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어? 이거 예쁘죠? 일 년 전에 주운 거예요. 상자의 주인은 해골이 된 채 옆에 쓰러져 있었어요. 뼈에 남아 있는 옷감을 보건대 귀한 신분 같았는데, 이곳으로 도망쳤다가 괴물에게 잡아먹힌 거 같더라고요. 왕왕 있는 일이죠. 왕국에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도망쳐 오거든요. 여길 숨기 좋다고 생각하나 봐요. 사람들이 못 쫓아오니까. 하지만 그만큼 험악한 곳이거든요, 전사들도 며칠을 살아남기가 어려운. 아. 안을 보고 싶어요?”
루지는 열어보라는 손짓을 했다. 수지는 망설였으나 주인이 허락했으니 뚜껑을 열었다. 탁. 뚜껑은 반듯하게 열렸다. 작은 보석과 귀걸이, 목걸이가 보였다. 하나같이 비싸고 값진 것들 같았다. 보석을 잘 모르는 수지의 눈에도 영롱함과 투명도가 남다르게 다가왔는데 그중에서도 그 보석들 아래에 깔린 무언가에 눈길이 간다.
꺼내 보자 둥글면서 납작한 옥이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것으로 표면에는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지만, 부식으로 인한 것인지 글자가 선명치 않았다. 그 옛날 한복에 달던 옥패 같아서 신기하게 돌려 보자 루지가 말했다.
“가져요. 친해진 기념으로 하나 줄게요.”
수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루지는 직접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수지는 놀라서 거절했으나 루지는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알게 된 외지인에게 무언가라도 건네서 친분을 쌓고 싶은 모양이었다. 결국 그녀의 열정에 못 당한 수지가 고맙다며 옥패를 받았다.
“다 됐어요, 입어 봐요.”
옷은 잘 맞았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는 어디 결혼식에 참여해도 괜찮을 만큼 화사했다. 문제는 너무 화사하다는 것. 수지는 그녀가 내민 철판 거울을 보면서 굳어지고 말았다. 이대로 늪에 나가면 동물들이 맛있게 빛난다고 몰려들 거 같았다.
“어때요? 진짜 예쁘죠? 문으로 만들면 몸이 빛난다니까요! 얼굴도 화사해져요! 너무너무 아름다워요!”
루지는 진정 수지를 보며 기뻐하고 있었으나 수지는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 렉스도 보면 질겁하고 말 것이다. 수지는 루지의 옷을 바라봤다. 실을 뽑아 만든, 평범한 비단 옷차림. 가슴과 배를 가리는 좋은 옷이다.
“저어, 루지의 것 같은 옷은 없나요?”
루지는 수지가 자신의 옷을 가리키자 놀라서 눈을 굴렸다.
“문으로 만든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이상하게 만들었나?”
루지는 콧등을 찡그리며 이리저리 수지 주변을 돌았다. 옷이 이상한가 살피는 차림에 수지는 두 손을 저으며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루지는 알아듣지 못하고 수지의 팔 부분이 기냐고 물어 왔다.
“일부러 길게 했는데 짧게 소매를 칠까요?”
루지는 날카로운 칼을 들어 소매를 자르려고 했다. 수지는 예쁜 옷이 의도치 않게 잘린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돼요!”
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누군가 문을 걷어차고 들어와 수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그녀를 위협하는 대상의 목을 틀어쥐었다.
“끄, 끅…….”
목을 잡힌 채 두 발이 들린 여인은 창백하게 숨을 뱉었다. 이 모든 건 한 호흡 안에서 일어난 일로, 여인도 수지도 상황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렉스가 한마디를 던져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수지, 다쳤나?”
“레, 렉스? 아, 렉스! 풀어 줘요!”
수지는 얼른 여인을 붙잡은 손을 가리켰다. 다급하게 놓으란 어조에 렉스가 내려놓자 여인이 풀썩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파랗게 질린 채였다. 수지는 괜찮냐면서 여인을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여인은 눈을 뜨고 렉스를 발견해 비명을 질렀을 뿐이다.
“무슨 일이냐!”
그녀가 지른 비명에 대표라는 남자와 호위대장 파루, 전사들이 달려왔다. 수십 명이 몰려와 무기를 치켜드는 것에 렉스는 동요 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보이는 적이 다가 아니었다. 이곳은 무슨 일인지 늪지의 괴물도 바닥에 숨어서 공격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만의 생존 전략일 것이다. 이 늪지에서 죽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
“무, 무슨 짓을 한 거요!”
남자가 소리를 빽 지르며 켁켁거리는 여인을 살폈다.
“괜찮니, 루지?”
“괘, 괜찮아요…….”
“안색이 나쁘구나! 숨을 잘 못 쉬고 있어!”
“그냥 놀라서…….”
힘없이 중얼거리던 여인이 픽 쓰러졌다. 남자는 이름을 외치며 그녀를 부축했다. 기절한 것이란 걸 잠시 후에 알았지만 남자의 성난 심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슨 짓이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소!”
“공격하는 줄 알고….”
“변명은 필요 없소! 우리 마을을 떠나 주시오!”
