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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17)화 (17/163)

17화

“……음!”

물밀듯이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수지는 정신없이 치대는 뜨거운 입술을 느꼈다. 빗속에서도 열기가 느껴질 만큼 그의 입술은 뜨거웠고 혀는 녹을 것처럼 부드러웠다. 안쪽으로 파고든 혀는 수지의 입안을 휘몰아치듯 훑었고 수지는 그 횡포에 휩쓸렸다.

진한 타액이 혀를 타고 넘어왔다. 수지는 목을 젖히듯 끌어안는 그의 동작에 턱이 들려 그가 넘긴 타액을 꿀꺽꿀꺽 삼켰다. 빗물의 맛도 났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눈가가 흐려질 즈음, 사내의 키스는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아, 음, 읍……!”

멈출 수가 없었다. 수지는 제 입 안을 완전히 앗아가듯 휩쓰는 그의 혀에 숨쉬기도 가빴다. 머릿속에 붉고 하얀 구름이 이지러지듯 피어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할 때, 그가 손을 움직였다.

수지는 자신을 때리는 빗물에, 그리고 입 안을 탐하는 혀에 그의 손길이 속옷을 풀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의 맨가슴에 달아오른 유두가 스치자 아찔함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사내는 입을 아- 하고 벌린 수지의 혀를 빨아당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쪽 빨았다. 수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하고 싶지 않나?”

렉스는 눈앞의 자극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이 빗물에 그녀를 눕히고 정신없이 빨고 쑤셔 넣고 싶은데 여자는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었다. 자신의 상체가 완전히 발가벗겨져 탐스러운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몹시 놀랐다는 듯이.

“제, 제가요.”

수지는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귀까지 빨개진 그녀는 이런 상황이 단연코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섹스하기 전 상황이. 수지는 목까지 붉어진 상태로 힘겹게 말했다.

“첫 관계에 로망이 있어서요.”

“뭐?

“그, 그러니까 침대에서 기분 좋게 하는 거요.”

“…….”

“좋아하는 사람이랑 침대에서 하나씩 옷을 벗겨 주면서 하는 게 꿈인데.”

수지는 이 말을 하는 자신이 너무 고지식한 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첫사랑의 기억만을 품은 채 그 언젠가의 연애를 꿈꿨던 수지에게 그런 로망이 있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그녀는 24살이었다.

아직 경험이 없었던 수지에게도 대학교 때 잘 지내던 선배와 그럴듯한 관계가 될 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선배를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니었고 합격에 대한 열망도 커서 그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뒤 수지는 시험에 합격했지만 뭐라 정의 내릴 수 없는 아쉬움을 느꼈다. 선배에 대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가 다른 여자하고 사귀는 걸 봐도 아무렇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들이 기분 좋게 웃고 떠드는 모습이 부러웠다. 그렇게 서로를 내어줄 것처럼 바라보며 으레 그 나이대에서 발산하는 욕망을 꾸밈없이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이.

수지는 의아해하는 사내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제가 바라는 게 있다 보니. 좀 더 말이 통하고 나서 하면 어떨까요? 이, 이렇게 막무가내가 아니라 침대에서, 서로 바라는 걸 이야기해 가며…….”

너무 황당무계한 요구일까. 수지는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가 당황해 깜빡한 것이 있었다.

렉스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단지 그녀의 거절하는 듯한 뉘앙스를 알아차렸을 뿐이다. 렉스는 그녀를 음험한 눈으로 보았다. 저 붉게 물든 볼을 핥고 가늘고 하얀 목을 깨물어서 그녀의 가슴 돌기까지 지저분하게 빨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저 움츠러든 다리를 보기 좋게 벌려서 제 상징을 집어넣고 비음이 터져 나올 때까지 쑤셔 넣으면 짜릿할 것 같은데.

렉스는 속이 쓰렸다. 그의 눈매는 당연히 욕구불만으로 짙게 휘어질 수밖에 없었다. 수지는 그가 화났다는 생각이 들자 움찔 입을 다물었다.

‘기분이 나빴나.’

하긴. 자신이라도 이렇게 열이 오른 순간에 물러나면 화가 날 것 같다. 수지는 초조함과 자책감으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을 달싹이는데 그가 허리를 숙여 떨어진 속옷을 주웠다. 굳은 수지에게 천천히 옷을 건넨 사내는 이윽고 거처로 발을 옮겼다.

수지는 서둘러 속옷을 입은 채 그를 뒤따랐다. 온몸이 비로 젖어 비척거렸지만 그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온 정신이 사내의 눈치를 살피는 데 쏠려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지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로 무너진 천장을 보수하는데 전념했다. 뚝뚝 실내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집중해서 수리하더니 그게 끝나자 이번엔 푸른 열매를 마저 깎는 데 공을 들였다.

수지는 그가 한 번도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괜히 말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왕이면 제대로 하고 싶었는데.’

