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늪지 보고서 (24)화 (24/163)

24화

렉스의 사냥 시간은 짧았다. 여기 어디 고기 냉장고라도 숨겨 둔 것처럼 몇 분도 안 되어 축 늘어진 짐승을 가져왔다. 대체로 팔뚝만 한 것들이었는데 이번에 잡아 온 것은 곰처럼 컸다. 수지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렉스는 짧게 언덕을 가리켰다.

“미끼로 쓸 거까지 필요해서.”

수지는 멈칫했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서 답답했지만 대충 언덕 때문에 큰 게 필요하다는 의미 같았다. 그녀는 곧 고기를 구울 만한 땔감을 주위에서 가져왔다. 라이터로 불꽃을 튕기자 마른 가지들에 쉽게 불이 붙었다. 연기와 함께 불꽃이 커지자 근처 덤불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무언가가 왔구나. 수지가 겁을 낼 무렵, 렉스가 손질하고 있던 나뭇가지를 덤불로 날려 보냈다. 그러자 덤불이 조용해졌다. 시체를 치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늪지에선 시체가 생기면 다른 생물이 나타나 그 시체를 먹어 치운다. 만약 생물이 나타나지 않으면 늪지의 진흙이라도 시체를 빨아들여 먹어 치운다. 언제나 늪이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나도 죽으면 그렇게 되겠지?’

수지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이 늪지에서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 그리 황당한 생각 같지 않았다. 오히려 여태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고 보았다.

‘운이 좋다, 라.’

수지는 렉스를 바라봤다. 커다란 산짐승을 한 손으로 들어 나무줄기로 한데 묶는 남자가 그녀의 운이었다. 이 늪지에서 마주친 가장 큰 행운이었다. 이 야생의 생태를 자유자재로 다닐 만큼 그는 강하고 현명했으니까. 수지는 그런 그가 함께한다면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나를 구하러 왔던 거 같진 않은데.’

수지는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 뱀이 가득한 구덩이에서 그를 처음 본 순간, 그가 사신일 거라 생각했다. 자신을 죽이러 온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가고 그는 그녀를 지켜 주었다. 지금까지 무사히, 죽지 않도록 안전하게.

‘그가 인정이 많아서 날 구한 건 아닐 거야.’

지켜본 바 렉스는 생명을 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아무리 고귀해 보여도 위협이라고 판단되면 죽였다. 사람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은 거 같은데, 그런 그가 생면부지의 자신을 구해 주고 살을 부딪쳐 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특별한 호의를 자신에게 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호의란 게…….’

자신처럼 설렘이 이는 감정이라면 좋을 텐데. 수지는 그의 감정을 온전히 읽을 수 없어서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물을 수라도 있다면 좋겠지만 말도 통하지 않아 그의 감정을 추리하는 게 다였다.

‘날 싫어하지 않는 건 분명해. 그는 효율적인 행동만 하는 사람이니까.’

수지는 짐승을 다듬는 렉스를 바라봤다. 그의 손길은 정확하게 살과 가죽을 분리해 내고 있었다. 남는 것도 부족한 것도 없이, 완벽하게. 수지는 그 일관성 있는 철두철미함을 보면서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여기 있는 거야.’

이런 늪지에서 저런 남자를 만나다니. 그리고 그와 어떤 이상한 일이 생겨도 함께 있고 싶어지다니. 수지는 제 감정을 읽으며 생각했다. 이곳에서 제 역할이 무엇인지,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몰랐지만 생존자 1로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살아 나가려면.

‘무엇이라도 해서 내 역할을 해야 해.’

그건 수지에게 있어서 중요한 귀결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무엇이라도 해서 이 막막한 세계를 살아가는 게 그녀에겐 필요했다. 수지는 그와 함께라면 잘 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낮과 밤, 그 언제라도 말이다.

‘물론 밤에는 사는 형태가 좀 달라지겠지만.’

살짝 음탕한 생각까지 떠오르자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빨개졌다.

그에게 목덜미를 잡힐 때면, 그의 아래에 누울 때면 설렘은 증폭되고 전신은 나긋해진다. 저도 모르게 배 아래가 배배 꼬이면서 아래가 녹아나는 듯 젖고 마는 것이다. 언제 보았다고 그에게 이토록 몸이 순종적으로 반응하는 걸까. 이런 저가 렉스에게도 이상해 보이는 건 아닐는지. 수지는 스스로의 생각에 머쓱해져 웃고 말았다.

“!”

그러다 렉스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수지는 재빨리 불길 속에 얼굴을 숨겼다. 렉스가 이런 자신을 몰라야 할 텐데. 이렇게 감정을 자각하고 상대를 생각하며 부끄러움에 젖는 자신을 눈치채지 못해야 할 텐데. 수지는 빤히 저를 보는 렉스에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싶어 괜히 숨까지 죽여야 했다.

다행히 고기는 빠르게 익어 구수한 신호를 보냈다. 렉스는 칼집을 내 놓은 덕분에 기름이 뚝뚝 떨어지게 익은 고기를 큼직하게 썰었다. 그렇게 썬 고기를 아까 다듬어 놓은 나뭇가지에 뭉텅이로 꽂더니 뒤쪽에 가만히 두었다. 수지가 쳐다보자 이내 가장 부드럽고 기름기가 적은 부위를 골라 손수 입에 넣어 준다. 수지는 얌전히 받아먹었다.