렉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핏발 선 통보가 떨어졌다. 렉스는 수지를 바라보았다.
“옷은 받았나? 그럼 가지.”
렉스는 손을 내밀었다. 수지는 험악해진 분위기가 몹시도 신경 쓰였다. 하지만 여인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전사들이 더 무기를 들고 몰려오는 것을 보면서 수지는 렉스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밖으로 걸어가면서도 루지가 신경 쓰여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을까?’
렉스의 힘이 어떠한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손의 악력만으로도 괴물의 외피를 뚫고 뼈를 부러뜨리는 남자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괴물을 죽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소유한 사내. 그런 그가 루지의 목을 부여잡았으니 그녀의 육체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깨어났으니까.’
죽이려고 했다면 쥔 즉시 죽었을 거라고, 수지는 루지가 괜찮음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주었던 옥패를 저도 모르게 꽉 쥐는데 누군가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바로 호위대장 파루였다.
파루는 여인의 손에 못 보던 물건이 반짝이자 시선을 주었다. 곧 그게 루지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맘에 드는 돌이라고 언젠가 신나서 자랑하지 않았던가. 누구도 주지 않을 거라고 떠들던 모습이 기억나자 파루는 당장에 허리춤의 칼자루를 빼 들었다.
“잠깐!”
파루는 일그러진 얼굴로 수지를 향해 외쳤다.
“그건 네 것이 아니잖아!”
칼끝이 수지의 목을 향하는 순간 바람이 일었다. 다른 사람은 몰랐지만 적어도 전사인 파루는 그게 자연적인 바람이 아니라고 느꼈다. 하지만 눈으로 따라잡기엔 너무 빠른 속도였고 인간이 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파루는 제 손을 꺾어 칼을 빼앗는 사내의 동작에 대처하지 못했다. 사내는 아파하는 파루의 목을 그대로 후려치고 빼앗은 칼을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푹.
동시에 땅 위로 질척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숨어 있던 모래 괴물까지 잡아 버린 것이다. 위협을 제거한 렉스를 보며 사람들이 굳어져 있을 때, 무미건조한 렉스의 저음이 공간을 울렸다.
“또 무기를 들고 기습할 자가 있나?”
“어…….”
“아님 괴물이나.”
대표라는 남자는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마을에서 가장 강한 전사를 재기 불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비장의 무기였던 모래 괴물을 잡아냈다. 남자는 두려움과 공포에 깃든 눈으로 렉스를 바라봤다.
처음부터 느낌이 좋지 않던 자였다. 비열한 원주민들과는 또 다른 역겨움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그게 감정 없는 눈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명확히 몰랐지만 남자는 살아온 세월로 렉스를 경계했고 거부했다. 하지만 그걸 괜찮을 거라 판단하게 해 준 이가 수지였다. 생기 가득한 여자가 함께 한다는 것. 그건 보통 사람이 사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괜찮을 거라 받아들인 것이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저자는 죽음을 몰고 다니는 자다. 온몸의 털을 비쭉 서게 만드는 공포를 자아내는 인간. 남자는 굳어진 입매를 씰룩였다.
“레, 렉스.”
수지는 살벌해진 분위기의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렉스가 돌아보자 그녀는 제 손에 있던 옥패를 보여 주었다. 렉스는 그걸 보고서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훔쳤든 빼앗았든 어쨌든 수지가 가지고 있으니 그녀의 것이다. 그리고 그걸 위협하는 어떤 적도 허용할 수 없다. 렉스의 살기가 고조되었을 때였다.
수지는 제 손에 있던 옥패를 천천히 대표 남자에게로 내밀었다. 남자가 눈을 크게 떴을 때 알아들을 수 없는 조용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루지가 주었어요.”
수지의 뉘앙스엔 온순함과 처연함이 있었다.
“빼앗은 건 아니에요. 어찌 됐든 미안하다고 전해 주세요. 얼른 회복되길 바란다고요.”
그리고 다시 만나고 싶다고. 수지는 마지막 말을 삼키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 공손하고 죄송스러운 태도에 대표 남자는 멈칫했다. 수지는 그의 손에 도로 옥패를 넘기고는 렉스를 따라 마을을 떠났다.
새 옷을 입었건만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수지는 자꾸만 시선이 나무 성벽으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그 안에 사는 신비로운 마을 주민에게로.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한 아가씨에게로. 가슴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그들을 향해 있었다.
“신경 쓰이나?”
강물이 반짝거리며 흘러가는 모양새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건조한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배의 방향을 막대기로 조정하는 렉스가 보인다. 렉스는 막대기를 쥐지 않는 팔을 마을로 뻗었다. 팔은 금세 용광로에 철광석마냥 달아올랐다.
“!”
주변의 공기가 들끓었다. 렉스는 하품이 묻어 나올 정도로 느릿하게 말했다.
“찜찜하다면 후환을 남기지 않게 해 주지. 저깟 마을, 한 번이면 폭사 가능해.”
“렉스, 그만둬요!”
수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때문에 작은 조각배가 출렁거렸다. 수지는 휘청휘청 균형을 잡지 못하다가 그만 뒤로 풍덩 물에 빠지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