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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31)화 (31/163)

31화

“멋져! 문명의 향기가 느껴져요! 머리도 윤기 나고 피부도 매끈하고, 심지어 몸에서 짐승 풋내도 안 나네요! 원주민들과는 딴판이에요!”

“루지.”

핀잔을 주는 것처럼 남자가 대꾸하더니 이내 수지를 가리켰다.

“거래를 하기로 했다. 여자에게 문으로 짠 옷을 내어 주렴.”

“문이요? 정말이에요?”

여인이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재차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값어치가 되는 물건을 받았거든.”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렉스가 손에 든 약초를 그에게 던졌다. 남자는 그걸 탁 받아 들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문으로 짠 옷을 줘야 해.”

“알았어요. 문이 커질 때까지 기다려 다시 옷을 만들려면 반년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어쩔 수 없죠. 마을의 왕이신 지엄하신 아버지의 명이니까.”

“왕이라니, 대표라고 하렴.”

“왕이나 대표나.”

입술을 삐죽이는 여인이었다. 반항하는 그 모습이 못마땅한지 남자가 한마디 하려 했으나 그녀는 얼른 수지에게 시선을 돌리며 오라고 손을 까닥였다.

‘가도 되나?’

낯선 장소에 처음 보는 사람이다. 과연 안으로 따라 들어가도 될까? 비슷한 기억이 좋지 못하게 끝나서인지 수지의 발걸음은 머뭇거렸다.

“얼른 와요, 잡아먹지 않을 테니!”

여인이 사랑스럽게 외쳤다. 수지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에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걸음을 옮기자 렉스도 뒤쫓았으나 여인이 팔로 막아섰다.

“여자들의 영역이에요.”

렉스는 그녀를 응시했다. 차갑고 건조한, 생명체 같지 않은 시선이 쏘아지자 여인은 놀라서 딸꾹질을 했다. 그녀가 겁먹자 멀찍이 서 있던 덩치 좋은 전사가 무기를 쥔 채 다가왔다. 불필요한 폭력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남자가 끼어들었다.

“문으로 만든 옷은 재단이 필요하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여자들의 사적인 공간을 침해하지 않는 게 좋겠소.”

렉스는 그를 돌아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얼굴은 아니었으나 이곳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를 신뢰할 수 없었다. 따라서 렉스는 문 앞에 서서 등만 돌렸다. 남자가 기가 막힌 듯이 쳐다보았다. 설마 저기서 저러고 기다리겠다는 건가? 그가 쳐다보거나 말거나 렉스는 고개를 돌려 수지와 눈을 맞추고는 입을 움직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

수지는 그가 자신을 가리키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르란 거죠? 알겠어요.”

수지가 미소 지었다. 렉스는 그 미소에 눈빛을 굳히고는 마치 돌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가 곤란해하는 가운데 여인은 렉스의 뒤통수를 향해 혀를 빼- 하고 내밀고는 나뭇잎 문을 다시 내렸다.

“자, 그럼 문의 옷을 꺼낼게요!”

여인은 뒤로 돌아 나무로 만든 옷장에서 무언가를 뒤적뒤적 꺼내기 시작했다. 상자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무엇이기에 옷장 안에 따로 상자로 넣어 둔 것일까.

잠시 후 상자가 열리고 그 안에서 금빛을 머금은 하얀 천이 나타났다. 수지는 눈을 크게 떴다. 옷감은 신비했다. 마치 넓은 백사장에 햇살이 내리쬐는 것처럼 빛나는 천이었다. 놀라서 보고 있자 여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대단하죠? 저도 어렸을 때 처음 보고서 이 옷으로 드레스를 만들어 입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에선 신성한 날에 입는 옷이랍니다! 조금 잘라서 몸에 맞게 줄여야겠지만 어찌 됐든 이것보다 좋은 옷감을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속사포로 쏟아 내는 여인이었다. 수지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여자가 호의적이란 것은 알아차리고 순순히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여자는 긴 나무줄기를 수지의 몸에 대보고 깃털 펜으로 수치를 적어 낸 뒤,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저기 앉아서 기다려요!”

수지가 어색하게 서 있는 모습이 좀 그랬던지 루지는 방 한쪽에 놓인 나무 의자를 가리켰다. 수지는 의자 위에 깔린 털 방석에 감탄했다. 이렇게 보드라운 것도 있구나. 간만에 느끼는 습하지 않은 털의 감촉에 천천히 손으로 쓸어 보는데 하얀 짐승 뼈에 실을 꿰어 옷을 다듬고 있던 루지가 의미심장하게 입가를 올렸다.

“왕국 사람은 아니죠? 생소하게 느껴져서요. 하는 행동이며 말이며.”

“……아.”

알아듣지 못한 수지는 당황했다. 루지는 그걸 보면서 자신을 가리켰다.

“난 루지에요. 이 좁은 곳에서 한평생을 살게 될까 봐 두려운 18살의 아가씨죠. 루지 아니아. 편하게 루지라고 불러요.”

루지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들리자 수지는 그녀가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수지는 자신을 가리켜 이름을 밝혔다.

