.
커다란 것이 빡빡하게 내벽을 긁으며 찔려 본 적이 없는 곳까지 자극하고 있었다. 숨만 간신히 내쉴 수 있을 뿐이었다.
“수지, 이수지.”
그러나 그건 렉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 성나고 급하고 요동치는 열정에서 그녀의 이름이 다였다. 렉스는 욕망을 몸에 두른 상태였다. 그를 구성했던 마나가 흥분된 그의 상태를 따라 몸에서 요동쳤고, 폭발할 듯한 갈증이 치솟았다.
렉스는 더욱 깊게 수지의 몸을 휘감았다. 다리 사이로 깊게 쑤셔 들어가며 그녀의 허리와 엉덩이를 매만졌다. 손바닥에 감기는 살결의 보드라움과 성기에 감겨드는 내벽의 조임은 육체가 동시에 줄 수 있는 즐거움을 완벽히 설명하고 있었다. 렉스는 이를 맞물리며 힘차게 허리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