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얼른 돌아서 집에 가요.”
집까지 걸어가며 렉스를 더 고생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수지는 그가 지니고 있는 마법의 가루를 쓰려고 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한 톨의 가루도 낭비할 수 없었다. 수지와 말이 통하려면 가지고 있는 양 모두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수지는 근처 깨끗한 나뭇잎으로 피를 마저 닦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수지에게 시선을 준 채로 가만히 다른 손을 반대 방향으로 뻗었다. 곧 느꼈던 기척이 빠르게 날아들었다.
휙, 휙.
그것들은 푸른 불꽃처럼 번쩍였다. 마치 유령 불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요란하게 시선을 강탈했다. 렉스의 상처를 닦다 말고 수지도 놀라서 불꽃을 보았는데 곧 그게 불꽃이 아니라 푸른 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
수지는 의아한 탄성을 내고 말았다. 푸른 새의 생김새가 저번에 봤던 새와 무척 흡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새처럼 온화하지 않았다. 새는 그들의 머리를 쪼려고 달려들었다. 렉스는 성가시다는 듯이 그것들을 잡으려고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새 한 마리가 잡혔고 렉스가 주먹으로 날개를 으스러뜨리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요!”
수지가 원주민에게서 구해 줬던 푸른 눈의 소년이 숲에서 나타났다. 수지가 깜짝 놀라서 쳐다보자 소년이 아는 척을 해 왔다. 한 손을 들며 멋쩍게 웃는 소년에게 수지는 덩달아 미소를 지으면서도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어떻게 소년이 여기에 나타난 것일까. 이 밤중, 깊은 숲에서.
수지의 궁금하다는 시선에 소년은 입을 열었으나 고요히 침묵하고 있는 렉스가 신경 쓰여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저희 삼촌이에요.”
하나 렉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경계를 풀지도 않았다. 소년, 로난은 겁이 났다. 그가 죽이려고 한다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순간에 죽일 거란 걸 알고 있었다.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우리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라고 생각해서 쫓아내려고 한 거죠!”
렉스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공격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열심히 이야기하며 간절히 눈빛을 보내고 있는 새를 보면서 고민했다. 이들은 위협적이었다. 까다로운 상대는 미리 죽이는 게 좋을 테지만 수지가 반대했다.
“아는 새인가 봐요.”
수지는 조심스럽게 말하고는 렉스의 눈치를 살폈다. 살려 주라고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렉스는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새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고 로난은 재빨리 새를 받아서 제 품으로 가져갔다. 다행히 가슴 부근이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로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엔 당신을 보면 절대 공격하지 말라고 할게요!”
로난은 그렇게 말하면서 한 손을 위로 번쩍 들어 둥글게 휘둘렀다. 그러자 숲에 숨어서 공격 기회를 노리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에 렉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험악한 숲에서 살아남는 이유가 있었다. 저렇게 숨어 있다 집단 공격을 하면 괴물이라도 당해 낼 수 없을 테니까. 한편 수지는 소년의 신호에 맞춰서 새들이 날아오르자 무척 놀라고 말았다. 머릿속에 무언가 스쳤다. 지난날 보았던 푸른 새. 그 푸른 새도 이곳에서 왔을까. 그렇다면 소년하고는 무슨 관계이지?
‘그러고 보니 눈동자가…….’
닮았어. 수지가 소년을 보며 무심코 생각했을 때였다. 삼촌을 구해 기분이 좋아진 소년이 수지를 돌아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방금까지의 무겁고 칙칙한 분위기를 걷어 내듯이.
“잘 있었어요? 근데 이 시간에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예요? 강 건너편에 살고 있잖아요. 설마 여기를 지나서 바다로 나가려고 한 건 아니죠?”
로난은 그들이 나아가려는 곳을 쳐다보았다. 자신들의 영역을 지나 어둠의 땅을 밟으려는 걸까? 어둠의 땅 너머엔 심판의 바다가 있었다. 심판의 바다엔 웬만한 물고기도 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난은 의아해졌다. 그러다 수지의 곤란한 듯 난감한 눈동자를 보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 맞다. 말을 못 알아듣죠.”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리고 만 로난이었다. 말을 알아들을 수만 있다면 더 많은 대화를 나눌 텐데. 아쉬워하는 로난만큼 수지 역시 로난의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해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수지는 그의 집이 가까운 건지 묻고 싶었다. 그래서 손으로 지붕을 그리고 잠자는 시늉을 하자 로난이 잠시 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은 저쪽에 있어요. 커다란 가시나무 지대가 저희 일족의 집이죠.”
수지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고 알겠다며 감탄했다. 이런 험한 숲에도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신기하고 대단했다.
수지가 감탄하는 동안 렉스는 주위를 살폈다. 푸른 새 일족 덕분인지 금방에서 강력한 괴물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따라서 로난만 사라진다면 바로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렉스는 가자는 듯이 팔을 들었다. 그러나 수지는 그의 팔을 보고선 로난에게 뭔가 감쌀 만한 것이 없냐는 수신호를 보냈다. 로난은 수지의 동작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돌려요? 말아요? 아! 상처를 감싸는 거요?”
