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그만하세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천천히 해 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수지는 이걸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한국말로 ‘천천히. 부드럽게.’를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천천히, 부드럽게.”
렉스는 그녀의 말을 따라 했다. 뜻은 몰랐지만 어감이 온화했다. 느릿했다. 렉스는 그녀의 달뜬 얼굴과 간절한 눈동자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확신이 들었는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
거칠고 사납게 박을 때와는 달리 느릿하고 완만한 삽입 동작이 이어지자 수지의 목소리가 변화했다. 비음은 가늘고 높다랗게 변했고, 얼굴은 상기되어 리듬 있게 흔들렸다. 렉스는 쾌감이 고조되어 가는 수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역시 참을 수 없이 전율이 일어난다. 이런 것을 원했구나, 이거구나 싶을 만큼.
렉스는 수지에게 완전히 몰입되어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점점 거세지는 물길처럼 수지를 조금씩 빠르게 달궈 가자 수지는 물에 젖은 짐승처럼 렉스에게 달라붙었다. 습기가 척척한 가운데 두 사람의 섹스는 더욱 격해지고 있었다.
“……아!”
마침내 커다란 성기가 붉어진 질구를 강하게 쑤시자 쾌감이 빗발쳐 뇌리를 강타했다. 수지는 온몸을 크게 들썩이면서 쉬어지지 않는 숨을 다스렸다. 그에게 꿰뚫린 기분이었다. 영혼까지.
“후우.”
그리고 수지가 그렇게 절정에 달했을 때 렉스도 긴 호흡을 내쉬며 사정감을 맛보고 있었다. 줄줄 흐르는 느낌이 이토록 진한 여운을 줄 줄은 몰랐다. 렉스는 호흡을 거칠게 내쉬면서 아래서 숨을 할딱이는 수지를 내려다보았다.
“빌어먹게도 좋은데?”
그리고 좋은 건 싫증이 날 때까지 해야 한다. 렉스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 수지는 호흡을 고르다가 렉스의 얼굴을 보고 오싹해졌다.
“아, 읏…… 응!”
수지는 엎드린 채로 신음을 뱉어 내야 했다.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자욱했다. 뚜렷하게 생각할 수도 없었고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육중한 성기를 받아 내는 것뿐이었다.
“아……!”
핏줄이 성성하게 엉킨 성기가 벌게진 질구를 쑤셔 들어갈 때마다 애액이 빠져나왔다. 찔걱, 하는 소리도 예외 없이 들려왔다.
사내는 신음을 토해 내는 수지의 등허리에 이마를 비비면서 한 손으로 결합 부위를 손으로 매만졌다. 그러자 수지의 신음이 숨넘어가는 것처럼 바뀌었다. 그 부위를 천천히 손으로 쓸어 주면 자극이 극대화되어 수지의 내벽이 조여든다. 미칠 듯이 짜릿하게.
“좋아, 아주 잘하고 있어.”
렉스는 그르렁거리듯이 중얼거리며 수지의 허리를 잡았다. 그러자 다른 곳보다 유독 살집이 있는 엉덩이가 그의 아랫배에 찰싹 달라붙었다. 렉스는 부러 엉덩이를 아프도록 쥐어 보았다. 손에 잡히는 감촉이 기가 막힐 정도로 훌륭했다. 잘 익은 과실처럼 흐무러진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고서 허리를 아래로 해 힘을 주자 물러 터진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흐, 으윽-!”
수지는 이미 쾌락의 고양감을 맛보았다. 자세를 바꿀 때마다 전율이 또 다른 전율로 이어져서 쾌감과 수치감을 키웠지만 관계는 좀처럼 끝날 줄을 몰랐다.
“레, 렉, 렉……!”
그의 이름을 이상하게 불러 젖혔을 때도 그는 짙은 웃음만을 지었을 뿐이다. 그는 수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렸다.
“네가 하는 말은 그런 것이라도 좋군.”
짜증 났던 기계 새와는 달리. 렉스는 쾌활하게 대꾸하고는 힘들어하는 수지의 골반을 위로 들었다. 그러자 엉덩이가 뾰족하게 세워지며 허벅지를 타고 애액이 질척하게 흘러내렸다. 수지는 헉 하는 신음을 삼켰다. 자세가 바뀌었다. 엎드려서 그를 받아들일 때하고는 다른 지점을, 커다란 성기가 푹 하고 찌르자 등골에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아찔함이 깊어진다.
수지는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이, 이제 더는.”
“힘드나? 아직 견딜 수 있을 거 같은데. 반나절은 더 할 수 있잖아.”
렉스는 회유하듯이 대꾸했다. 수지가 알아들었다면 기절했을 말이었다.
‘도, 도대체 뭐라고 하는, 아니 언제까지 하려는 거야…….’
수지는 절망적인 눈으로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렸다. 사내는 대단했다. 몇 번의 절정을 맞이하여 사정을 여러 차례 했음에도 시들 줄 모르는 성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크기와 강직도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 거대하고 완전무결한 것이 자신의 안을 빠져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수지는 눈가를 찡그리고 말았다. 여린 눈에는 눈물이 아롱아롱 맺혀 있었다. 분명 그가 쉬어 가면서 하고 있긴 하나 말 그대로 움직임이 멈출 뿐, 그의 성기는 여전히 그녀의 배 속에 들어와 있던 것이다.
