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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 보고서 (15)화 (15/163)

15화

‘냄새 좋다.’

잠에서 깬 수지는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안 좋은 꿈을 꾼 탓인지 맛있는 냄새는 더욱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에 대한 꿈을 꾸었다. 돌아오지 않는 소년에 대해서. 그 소년을 기다리던 한 소녀에 대해서.

소녀는 왜 소년을 찾지 못하는 것인지 늘 의문이었다. 의문은 돌덩이처럼 소녀의 마음을 내리눌렀고 이내 마음 깊숙이 가라앉았다. 몸이 안 좋거나 마음이 힘들 때면 수지는 늘 그 돌덩이를 느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과 절망감의 상징인 돌덩이를.

그런데……. 꿈의 마지막에서 누군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힘든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마음속 돌덩이가 조금 가벼워졌다는 생각이 들 때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깨어난 것이다.

서서히 눈을 뜨자 새 잎으로 메워진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옆에선 고기 익는 소리가 지글지글 기분 좋게 들려오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냄비에 익어 가는 고기가 보인다. 냄새가 좋았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오자 수지는 조금 민망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내는 어디 갔을까. 그녀는 눈을 돌려 그부터 찾았다. 그가 안 보이자 마음이 부산해졌다. 쿵쾅쿵쾅 심장이 불편하게 뛴다. 수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일어났군.”

사내는 물에 젖은 머리를 한 손으로 넘기며 말했다. 수지는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리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빗물이 구불구불 그의 얼굴과 어깨를 흘러 상체로 굴러떨어지는 모양새가 지독하게 야했다.

넋이 나가 쳐다보고 있던 수지는 사내가 왜 그러냐는 듯이 빤히 쳐다볼 즘에야 고개를 돌렸다. 귀까지 열이 달아오른 수지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할 때, 사내가 덜컹 소리를 내며 익은 고기를 냄비에서 건져 올렸다.

“먹어도 되겠군.”

사내는 솜씨 좋게 칼로 고기를 부위별로 잘랐다. 그리고 잘 익은, 살이 연한 부위를 수지에게 건넸다. 수지는 머뭇거렸다가 고기를 받아서 입에 넣었다. 잘게 부서지면서 목으로 쉽게 넘어갔다. 순한 맛이 좋았던 수지는 사내가 주는 고기를 계속 받아먹었다. 무슨 고기냐고 묻고 싶었으나 물었다간 괜히 후회할 거란 예감이 스쳤다. 그렇게 묻지 못할 고기를 받아먹던 수지의 눈에 사내 옆에 놓인 몇 가지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신비한 가루가 들어 있던 가죽 주머니와 철제 라이터. 그리고 못 보던 푸른색의 열매가 한 다발 가득 놓여 있다. 사내는 수지의 시선을 느끼곤 턱짓으로 물건을 가리켰다.

“네 물건, 궂은 날엔 더 유용하더군.”

사내는 라이터를 잡아 수지에게 건넸다. 수지는 라이터를 받으면서 자신의 손가락 끝에 얇은 잎사귀가 돌돌 말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걸 지금에서야 발견하다니. 사내가 눈에 안 보여서 경황이 없었나 보다. 수지는 얇은 잎사귀 붕대가 감긴 열 손가락을 감탄하며 쳐다보았다. 남자를 바라보자 그가 이내 짓이긴 벌레의 흔적을 가리켰다. 그걸로 치료했다는 의미 같았다.

‘이번에는 회색 가루를 쓰지 않은 모양이지?’

의아해져서 가죽 주머니를 쳐다보자 그가 시선을 눈치채고 말했다.

“얼마 없어서. 이건 다른 걸 위해 남겨 둬야 해.”

사내는 덤덤히 설명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사내의 표정과 어조가 단호하다는 것에서 더 쓸 수 없다는 건 알겠다. 수지는 따로 토를 달지 않은 채 고맙다는 의미로 그에게 미소 지었다. 사내는 그 미소를 얌전히 받더니 고기를 내밀었다.

수지는 착실하게 입을 벌렸다. 아까보다 더 온순해진 느낌이었다. 오물오물. 얌전히 먹는 모양새가 작은 새처럼 귀엽기도 하고 어린 말처럼 산뜻하기도 하다. 렉스는 동물을 기르면 이런 기분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런 털 많고 냄새나는 것들은 이동 수단이 아니면 곁에 둘 이유가 없다. 그냥 곁에 두고 싶은 수지와는 달리.

‘다 먹었나.’

수지는 손을 저으며 고기를 거절했다. 배를 만지는 게 다 먹었다는 의미 같았다. 자리에 선 수지는 곧 고개를 돌리며 집 안을 치우려 했다.

정리할 것도 없는데. 그녀는 할 일이 없는 걸 못 견뎌 하는 성미 같았다. 휘하 기사들 중에서도 그런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렉스는 그녀가 하는 양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는 자다 일어난 나뭇잎 침상을 손으로 탁탁 털기도 하고 기어 다니는 벌레를 나뭇가지로 들어 밖에 던지기도 한다. 바닥에 있는 먼지 쌓인 그릇들은 탁탁 털어서 한군데로 정리해 놓았고 벽에서 떨어진 잎사귀들을 모아 땔감으로 던졌다.