그가 좋으니 말이다. 수지는 곧 그 생각에 깜짝 놀랐다. 언제 그에게 이렇게 마음을 주고 만 것일까. 수지는 저도 그 시작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에게 도움을 받을 때마다, 그리고 그가 늪을 헤치고 앞서서 걸을 때마다 설렘과 고마움의 감정이 커졌고 그 감정은 신뢰와 기대감으로 변해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감쌌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런 감정은 아주 옛날에 느껴봤던 터라 확실하진 않지만.’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레며 마음이 놓인다. 누군가를 볼 때마다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 그게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상황 탓이라 해도 좋고 안정감을 선호하는 자신의 취향 탓이라고 해도 좋다. 그저 보기만 해도 설렜던 첫사랑하고는, 렉스를 향한 감정이 조금 달랐지만 수지는 그게 자신이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과 달리 성인이 되니 듬직하니 안정감 있는 남자를 좋아하게 된 거라고.

수지는 생각을 정리하며 힐끔 그를 살폈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괜히 제 발 저린 것처럼 어깨를 떨었다. 그러자 렉스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수지의 떨리는 눈과 입술, 가느다란 목덜미, 어깨를 차례대로 훑은 그가 이내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수지는 괜히 속상해서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고개를 떨어뜨리는 수지의 뒤통수를 렉스가 씹어먹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은 모르면서.

‘어떡해.’

수지는 렉스가 불쏘시개로 불길을 키우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는 수지의 새 알 요리가 끝나자 거기에 낮에 잡은 짐승을 굽기 시작했다. 노릇하게 구워지는 고기 냄새가 방안에 가득 채웠지만 수지는 렉스에 대해 생각하느라고 자신 몫의 새 알 스크램블도 먹을 여유가 없었다.

“식겠군.”

렉스는 한눈팔고 있는 수지를 보며 한마디를 했다. 건조한 말투가 어떻게 들렸는지 수지는 움찔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렉스가 눈으로 힐긋 접시를 가리키자 수지는 접시를 든 채 허겁지겁 스크램블을 먹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곧 성급한 식사의 대가가 따랐다. 렉스는 기침하는 그녀를 보면서 커다란 나뭇잎에 빗물을 받아 건넸다. 사레가 단단히 들린 수지는 그가 준 물을 받아먹고서야 벌게진 얼굴로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갑자기 어디 가요?”

렉스는 몸을 일으켰다. 사레들린 저 때문에 밥맛이 없어진 걸까? 고기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수지가 놀라서 묻자 그는 푸른 열매가 있는 나무 탁자를 가리켰다. 깎는 작업을 계속한다는 의미였다. 그가 그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수지는 안도하면서도 괜히 저 때문이 아닌가 신경이 쓰여 그를 계속 바라봤다.

그렇게 그가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작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자 그날의 피로가 몰려와 수지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수지는 물린 어깨를 손으로 긁으면서 그를 보았고, 그는 침대를 쳐다보며 수지에게 자라는 신호를 보냈다.

수지는 침대에 올라섰다. 그러나 피곤한 몸과 달리 척척한 침대에 몸을 눕히자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어깨도 더 가려워져 왔다. 졸린데, 몸이 무거운데 잠을 잘 수 없다는 건 고역이었다. 몇십 분이나 뒤척이면서 소양감을 느끼던 수지는 못 참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하네.’

사내는 공예가일까? 늪지를 빠져나가면 의외로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보는 장인일 수도 있겠다. 수지는 골몰하고 있는 그가 신기하기도 했고 낯설기도 해서 잠시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나무통이 눈에 들어왔다.

‘잠이 잘 오게 해 준다고?’

사실 이런 곳에서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게 더 말이 안 된다. 늘 시야를 가로막는 광대무변한 안개와 흐물거리며 질척이는 끝없이 불안정한 땅.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기상천외한 괴물들이 튀어나오고 예측할 수 없는 공격들이 감행된다. 이곳은 밥을 먹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장소였다.

‘그러니 여기 머물렀던 자들도 잠 오는 약초가 필요했던 거겠지.’

수지는 가만히 나무통에서 마른 잎사귀를 꺼냈다.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러온다. 수지는 벌써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하나만 쓰자.’

남은 건 사내도 쓸 수 있게. 수지는 그렇게 마른 잎사귀 하나를 꺼내 입 안에 넣었다. 어금니에 넣고 씹었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입 속에서 사라졌다. 수지는 푹 자고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어났을 때는 렉스의 화가 조금 누그러져 있기를 바라면서.

‘뭐지?’

렉스가 이상한 시선을 느낀 것은 수지가 약초를 먹은 몇 분 뒤의 일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지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던 그녀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잠에 빠진 거라고 생각한 렉스는 고개를 들다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놀라고 말았다.

“뭐에 당한 거지?”

렉스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긴장했다. 표정이 이상했다. 정념에 빠진 것처럼 몽롱해진 동공과 발그레해진 볼. 렉스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저게 뭐라고 아래가 뜨거워지는 것이란 말인가. 그녀에겐 자신의 욕정의 불꽃을 틔우는 신비한 도구라도 있는 것 같다. 확 불이 지펴진 음심을 느끼면서 렉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렉스가 다가가자 그녀는 몸이 달았는지 어깨를 그의 쪽으로 옴짝거렸다. 렉스는 확인을 위해 그녀에게 한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뺨에 닿자 금세 얼굴을 비벼 온다. 렉스는 입가를 올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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