“수지? 독특한 이름이네요. 처음 들어 봐요. 그런 이름. 하긴. 이곳에선 어떤 외부인의 이름도 특이하죠. 왜냐고요? 여긴 죽어 간 사람의 이름을 받아서 사용하거든요. 새 생명이 태어나면 언젠가 존재했던 누군가의 이름을 쓰게 돼요. 생명은 죽음에서 또 다른 탄생으로 이어지는 거니까요.”

수지가 알아듣지 못해도 열심히 설명하는 루지였다. 그녀는 이 모처럼의 방문객이 흥미진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하고서 괴상한 언어를 말하는 여자. 바깥세상을 궁금해하는 루지에겐 수지는 매우 신비롭고 관심 가는 대상이었다. 열심히 떠드는 루지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곤란해하는 수지와 다르게 루지는 눈을 휘며 밖을 가리켰다.

“근데 밖의 저 남자는 누구예요? 남편이에요? 아님 친구?”

“렉스요……?”

수지는 무심코 이름을 말했다. 루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름이 렉스예요? 와 그 이름도 특이해요! 멋져요! 역시 잘생긴 얼굴답게 이름도 좋네요!”

루시는 발랄한 목소리로 외쳤다. 수지는 멈칫했다. 렉스에게 관심이 있었는지 그녀는 다소 흥분한 어조였다.

“진짜 잘생겼어요! 뭐랄까. 여태까지 덩치 좋고 피부가 깔끔하면 잘생겼다고 생각했거든요! 저 밖에 있는 덩치 좋은 파로가 이 마을에서 제일 잘생겼다고 칭찬받았으니까, 제가 왜 렉스를 보고 놀란 건지 알겠죠? 렉스는 책에 나오는 왕자처럼 생겼어요!”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뒤쪽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보여 주는 루지였다. 책은 어린애들이 보는 동화책이었다. 오래전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들고 왔던 것으로, 아직도 그림이 선명해 볼만했다.

수지는 빛이 조금 바랐지만 멀쩡한 상태의 책을 보며 감탄했다. 무척 고급스러운 삽화가 들어간 두꺼운 재질의 책이었다. 아마도 비싼 책 같았는데, 루지는 그걸 한 장 한 장 넘겨서 안을 보여 주었다.

안에는 공주와 왕자로 보이는 주인공들이 있었다. 공주는 가시에 찔려서 다쳤고 왕자가 나타나서 그런 그녀를 구해 준다. 그림만 봐서는 왕자와 공주가 잘 되는 내용 같았다. 그녀는 왕자를 가리키며 렉스, 라고 반복했다. 잘생긴 얼굴에 늘씬한 몸매, 그림 속 왕자를 보면서.

“봐요, 똑같죠? 하얗고 크잖아요!”

왕자라고 말하는 건가? 아니면 왕자 같다고? 수지는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했다. 그래서 비슷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활짝 웃었다.

“역시 수지도 그렇게 생각했군요?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그럼 수지가 공주가 되는 거네요!”

루지는 이내 공주를 가리켜 수지라고 했다. 수지는 긴 흑발에 하얀 피부, 어여쁜 드레스 차림의 주인공을 보며 멈칫했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공주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물론 시조인 단군까지 올라가면 공주는 공주겠지만…….’

그런 걸 묻는 건 아닐 테니. 수지의 덤덤한 반응에 루지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공주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공주처럼 예쁜데. 아. 렉스랑 아직 결혼하지 않아서 그런가요? 결혼을 해야 확실하게 신분이 보장되니까요. 왕국에선 그런 형식이 중요하다고 들었어요. 어떤 지위를 확보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지위의 사람하고 결혼해야 한다고요. 결혼을 하지 않으면 여자든 남자든 지위가 불안해진다고 해야 하나? 렉스가 더 신분이 높은 거죠?”

수지는 잠자코 있었다. 어차피 대답할 수 없다는 걸 루지도 아는데 그냥 떠드는 것 같았다. 수지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고 루지는 다시 자리에 앉아 문이란 천을 재단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왕국에 가면 모든 게 평등하지 않을 거라고 무서워하세요. 거긴 계급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는 곳이라고요.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이나 꿈은 중요시하지 않는대요. 모든 사람들은 한 명의 꿈만 바라본다고 하네요. 바로 왕의 꿈만. 그게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것인지 아버지는 늘 청년들을 불러 놓고 설교하세요.”

쉴 새 없이 이야기하면서도 바느질하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숙련된 솜씨라고 생각하면서 수지는 그녀의 방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풀잎 냄새가 향긋한 이 방은 여인의 손길이 닿아서인지 곳곳에 말린 꽃과 아기자기한 돌, 투명한 유리 조각이 눈에 띄었다. 꽃잎들을 담아 놓은 그물주머니에서 좋은 향기가 은은하게 맡아지는 가운데 수지는 한쪽에 놓인 작은 보석함 같은 상자를 발견했다. 이런 곳에서 쓰기엔 굉장히 장인의 손길이 들어간 것 같은 기품과 정교함이 있었다.

수지가 그걸 보며 신기해하자 루지가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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