렉스의 표정은 나긋했고, 고기를 자르는 손도 온화했다. 착실하게 받아먹는 수지가 좋았기 때문에 렉스는 그녀가 거절할 때까지 먹이는 행위를 계속했다. 상쾌한 과일까지 받아먹고서야 수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입을 씻고 왔을 때 그는 나갈 채비를 끝낸 상태였다.

긴 꼬치 나뭇가지를 어깨에 걸치고 수지를 돌아보자 수지의 마음이 부산해졌다. 그녀는 서둘러 라이터와 냄비를 챙겼다. 저번처럼 나무줄기에 엮어 등에 멘 뒤, 그가 준 막대기를 허리에 혁대처럼 말자 렉스가 됐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언덕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수많은 물웅덩이와 괴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렉스는 갑작스럽게 덮쳐 오는 물고기를 한 손으로 터트리면서 수지에게 막대기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좀 더 강하게 쳐. 이런 것들은 옆면을 때리면 재기 불능이 되지.”

렉스는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을 군홧발로 꾹꾹 밟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수지는 느긋하게 괴물을 상대하는 그를 부러워하면서 렉스의 지시대로 횡으로 막대기를 휘둘렀다. 그러자 널찍한 부위가 지느러미 옆을 때리면서 물고기가 저 멀리 날아갔다. 렉스는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멈추지 않고 휘둘러야 해.”

5분 넘게 물고기를 치자 팔이 아팠다. 수지가 힘들어하자 렉스는 그녀를 뒤쪽으로 보내고는 나머지 물고기를 직접 손으로 터트렸다.

‘후.’

갈대숲에 숨은 물고기들은 끝이 없었다. 금세 숨이 차 헐떡이는 자신과 달리 렉스는 여전히 여유롭게 물고기를 상대했다. 애초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는 무한한 체력의 소유자였다. 수지는 아랫입술을 물며 현실을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쫓아갈 수 없는 상대를 보고 무력감을 느끼는 것처럼 무용인 건 없으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 집중하는 게 좋았다.

수지는 제게 덤벼드는 물고기 하나를 보면서 막대기 쥔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얼마나 팔을 휘둘렀을까. 공격하는 물고기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남은 것들은 숨어 버렸는지 갈대숲이 미미하게 흔들리는 가운데 렉스는 지쳐 있는 수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아 주겠다는 의미였다.

“괜찮아요.”

수지는 손길을 거절했다. 이제 시작인데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러나 수지의 거절에 렉스는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저렇게 숨을 헐떡이면서 어찌하려는 걸까. 걱정과 달리 수지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제 발로 걸었고 렉스의 뒤를 바짝 쫓아왔다.

렉스는 결국 수지의 고집을 인정하며 발길을 늦추는 걸로 그녀를 돕기로 했다.

‘일부러 천천히 가는 건가.’

수지는 그런 렉스가 고마웠다. 원하는 건 일단 수용해 준다. 나름대로 도와줄 방법까지 생각해서. 수지는 그에게 자신이 부담이 되지 않기를 빌면서 앞을 바라봤다. 시야를 가리고 있는 안개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와…….”

여태까지 온 길이 늪지의 지형이었다면 앞으로는 한적한 초원 지대를 지날 차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울창하게 녹음이 진 숲을 오른편에 낀 채, 언덕은 완만하게 펼쳐져 있었다. 탁 트인 시야를 보면서 수지는 모처럼 나른한 숨을 내쉬고야 말았다.

‘낮이라서 그런지 꼭 낙원 같아.’

햇빛을 고스란히 받는 초록 풀밭이 한가로운 정경을 자랑한다. 소풍으로 와도 좋을 만큼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수지는 덥다 못해 약간 따갑게 느껴지는 태양 빛을 보면서 팔을 쓰다듬었다. 렉스는 그 언덕을 신중하게 보더니 걸음을 옮겼다.

“움직이지 마.”

어느 순간, 렉스의 팔이 뻗어 왔다. 수지는 그 냉정한 제재에 몸이 굳어졌다. 곧 땅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인가 싶었지만 렉스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수지는 두려우면서도 렉스를 따라 했는데, 곧 땅에서 폭 소리를 내며 코끼리 코 같은 길쭉한 코가 튀어나오자 놀라서 넘어질 뻔했다. 반면 렉스는 차분하게 꼬치에서 커다란 고기 하나를 꺼내더니 코 근처에 던졌다. 킁킁 냄새를 맡던 코가 이내 땅속으로 쑥 사라지더니 얼마 되지 않아 말 크기만 한 구더기가 땅 밖으로 올라왔다.

‘저, 저게 뭐야.’

수지는 울상을 지으며 등장한 생물을 바라보았다. 긴 코를 가진 구더기는 곧 작은 구더기 수백 마리로 갈라지더니 고기에 징그럽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아작아작 살을 씹는 소리가 귀에 험상궂게 울려오는 가운데 렉스는 수지의 등에 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라이터?’

수지가 건네주자 렉스는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고는 그걸 고깃덩어리에 던졌다. 그러자 기름이 자글자글한 고기는 금세 불이 붙었다. 구더기들은 발광하듯이 몸을 비틀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렉스는 까맣게 타 버린 녀석들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고는 다시 가자는 듯이 몸짓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