언제 저것과 이리 한 몸처럼 되고 만 것일까. 수지는 기가 막혔다. 조금이라도 아랫배에 힘을 줄라치면 커다랗게 부푼 그것의 존재감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한층 더 난감함과 수치심이 커졌다. 그의 것을 빼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는 몸이 된 것처럼 종속적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수지는 울먹였다.
“마, 많이 했는데.”
첫 관계가 이토록 오래, 그리고 음탕하게 이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어떤 의미론 절대 잊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셈이다. 수지는 그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지를 몸으로 깨달은 채 말했다.
“쉬었다가 하면…….”
수지는 간신히 내뱉었다. 렉스는 그녀의 말에 집중한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수지가 힘이 드는지 다리의 힘이 풀려 가고 있었다. 자신이 잡아 주지 않는다면 이 자세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수지의 어감에서 고단함을 느낀 렉스는 성기를 뒤로 뺐다.
“아…….”
수지는 완전히 늘어져서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버렸다. 렉스는 그녀의 발갛게 물이 든 엉덩이를 바라보았다. 만질 때마다 포동포동한 감촉이 좋아서 자꾸만 짓눌렀더니 하얀 살에 자신의 손자국이 진하게 남았다. 렉스는 그 모습에 아래가 뜨거워지며 단단해지고 말자 혀를 차고 말았다. 수지의 몸에 자신의 흔적이 남은 게 그토록 좋았다.
“수지, 이수지.”
렉스는 그녀의 이름을 노래하듯이 연달아 중얼거렸다. 가냘픈 등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운데 자신의 것을 반나절 넘게 받아들인 아래를 보자 포화된 선액이 수용되지 못해 흘러넘친다. 천박할 만큼 야한 모양새로.
‘확실히 많이 한 모양이군.’
렉스는 느긋하게 생각하며 그녀의 땀에 젖은 등을 손으로 쓸어 주었다. 그러자 가늘게 몸이 떨리면서 수지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커다란 눈망울은 왠지 겁에 질려 있었다. 설마 더할 건가. 그 의심에 찬 눈초리에 렉스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하면 더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렉스가 등줄기를 훑으며 손가락을 올리더니 이내 목을 조곤조곤 만지기 시작한다. 수지는 오싹 소름이 돋고 말았다. 꼭 포식자에게 찍힌 짐승이 된 기분이다. 수지가 파리한 안색으로 쳐다보자 렉스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스란히 드러난 그녀의 표정이 보기 좋았다. 자신을 의식해 짓는 표정들이 그녀와 한 행위들을 분명히 설명해 주고 있었다. 이제 명확한 관계가 설정되었으니 그녀는 이 현실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렉스는 그녀와 그녀의 미래를 연달아 생각해 보고는 기분 좋게 그녀의 목을 만져 주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마침 수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밥 먹을 시간도 됐고.”
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수지의 목에서 손을 뗐다. 수지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가 만진 목이 뜨거워서 저도 모르게 목에 손을 올린 수지는 렉스가 자신의 불거진 성기를 매만지는 걸 보았다. 음경을 지나 고환까지 천천히 쓸어 올렸다가 느릿하게 내리기를 몇 번, 이내 눈가를 찡그린다. 타락한 감정들이 뭉쳐서 만들어진 것 같은 지독히 야한 표정을 짓더니 어느새 눈을 뜬 렉스였다.
수지는 까만 눈동자를 응시하고 가슴이 철렁였다. 여태 본인이 그를 응시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행위와 맞지 않은 건조하고 암담한 시선이 아니었다면 아마 몇 시간이고 넋이 나가서 쳐다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즐겁고 야한 행위를 하는 사람답지 않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건 수지의 마음에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불러오며 이런 생각이 들게 했다.
무언가 해서 그를 기쁘게 하고 싶다고.
‘뭐, 뭐야?’
본인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놀란 수지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자제하려 애써야 했다. 렉스는 자신의 수음을 빤히 쳐다보던 당돌한 수지의 행동에 입가를 올리고 말았지만 수지는 민망함과 당혹감에 고개를 잠시 들 수 없었다.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간밤에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따사로움이 느껴질 정도로 햇빛이 쨍쨍하게 빛났다. 안개도 사그라들어 모처럼 밝은 날이 온 것이다.
수지는 자신의 알몸을 비추기 시작한 햇빛이 부끄러워서 일어나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겼다. 젖어 버린 브래지어는 그런대로 입을 만했으나 문제는 바지였다. 청바지의 밑단이 문어 다리처럼 여러 갈래로 찢어져서 걸을 때마다 보기 흉하게 흔들렸다.
수지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나밖에 없는 바지인데. 이걸 입고 돌아다니면 70년대 록 가수처럼 보일 것이 분명했으나 지금 상황에선 별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다.
‘바지 벗기기가 힘들었나.’
기억은 드문드문했다. 어떻게 바지가 찢어졌는지 정확한 경위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렉스가 벗기려다 여러 차례 신경질을 냈던 거 같다. 그렇게 엉망이었던 어젯밤을 떠올리자 수지의 얼굴이 다시금 열매처럼 붉게 물들었다.
노골적인 정사를 한 아침보다 그를 유혹하던 어제가 더 부끄러웠다. 합리적 이유가 있다는 듯 그와의 관계를 거절했다가 몇 시간도 안 되어 그가 좋다고 몸을 던져 버리다니. 자신이 이중적으로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수지는 부끄러움이 이내 수치심과 모멸감의 감정으로 변화하자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그때 잡은 고기를 냄비에 익히던 사내가 말했다.
“어서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