그러던 중. 수지는 원주민 남자가 놓고 간 나무통을 발견했다. 그녀는 코를 킁킁거리더니 그 안에서 말린 풀잎을 찾아냈다. 희미한 향이 맡아졌다. 렉스는 그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원주민 사내가 내게 내밀었던 거군.’

귀한 걸 줄 테니 자신을 죽이지 말라는 의미로. 매혹초는 왕국에서도 비싸게 거래되는 향초였다. 귀족들이 주로 잠자리에서 쓰거나 임신을 하기 위해 사용했다. 수요가 꾸준히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값도 잘 쳐줬고 찾으면 금방 팔려서 이것만 전문으로 캐는 약초꾼들이 있을 정도였다. 가공하면 그 효과가 더 확실해지지만 저 상태로도 이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귀족이 아닌 이들도 좋아하는 약초였다.

반면 수지는 그걸 어떤 용도로 쓰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망설이더니 이윽고 그에게 가져왔다. 렉스는 입술을 살짝 올렸다.

“먹는 거야.”

섭취하며 정력이 좋아진다는 의미로 침대를 가리키자 수지가 크게 움찔했다. 렉스는 씹는 시늉을 했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의미로 몸을 젖히며 입가까지 올렸다. 자세한 설명이었는지 수지의 볼이 빨개졌다. 확실하게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렉스는 그녀가 그걸 어떻게 할까 싶었다. 수지는 약초를 다시 나무통에 넣은 채로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언제가 써먹을 생각인지.

‘잠이 잘 오게 하는 약초구나.’

하지만 수지는 그의 팬터마임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다. 얼굴이 빨개진 것은 렉스의 설명하는 모습이 어딘가 관능적인 데가 있다고 느껴서였다. 결코 미약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녀는 잠이 안 올 때 손쉽게 쓰자고 침대 위에 보관해 둔 것이다. 그걸 그날 저녁에 쓰게 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왔다. 열대 우림 속 몬순기후에 들어온 것처럼 지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내리는 굵은 빗줄기를 보면서 수지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습해도 너무 습했다.

안개만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비가 오기 시작하자 실내가 사우나에 들어온 것처럼 답답해졌다. 숨쉬기도 어려웠고 옷도 끈끈하게 몸에 달라붙었다. 손부채로 열심히 바람을 만들었지만 더 더워질 뿐이었다.

‘그는 괜찮나?’

사내를 쳐다보자 그는 아무렇지 않은지 하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푸른색의 딱딱한 열매의 껍질을 벗겨 내는 것이다. 그걸 무엇에 쓰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집중한 그를 보면서 수지는 괜히 방해하지 말자며 불자리를 나뭇가지로 쑤셨다. 불길을 키워 습기를 태워 보려던 것이었지만 오히려 공기만 더워지는지 땀이 더 많이 났다.

수지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차라리 습하기만 한 게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수지는 문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렉스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제 일에 집중했다.

‘좋아. 반대되는 의견이 없으니까.’

수지는 용감하게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빗소리가 커지면서 시원한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수지는 살 것 같다고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몸에 갇혀 있던 열기가 그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언제까지 여기 머물게 될까.’

수지는 안개가 사라진 늪지를 바라보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늪지는 커다란 물웅덩이처럼 변해 있었다.

망막한 수풀과 덤불이 시야마다 무성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들이 수면을 튕겨 부유했다. 몸이 젖은 새들이 꺼억꺼억 울며 낮게 비행했으며 가끔 꽃게나 갯지렁이 같은 것이 진흙을 뚫고 나와 몸을 비틀었다.

신비롭다고만은 할 수 없는 암녹색의 그 우중충한 광경에서 수지는 눈을 떼지 못했다.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곳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저 검은 늪처럼 머릿속이 깜깜하기만 하다.

‘그가 나간다면 따라 나갈 텐데.’

수지는 한 가닥 희망을 걸며 그를 보았다. 열매를 가공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사내는 뒤에서 바라보아도 멋진 몸매를 지녔다. 이런 곳에서 외딴 생활을 할 사람처럼은 결코 보이지 않았다.

‘혹시 도망쳐 이곳에 스며든 게 아닐까?’

그는 사실 어디 유명한 조폭 가문의 후계자로 항쟁을 피해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습지 한가운데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피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수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보여 준 무위는 조폭들이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냈다. 괴물들과 싸우고 바람처럼 이동하고, 타잔처럼 습지를 살아가고.

수지는 그를 보면서 제가 이상한 장소에 와 있다는 것을 여느 때보다 확신하고 있었다.

‘난 다른 세계에 떨어진 걸까?’

수지의 가슴은 착잡해졌다. 다른 세계라니. 책에서만 보던 차원 이동을 하게 된 걸까? 어떠한 연유에서? 수지는 의아해졌다. 다시 돌아가는 방법이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찾아내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 때였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먼저 반응한 것은 사내였다. 렉스는 저 멀리서 비닐 날개가 분주하게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빗속에서 몰려다니는 벌레들인지 수백 마리가 날아오는 것을 감지하자 렉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닫고는 수지의 팔을 잡았다.

“왜요?”

수지는 렉스의 굳은 표정에 놀라서 물었다. 렉스는 설명 없이 수지의 몸에 바닥의 질척거리는 진흙을 바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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