수지의 손짓에 렉스의 상처를 발견한 로난이었다. 로난은 그게 벌레에 기생해서 사는 식물에 공격당한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로난은 기다리란 듯이 바닥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찾아서 가져올게요! 둥지에 쓸 만한 게 있을 거예요!”
“자, 잠깐!”
어둡고 음험한 숲으로 소년이 뛰어가 버리자 수지는 몹시도 당황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되었지만 소년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렉스는 그것에 구애받지 않고 가자며 걸음을 옮겼다. 수지는 기다리자고 하고 싶었으나 렉스의 팔을 보자 시간을 지체하기가 미안해졌다. 따라서 소년이 사라진 방향으로 길게 시선을 주고는 발길을 돌렸다.
가면서도 여전히 벌레와 괴물의 공격을 받았다. 렉스가 맨손으로 괴물들을 상대하는 것을 보면서 수지도 그가 준 막대기를 휘둘렀다. 달려드는 곤충을 막 막대기로 때리고 옆을 보려는데 다른 곤충 두 마리가 그녀의 얼굴로 뛰어들었다. 그것을 낚아채는 두 존재가 있었다.
하나는 새였고, 하나는 사람이었다.
렉스는 제 손에 잡힌 곤충을 악력으로 터트리면서 수지의 얼굴을 파먹으려던 곤충을 부리에 넣고 씹어 먹는 파란 새를 보았다. 성가신 녀석. 가늘게 눈을 뜬 채로 노려보자 파란 새가 시선을 알아차리고 일부러 더 수지에게 머리를 까닥거렸다. 수지는 갑자기 파란 새가 날아들어 자신을 도와주자 기쁘면서도 궁금해졌다.
“어디서 날아온 거야? 어? 발에 뭘 감고 있네?”
붕대처럼 긴 천이었다. 제법 깨끗한 천을 보면서 수지는 소년이 이를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맙다고 전해 줘.”
수지는 천을 받아 들며 말했다. 파란 새는 알겠다는 듯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제 둥지가 있는 쪽으로 유연하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수지는 소년과 새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히 모르지만 둘 다 좋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거처로 돌아오자 수지는 렉스의 팔을 잡고 깨끗한 물을 부었다. 그렇게 상처를 닦은 다음 지난날 렉스가 한 것처럼 벽에 기어 다니는 벌레를 으깨 상처에 바르고 푸른 새가 준 천을 감자 제법 깔끔하게 치료가 되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자 렉스가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잘했군. 치료사들 같아.”
빈말은 아니었다. 활동하기 편했고 움직임에 거슬리지도 않았다. 렉스가 팔을 움직이며 미소를 짓자 수지의 표정도 다행이란 듯이 느슨해졌다. 긴장감이 풀렸는지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거의 새벽이었다.
“이제 자.”
렉스는 침대를 가리켰다. 그 손짓에 수지는 무얼 생각했는지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늘 침대에서 벌어졌던 일 때문인가 보다. 렉스는 그런 수지의 뺨을 귀엽다는 듯이 보면서 말했다.
“걱정 마. 피곤한 상태를 무시할 만큼 고약하지 않으니까.”
렉스는 나간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수지는 졸린 눈을 크게 뜨며 안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렉스는 말려 놓은 푸른 열매를 거두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나 수지는 기어이 안 된다고 고개를 젓고는 제가 나가서 푸른 열매를 거둬 안으로 가져오기 시작했다.
자루를 낑낑거리며 옮기는 그녀가 어이없었으나 한편으론 제 팔을 걱정해서라는 것을 알아 렉스의 가슴이 이상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무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을 텐데도 여전히 인간답게 저를 걱정해 준다. 인간으로 대접해 준다. 왕국의 사람들과 달리.
“참 과분하단 말이야.”
자신의 죽음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줄 몰랐다. 그녀가 저를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하는 입장인데, 오히려 더한 융숭한 챙김을 받고 있다. 렉스는 저를 위해 움직이는 그녀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가 그녀의 일을 도왔다. 다치지 않은 팔로 자루를 번쩍 들자 수지가 커진 눈으로 쳐다본다.
일은 금방 끝났다. 수지는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에게 도움이 되긴 되었을까. 결국 렉스가 다한 거 같은데.
‘어쩐지 폐만 끼치는 느낌이야.’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 서글퍼진다. 여기서 제 몫을 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일이 생기면 도와주긴커녕 그의 도움만 계속해서 받고 있었다. 이 험악한 늪은 수지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걸까. 그런 생각이 무겁게 수지를 내리눌렀고 수지는 어느 순간 그 무게에 피로가 더해져 잠이 들고 말았다.
“……편하게 자지.”
렉스가 알맹이를 모두 한데 모아 정리하고 왔을 때 수지는 침대에 반쯤 걸쳐진 채로 엎드려 있었다. 불편하게 누운 모습에 렉스가 들어 옮기려고 하자 수지가 웅얼거렸다.
“……렉스가 자요, 팔도 아픈데…….”
렉스는 멈칫했다. 그녀는 눈도 뜨지 않은 채였다.
“……오늘 같이 가 줘서 고마웠어요, 렉스.”
다시 웅얼거리는 자신의 이름. 그녀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이렇게 지쳐서, 피로해져서.
“당신이…….”
“…….”
“정말 좋아…….”
얼른 가공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렉스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그녀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대에 편안하게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